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국민총력전을 위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 결성

by 낮달2018 2023. 10. 22.
728x90

[역사 공부 ‘오늘’] 1941년 10월 22일,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 결성

▲ 1941년 10월 22일, 경성부민관에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 결성대회가 열렸다.

1941년 오늘(10월 22일), 경성부민관 대강당에서 국민 총력전을 위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이 결성되었다. 대회는 일본인 요인과 윤치호, 최린 등 준비위원과 각도 발기인 대표 등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조선임전보국단(아래 보국단)은 같은 해 8월에 결성된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와 임전대책협의회가 ‘나라를 위하여 한 몸을 바치자’라고 하는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통합한 것이었다. 보국단의 강령은 황도(皇道) 정신 선양과 사상 통일, 전시체제에서 국민 생활 쇄신 등 다섯 가지였는데 ‘김동환(일제에 엎드려 ‘웃은 죄’)과 이광수(피와 살과 뼈까지 일본인이 되려 했건만)의 대역작’이라는 설립 취지는 다음과 같았다.

 

“아국(我國)은 현금(現今) 유사 이래 가장 중대한 시국에 직면하고 있는 동시에 또한 가장 숭고 존엄한 동아공영권 확립의 성업 완수의 도상에 있다. 차제 황국에 향생(享生)한 자는 누구임을 불문하고 각자의 분(分)에 응하여 그 성(誠)을 다하고 국운의 진전에 기여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은 물론이다.

차시(此時)를 당하여 아등(我等) 반도 민중은 과연 현재의 태세 그대로 나가도 좋을는지 설령 아등은 특별지원병 외에 일반적으로 병역에 복(服)하는 명예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나 적성(赤誠)을 가지고 정신적 물질적 또는 노무적으로 전력을 기울여 총후봉공(銃後奉公)에 일층 철저하여 써 충렬한 장병의 분투에 대응하고 무한한 황은(皇恩)의 만분의 일에 봉보(奉報)하는 방도가 열리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해서 반도가 물심 공히 병참기지 됨의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이 기회를 놓치고서는 재차 얻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후략)”

 

1930년대 이후 일제가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식민지 통치는 전쟁 수행이라는 과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이 시기 한국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고 인력을 공급하는 병참기지가 되어 있었다.

 

춘원과 파인은 이런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도 ‘그 진가를 발휘’ 운운하면서 ‘총후봉공(銃後奉公)에 철저’할 것, 일왕의 은혜(황은)에 보답하자고 선동하고 있다. 특히 ‘특별지원병’ 외에 병역에 복무할 기회가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이는 뒷날 학병제와 징병제의 찬양으로 이어졌다.

 

이사로 참여했던 인촌 김성수는 1943년 이후 학병제, 징병제를 찬양하는 25편의 사설을 <매일신보> 등에 기고했다. 그는 ‘조선징병령’을 ‘쾌보’라 표현하고 동포의 감격과 광영(光榮)이라고 찬양하며 조선 청년의 희생이 조선이 ‘황국’의 자격을 갖게 되는 일이라 강변하고 있다.

 

“조선징병령 감사주간에 당하여 소감의 일단을 들어 삼가 반도 청년 제군의 일고(一考)를 촉(促)코자 한다. 작년 5월 8일 돌연히 발포된 조선에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희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吾等) 반도 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深切)하였던 바이다.

—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 기풍을 조성하라.”(<매일신보> 1943. 8. 5.)

 

제군의 희생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아닐 것을 나는 제군에게 언명한다.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며 반도의 미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 “대의에 죽을 때, 황민의 책무는 크다”(<매일신보> 1943. 11. 6.)

임전보국단의 조직은 고문에 윤치호, 박중양(중추원 고문) 등, 상무이사에 김연수(경성방직 사주, 김성수의 동생), 박흥식(화신백화점), 김동환(시인) 등, 이사에는 설산 장덕수, 방응모(조선일보) 등, 감사에는 인촌 김성수 등, 평의원에는 김활란, 황신덕(추계학원), 모윤숙(영욕을 오간 렌의 선택), 최정희(들국화 - ‘군국’의 어머니와 ‘황군’ 아들) 등으로 구성되었다.

 

또 단장은 최린(3·1독립선언에 참여했다 변절)이, 부단장은 고원훈(중추원 참의, 기업인)이 맡았다. 사업부원으로 주요한(천황을 위해 죽으라! ‘야스쿠니의 신’이 되도록?), 장면, 모윤숙 등이, 전시생활부장은 이광수가, 부원으로 김동환, 최정희 등이 참여했다.

 

보국단은 1942년 1월 5일, 산하 조직으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婦人隊)를 구성하였다. 부인대에는 당시 유명 여성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지도위원에 김활란, 박인덕, 황신덕, 배상명 박순천, 임영신, 고황경, 박마리아 등이, 간사에는 모윤숙, 노천명 등이 이름을 올린 것이다.

 

보국단은 1941년 12월 14일 부민관에서 임전보국단 전선(全鮮)대회를 개최한 뒤 조선 신궁을 참배하고 부민관 강당에서 미영 타도 대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 강연회에 이광수와 김동환 등이 연사로 참여했다.

여성들은 보국단 ‘부인대’ 결성

 

이어 12월 27일에는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를 소집하여 여성의 총후 지원에 관한 연제로 강연하였다. 이 강연에는 다음 해 보국단 부인대에 참가한 여성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 보군단 부인대에 참여한 여성 친일 인사들.

이들은 1942년 2월 이후 보국단 사무실에서 부인대 주최로 군복 수리작업 등 근로 봉사운동을 전개하여 같은 해 12월까지 연중무휴로 이 작업을 계속했다. 부인대는 또 같은 해 5월, 노천명, 최정희, 모윤숙, 박인덕, 박마리아, 고황경, 등이 ‘군국의 새어머니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를 논의하였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2년 10월 29일 전체 역원대회를 소집하였고 이때,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새로 발족한 것을 기회로 발전적 해산을 결의하고 이 연맹에 합류함으로써 발족 1년 만에 해소되었다.

▲ 미쓰비시 군수공장에 끌려간 여자 근로정신대. 정신대에 끌려간 여성 일부는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들의 ‘국책 협력’을 빙자한 부역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식민지 백성들의 삶은 피폐를 거듭하고 있었다. 일제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 조달을 위해 경제적 수탈을 자행했고 식량과 전쟁 물자에 대한 강제 공출을 시행했다.

 

‘지원병제도’와 ‘징병제도’, 그리고 ‘학도지원병제도’의 실시로 한국 청년들은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갔다. 또 ‘모집’과 ‘알선’, ‘징용’이란 이름으로 전시 노무에 필요한 인원을 강제동원하였다. ‘여자정신대근무령’을 만들어 여성들을 강제동원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전선으로 끌려가 군인들을 상대로 한 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 친일 부역자들이 대동아공영권과 군국의 어머니를 되뇌고 있을 때도 광복의 시간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2017. 10. 21. 낮달

 

참고

· 임종국, <친일문학론>교주본, 민족문제연구소, 2013

· <위키백과>

· 우리 역사넷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