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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최정희 - ‘군국’의 어머니와 ‘황군’ 아들

by 낮달2018 2022.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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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국의 어머니’를 찬양, 일제의 전쟁 수행과 총동원 체제에 협력

▲ 소설가 최정희(1912~1990)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설가 최정희(崔貞熙, 1912~1990)는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는 아니다. 이는 이름을 대면 떠오르는, 잘 알려진 작품이 없는 탓이 크다. 지명도 높이는 데는 그만인 교과서에 실린 소설도 없으니 더 말할 게 없다. 문학을 가르치고 있지만 나 역시 짧게라도 최정희를 설명할 재간이 없을 정도다.

 

최정희는 서사시 「국경의 밤」과 「웃은 죄」, 「북청 물장수」, 「산 너머 남촌에는」 같은 서정시로 유명한 파인 김동환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파인과의 사이에 뒷날 소설가가 된 지원(1943~2013)과 채원(1946~ ), 두 딸이 있다. 부창부수라던가, 그도 남편 못잖은 친일 행적을 남겼다.

 

남편 김동환과 함께 거론되는 친일 행적

 

최정희는 함경북도 성진 태생이다. 호는 담인(淡人).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서울 중앙보육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일본 도쿄에서 유치원 보모로 일하였다. 1931년 귀국하여 삼천리사 기자로 근무하면서 『삼천리』 10월호에 소설 「정당한 스파이」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1934년 일제에 의해 조직 사건, 이른바 신건설사 사건(제2차 카프 검거 사건)이 발생하였다. 카프 계열 연극단체인 ‘극단 신건설’이 창립작품으로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제작하여 지방을 순회하며 공연하던 중이었다.

 

카프의 주요 구성원이던 박영희, 이기영, 한설야 등이 포함된 이 사건에 최정희는 남편인 영화감독 김유영(본명 김영득)과 함께 연루된다. 그는 전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8개월 후인 1935년에 석방되었다. 남편 김유영은 이 사건으로 복역하고 출소한 뒤 사망하였으며, 해방 후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최정희는 1936년부터 1937년까지 《조선일보》 출판부와 학예부 기자를 지냈다. 처음엔 동반자 계열의 작품을 썼으나, 출옥 후 여성들의 심리나 운명을 다룬 작품을 주로 발표하였다. 1937년 『조광』 4월호에 본인이 사실상의 등단작이라고 밝힌 「흉가」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정희가 1939년부터 2년 동안 연작 형식으로 발표한 「지맥」(『문장』 1939년 9월호), 「인맥」(『문장』 1940년 4월호), 「천맥」(『삼천리』 1941년 4월호)이 이 시기 대표작이다.

 

당시 월간 종합지인 『삼천리』 발행인이 김동환이었는데, 1939년 남편이 사망한 뒤 최정희는 김동환과 동거하면서 실질적 부부가 된다.

 

최정희는 1939년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문예의 밤과 1940년 평양의 문예대강연회에서 「자화상」을 낭독하면서 친일 행렬에 합류하였다. 1941년부터 1942년까지 노천명·모윤숙과 더불어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지냈고, 1941년 9월 임전대책협의회의 채권가두유격대에 참가하였다. 이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과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12월 조선문인협회 주최 결전문화 대강연회에서 노천명 등과 함께 시를 낭송하였고, 같은 달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에서 강연하였다. 강연의 제목은 ‘군국(軍國)의 어머니’로, 그 내용은 『대동아』(1942년 5월호)에 실렸다.

 

“속일 수 없는 일본인이 되리라는 생각을 문학화해야”

 

최정희는 각종 좌담회에 참여하여 ‘신체제하 부인의 역할’이나 ‘조선 문학의 역할’에 대해 토론하였다. 조선문사부대 문인 38명과 함께 양주 지원병훈련소를 참관하고 와서 『삼천리』(1940년 12월호)에 ‘문사 부대와 지원병’이라는 특집에 ‘진실로 이기라’라는 제목으로 소감문을 발표하였다.

 

1941년 11월에는 《매일신보》에 연재된 「국민문학의 공작정담회(工作鼎談會)에 이선희·모윤숙과 함께 참가하여 국민문학에 임하는 자세를 밝혔다. 또 『반도의 빛』 1942년 7월호에 ‘우리도 군국의 어머니’라는 특집 중 하나로 게재된 「5월 9일」(일본 각의에서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결정한 날)에서 군국의 어머니 역할을 강조하였다.

 

우리들한테도 총을 잡는 그러한 마음의 준비가 없어선 안 될 것 같아. 그런 마음이 아니고는 국민문학도 국책문학도 안 써질 것 같으니까. ……일본인이 되려는 그 생각, 그 생활을 그리는 데 있지요. 속일 수 없는 일본인이 되리라는 생각을 문학화하여야겠지요.

