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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유치진, 연극사 거목의 지난날은 비루했다

by 낮달2018 2022.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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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정통 사실주의 극작가’로만 가르치는 동랑 유치진

▲ 유치진 (1905~1974) ⓒ 서울예술대

국문학을 전공하였지만 정작 대학 시절에 희곡 공부는 전혀 하지 못하였다. 유치진(柳致眞, 1905~1974)을 처음으로 공부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어 국정 국어 교과서를 가르치면서다. 1980년대 제4차 교육과정 『고교 국어 1』의 두 번째 소단원에 그의 희곡 「조국」(1막 2장)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조국」은 3·1운동을 배경으로 시위에 참여하려는 아들과 이를 말리는 홀어머니의 갈등을 통해 독립투쟁의 당위를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이 3·1 만세 시위에 참여하려다가 홀어머니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접자 동료로부터 ‘반역자’라며 매도된다. 그러나 시위가 고조되어 만세의 물결이 다가오고, 그도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갈등과 해소의 방식이 가르치는 교사나 배우는 아이들이 좀 멋쩍어할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연극이 본질에서 다소 신파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다지만, 감정에 따라 급격히 변화하는 인물의 성격이 쉬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해방 뒤 은둔생활을 하던 유치진은 1947년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재기하였다. 그러나 교사용 지도서는 물론이고 어떤 참고서도 그런 속사정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게 우리의 문학 교육 방식이었다. 아이들은 문학 시간에 유치진이 농촌과 식민지 현실을 탁월하게 묘파한 정통 사실주의(리얼리즘) 극작가라고만 배울 뿐이다.

 

극예술연구회 창립한 ‘정통 사실주의 극작가’로 남다

 

우리나라 근대극운동의 선구자이며 사실주의 희곡의 기초를 닦은 동랑(東朗) 유치진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교육이나 삶에서 연극이 그만큼 가깝지 못하다는 방증이 될지 모른다. 학교 교육에서 유치진을 배우는데도 그를 기억하는 건 쉽지 않다. 교과서가 아닌 문화생활에서 연극과 극작가 유치진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낯선’ 유치진을 설명하는 데는 청마(靑馬) 유치환(1908~1967)의 형이라고 소개하는 게 빠르다. 그도 저도 안 되면 잘나가는 코미디언, 가수, 작가를 배출한 서울예술대학의 설립자라고 하면 알아듣기가 한결 쉬울지도 모른다.

 

유치진은 1905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나와 체신원으로 근무하다 일본으로 유학 가서, 1931년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그가 연극계에 몸담게 된 것은 1931년 극예술연구회 창립 동인으로 참가하면서다.

 

극예술연구회(약칭 극연)는 유치진이 서항석(1900~1985), 함대훈 (1907~1949), 김진섭(1908~?) 등 외국 문학을 전공한 도쿄 유학생들(이들 일부를 ‘해외문학파’라 부르기도 한다)과 함께 결성한 신극 운동 단체다. 처음에는 계몽에 힘쓰다가, 뒤에는 실험 무대를 통해 번역극 공연 등으로 신파극을 극복하고 신극 정착에 이바지하였다.

 

유치진은 극연 동인으로 고골리의 <검찰관>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희곡 창작과 연기·연출·평론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창작 희곡으로 제2회 공연작 <토막(土幕)>(『문예월간』 1931년 12월호~1932년 1월호), 제5회 공연작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조선중앙일보》 1933년 11월호)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 밖에 <빈민가>(1935), <소>(1935) 등 1930년대 초중반에 발표한 작품들은 식민지의 농촌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하여 카프와 같은 경향파적 특성을 보였는데, 이 때문에 카프 문인들로부터 ‘동반자 작가’로 불리기도 하였다.

 

<빈민가>는 1934년 극작과 연출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삼일극장에 제공하여 공연한 작품이며, <소>는 주영섭(1912~?)과 이해랑(1916~1989) 등이 주도한 ‘동경학생예술좌’의 창립을 후원하여 초연하게 한 작품이다.

 

극예술연구회 제8회 공연 예정작이던 <소>는 여러 차례 검열을 거친 끝에 <풍년기>로 제목을 바꿔 1937년 2월에 공연되었다. 이 시기에 일제의 작품 검열은 가혹하였다. 이미 제6회 공연(1935) 때 존 골즈 워디(John Galsworthy) 작 <은연상(銀煙箱)>이 검열에 저촉되어 공연이 좌절된 데 이어 <소>도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소> 대신 선정된 심재순 작 <줄행랑에 사는 사람들>, 한태천 작 <토성낭>, 오케이시(Sean O’Casey) 작 <주노와 공작(孔雀)> 등도 모두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검열뿐 아니라 연극인에 대한 일경의 소환도 잦았고 더불어 심문, 투옥도 심심찮아 극단은 일종의 사상단체로 지목받고 있었다.

▲ 한국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으로 1940년대 대중극의 중심지였던 동양극장. ⓒ 위키백과

1935년을 전후하면서 극연의 위상과 창작 경향도 크게 바뀌었다. 극연에서 활동하던 연출가 홍해성이 동양극장 전속으로 옮겨가면서 유치진이 극연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되었고, <소> 사건 이후 작품 경향도 현실을 사실적으로 다루는 리얼리즘에서 현실을 우회하는 낭만주의와 역사주의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제12회 극연 공연작으로 유치진이 각색·연출한 <춘향전>(《조선일보》 1936년 2~4월)이 대성공을 거두어 이후 이 작품은 극연의 대표적인 레퍼토리가 되었다. 이 무렵 극연은 생활 보장을 명분으로 내세운 실천부원 11명이 탈퇴하면서 내분을 겪는데, 이 일로 극단은 더욱 대중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되었으며 그의 지도력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유치진이 1937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마의태자」는 1941년 ‘마의태자와 낙랑공주’로 제목이 바뀌어 극단 고협(高協, 1939년 3월 고려영화협회가 설립한 신극 단체)에서 공연되었다. 1938년 3월 극예술연구회는 일제의 명령에 따라 극단 이름을 ‘극연좌(劇硏座)’로 바꾸어야 했다. 이른바 ‘해외문학파’ 동인들이 탈퇴하고 유치진과 서항석 중심으로 운영진이 꾸려졌다. 같은 해 12월 극단 운영에 불만을 품은 이서향(1914~1969) 등 몇 명의 젊은 연극인이 지도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의 탈퇴와 제명 이후 유치진과 서항석만 남은 극연좌는 와해 직전 상태에 놓였다. 이후 1939년 제23회에 앤더슨 작 <목격자>(제19회 공연작)를, 제24회와 제25회에는 <춘향전>을 재공연하며 명맥을 잇던 극연좌는 결국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1941년, 조선연극협회 이사가 되어 친일로

 

극연좌 해산 뒤 유치진은 2년여 세월 동안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서 극단 고협에 협력하였다. 고협에서 그는 1940년 3월과 4월에 성공작 <춘향전>과 《동아일보》에 발표한 <마의태자와 낙랑공주>를 나옹 연출로 각각 무대에 올렸다.

 

한편, 유치진은 1931년 《동아일보》에 평론 「연극·영화전을 개최하면서」(6월 19~21일 자)를 발표한 이래 1939년 말까지 70여 편에 달하는 연극 비평과 희곡 비평 시론(時論), 1년간의 연극계 결산, 희곡 창작법과 영화에 대한 제언 등을 발표하였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국가총동원 법안을 만들어 ‘국민정신 총동원’의 표어를 내걸고서 이른바 ‘신체제운동’을 전개하였다. 연극의 경우 ‘국민연극’이라는 국책극(國策劇)을 강요하고, 그 추진 주체로 1940년 12월 22일에 조선연극협회를 만들었다. 국책 연극을 시행하려면 우선 연극인들을 하나로 묶는 조직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유치진이 친일의 길로 나선 것은 어용 조직인 조선연극협회의 이사에 취임하면서부터다. 유치진은 평론 「국민연극 수립에 대한 제안」(《매일신보》 1941년 1월 3일 자)에서 조선연극협회 조직의 당위성을 뒷받침하였다. 이어서 그는 1941년 3월 조선연극협회의 외곽 지원단체인 극작가동호회의 대표로 취임하였다.

 

당대의 대표적인 극작가 12명이 소속된 극작가동호회는 연극의 신체제에 부응하는 신체제 작품을 원활하게 공급하기로 서약하였다. 그 대가로 조선연극협회 소속 극단이 이들의 작품만을 공연해야 하는 특전을 누렸으니, 이 단체는 명실공히 일제의 비호를 받는 어용 조직일 수밖에 없었다.