    - 「국민문학의 공작정담회」, 《매일신보》(1941년 11월 12~15일 자)

 

우리의 아들을 훌륭하게 만드는 힘도 우리 어머니한테 있고, 우리나라 일본을 세계에 빛나게 하는 것도, 우리 국민을 굳세게 자라나게 하는 힘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 「5월 9일」, ‘우리도 군국의 어머니’ 특집, 『반도의 빛』(1942년 7월호)

 

최정희는 ‘군국의 어머니’라는 명제를 여러 차례 다루었다. 그는 조선금융조합연합회가 발간하는 친일 잡지인 『반도의 빛』을 통해 「군국의 어머님들」 또는 「군국 모성찬(母性讚)」이라는 글로 ‘군국의 어머니’를 실천하는 일본 여성들을 소개하였다. 열전 형식의 이 글들에서 묘사한 일본 여성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식들을 잘 키워서 근대 교육까지 받게 하지만, 마침내 아들을 전장에 보냄으로써 일본의 전시 정책에 협력하는 이른바 ‘강인한’ 어머니들이다.

 

최정희는 소설 창작을 통해서 일제의 침략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그는 징용과 여성의 애국반 활동, 지원병, 신체제, 내선일체 등을 소재로 한 소설로써 이들 제도와 정책을 옹호하고 일제의 전쟁 수행과 총동원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결혼한 지 8개월 만에 징용 영장을 받게 된 머슴 병태는 아내와의 이별을 못내 아쉬워하나, 징용 열차 안에서 국민동원총진회(國民動員總進會)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연설을 듣고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이 소설의 제목은 「징용 열차」(『반도의 빛』 1945년 2월호)다.

 

‘전쟁 수행에 앞장설 남자의 위대한 힘을 찬양’하는 연설에 응징사(應徵士, 징용으로 강제 동원된 사람)들은 고무된다. 병태 역시 자신이 ‘영미(英米)’를 구축(驅逐)하고 동양 민족을 구원할 중대한 사명을 가졌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는 이 소설을 통해 최정희는 동포들에게 징용에 나갈 것을 선동하였다.

▲여성의 애국반 활동을 부각한 작품 「2월 15일의 밤」, 『신시대』(1942년 4월호)

여자의 일터는 가정이라고 생각하는 남편과 애국반 반장이 된 아내 사이의 소소한 갈등을 다루고 있는 「2월 15일의 밤(二月十五日の夜)」(『신시대』 1942년 4월호)은 여성의 애국반 활동을 부각한 작품이다. 아내가 남편을 설득하는 논리가 자못 흥미롭다.

 

아내는 “잠자리처럼 아름답게 날고 있는 비행기보다 불꽃처럼 적군의 비행기를 추적하여 싸우는 비행기가 훨씬 좋은 것처럼 하늘을 바라보며 저 하늘을 어떻게 지킬까 생각하는 여자가 훨씬 아름답게 보인다”고 말한다. 여성의 입장에서 우회적으로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진술이다.

 

부부 간 갈등은 이날 밤(제목이기도 한 2월 15일 밤) 라디오에서 싱가포르 함락 소식이 전해지면서 해소된다. 후방에서 여성의 역할이 애국반 활동이나 근검, 절약과 같은 생활 개조에 한정되어 있더라도 그것이 결국 총동원 체제에 협조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을 조선어로 다시 쓰고 내용을 추가한 작품이 「장미의 집」(『대동아』 1942년 7월 호)이다.

 

군국의 어머니와 황군 아들의 「야국초」

 

최정희가 쓴 친일소설 가운데 작품성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야국초(野菊)」(『국민문학』 1942년 11월호)다. 한때 사랑하였지만, 자신의 임신을 알고 떠나간 옛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된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 ‘나’는 아들을 데리고 지원병훈련소를 방문한다.

 

이때 훈련소 교관이 여주인공에게 부인 교화의 차원에서 건네는 이야기를 통해 ‘군국의 어머니상’이 강조된다.

 

“매년 지원병이 입소하면, 곧 그 가정 사정이라든지 부모 형제의 찬 부 등을 조사합니다만, 언제나 모친 쪽의 반대가 많습니다. 수십만이라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렵게 선발된 광영자(光榮者)들입니다만, 이런 식으로 모친 되시는 분이 반대하거나 흐릿한 자는 성적도 좋지 않고, 간혹 탈출까지 하는 일도 생기는 겁니다.

 

아무래도 무지한 모친이란 눈앞의 맹목적인 애정만 알지, 크고 빛나는 미래 같은 건 조금도 의식하지 못해서……. 반도의 청년이 훌륭한 군인이 되려면 우선 무엇보다도 어머니들의 힘이 큽니다.”

 

‘나’와 아들 승일은 지원병들의 절도 있는 생활과 건강함, 열정에 감화되어 제국의 군인이 될 결심을 더욱 다진다. 소설 마지막에서 여주인공이 옛 애인에게 건네는 말이 이 친일소설의 백미(?)다.

 

“승일이를 키우듯이 승일이를 위해 들국화를 아름다운 꽃, 강인한 꽃으로 가꾸기로 했습니다. 그게 제게 하셨던 당신의 행위에 대한 복수가 될 테니까요.”

 

여주인공은 명예와 지위를 가진 지식인 남성이 지닌 부도덕성과 개인주의를 폭로하면서, 자신은 아들을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군인으로 키우리라 결심한다. 그녀가 이 상반된 행위를 자신을 버린 남자의 행위에 대한 ‘복수’라고 말하는 이유다. 소설 제목인 ‘들국화’는 강인함으로 무장된 어머니와 장래 황군으로 나설 아들을 비유한 것이다.

 

「여명(黎明)」(『야담』 1942년 5월호)은 기독교 계통의 여학교를 나온 세 여성이 서양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신체제’에 접근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미영을 비판하고 동양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친구와 소극적이지만 이에 동조하는 친구, 서양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친구가 주인공이다.

▲ 군국의 어머니상을 강조한 친일소설 「야국초(野菊抄 )」, 『국민문학』(1942년 11월호)

그중 서양 중심주의자는 서양인 교장과 영어 교사에 대한 추억 때문에 ‘영미귀축(英米鬼畜)’ 논리에 동조하지 못한다. 그러나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서양(인)을 악(惡)으로 여기는 것을 보고 ‘아이들을 위해서’ ‘동양 사람 된 자격’을 갖기로 결심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무릇 모든 목적소설이 그러하듯 이미 정해 놓은 종착점을 향해 치닫는 서사의 경로가 들여다보이는 작품이다.

 

「환영의 병사(幻の兵士)」(『국민총력』 1941년 2월)는 조선인 여성 영순과 일본인 군인 야마모토 이사무(山本勇) 사이의 애정을 통해 ‘내선일체’ 논리를 드러낸 작품이다. 야마모토는 조선에 주둔하다가 중국 전선으로 가는데, 거기서 영순이 써 준 한글 모양을 하고 있는 조선의 가옥 구조와 중국의 그것이 닮은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거기서 “지나(支那)와 조선과 일본은 아주 오래전의 신대(神代)로부터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하고, 영순 역시 일본 군인을 통해 전쟁을 자기 것으로 깨닫게 된다. 내선일체 논리를 짜내기 위한 작가의 눈물겨운(?) 안간힘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 「 환영의 병사 ( 幻 の 兵士 ) 」 , 『 국민총력 』 (1941 년 2 월호 )

최정희가 쓴 친일소설의 주인공은 「징용 열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젊은 여성이다. 이들은 전시에 가정생활의 합리화와 개조, 군국의 어머니 역할 등을 적극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전쟁과 총동원 체제에 앞장서는 것이다. 최정희는 이들 작품 말고도 적지 않은 친일 작품을 썼다.

 

“그저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을 뿐”

 

장차 황군이 될 ‘들국화’에도, 신체제의 ‘여명’에도, 한·중·일 3국이 이어져 있다는 ‘환영의 병사’에도 불구하고 해방이 되었다. 남편 김동환은 반민특위에 자수하여 수감되었다가 공민권 정지 5년을 선고받았지만, 최정희는 전조선문필가협회(1946), 한국문학가협회(1949)의 추천회원에 명단을 올렸다.

 

남편 김동환이 납북된 후 최정희는 공군종군작가단 창공구락부에서 활동하였으며, 1957년 월간 종합잡지 『주부생활』의 주간을 지냈다. 해방 후 작품집 『천맥』(수선사, 1948)과 『풍류 잡히는 마을』(어문각, 1949), 장편 소설 『녹색의 문』(정음사, 1954), 『끝없는 낭만』(동학사, 1958), 『인간사』(신사조사, 1964) 등을 펴냈다.

 

1959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으며, 1964년 『인간사』로 제1회 한국여류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69년 한국여류문학인회장,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과 소설가협회 대표위원 등을 지냈다. 1970년 8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 이광수, 김동환(오른쪽)과 함께한 최정희(김동환 옆). 왼쪽은 모윤숙. ⓒ 위키백과

197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3년 3·1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일제의 강권 지배에 항거하여 들불처럼 일어난 거족적 항일투쟁의 이름을 딴 이 상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적지 않은 문인들에게 주어졌다. 조연현(1972), 백철(1976), 모윤숙(1980) 등이 그들이다.

 

최정희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친일에 대해 발언한 기록은 없다. 다만 어떤 술자리에서 후배 문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해서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 알았냐”고 했다는 이야기만 전한다. 거기에서도 참회의 뜻은 보이지 않는다.

 

김동환의 일대기를 펴냈던 파인의 셋째아들은 ‘부친의 친일 죄과’를 민족 앞에 사죄하였다. 그러나 소설가가 된 최정희의 두 딸은 모친의 친일 행적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정희는 1990년에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2019년 5월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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