 

유치진의 친일 활동은 자신이 창단한 어용 극단 ‘현대극장’을 통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현대극장은 1941년 3월 부민관 소강당에서 총독부와 국민총력조선연맹(총력연맹), 매일신보사 등 유력 기관의 문화·예술 관계자들과 연극인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창단되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40년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조직한 친일 단체이다.

 

현대극장에서 창립 공연으로 선을 보인 작품은 ‘선만일여(鮮滿一如)’를 주제로 창작한 <흑룡강(黑龍江)>이었다. 선만일여는 ‘조선과 만주는 하나’라는 뜻으로, 1936년 일제가 민족 말살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내세운 구호였다. 이는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라는 ‘내선 일체’의 만주판인 셈이었다.

 

유치진 작, 주영섭 연출로 이루어진 <흑룡강>은 1941년 6월 6일부터 사흘간 부민관에서 민관 지도층의 지대한 관심 속에 막을 올렸다. 이 작품의 주제는 만주사변(1931)에서 만주국 건국(1932)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난 속에서도 건국을 향한 이상을 실현한다는 것으로, 민족 상극(相克)보다 민족 협화(協和)로 발전하는 대동아 건설의 일단을 구 상화한 것이었다.

 

<흑룡강> 공연에는 전문학교와 중학교 학생들, 철도국, 전매국, 은행과 회사 등의 단체 관람이 이루어지면서 1만여 명의 관객이 동원되었다. 이는 매일신보사의 후원과 총력연맹의 지원 덕분이었다. 이는 또 현대극장의 신체제 연극이 당시 정관계의 주목거리였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현대극장은 1941년 8월 인천에서 <흑룡강>을 재공연하였고, 1941년 10월에도 만주 건국 10주년 기념 공연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흑룡 강> 등을 재공연하였다. 이후 현대극장에서는 세 차례에 걸쳐 북부와 서부, 남부지방 일대로 장기 순회공연을 떠났는데, 주요 공연작은 유치진이 창작하거나 연출한 작품이었다.

 

한편, 유치진은 《매일신보》에 평론 「국민연극의 구상화 문제–‘흑룡강’ 상연에 제하야」(1941년 6월 5일 자)와 《경성일보》에 일문(日文) 수필 「극단 전환의 시기(劇壇轉換の時)」(1941년 8월 24일 자)를 각각 발표하였다. 이는 일제의 전시 체제에 부응하면서 자신의 친일 작품이 ‘국민연극’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내용이었다.

▲ 「국민연극의 구상화 문제- 흑룡강 상연에 제하야」,《매일신보》(1941년 6월 5일 자)

1942년 현대극장은 유치진 작, 주영섭 연출의 <북진대(北進隊)>를 초연하였다. 4월 4일부터 4일간 부민관에서 상연된 <북진대>는 경성대화숙(京城大和塾)에서 주최하고 매일신보사가 후원에 나섰다. 공연을 주최한 경성대화숙은 1941년 1월 사상범의 보호·관찰 및 집단적 수용, 조선인의 황민화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 파시즘 단체였다.

 

<북진대>는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이용구(1868~1912)의 일진회가 일본을 도와 전쟁 승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북진대>는 일진회의 친일 행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이용구를 비롯한 친일 인사들의 매국 행위를 긍정적으로 부각하였다.

 

작품에는, 과거 일진회가 일본에 협력하여 러시아를 물리쳤듯이, 태평양전쟁에서도 조선인이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미영(米英)’을 격멸하자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북진대>는 1942년 4월 남부 지방으로 순회공연에 들어갔으며, 같은 해 10월 신부좌(新富座, 해방 후 동화극장)에서 재공연되었다.

▲ 친일 연극 < 북진대 ( 北進隊 )> 의 팸플릿

일제 지원 속 ‘국민연극’ 공연과 이동연극 보국대 파견

 

<북진대>의 다음 작품은 조선 농민들의 만주 이주를 통한 분촌운동을 그린 <대추나무>로, 서항석이 연출하여 1942년 10월 부민관에서 공연되었다. <대추나무>는 조선연극협회를 이은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조선총독부와 매일신보사 등의 후원을 받아 개최한 제1회 연극경연 대회 출품작이었다.

 

우람한 대추나무를 사이에 둔 두 집안의 소유권 갈등과 두 남녀의 엇갈린 애정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일제가 시행하는 만주 이주 정책에 대한 지지를 담고 있다. <대추나무>는 나무 분쟁을 겪은 뒤 ‘비좁고 낙후된’ 조선을 떠나겠다는 주인공의 이주 결정을 통해 만주 이주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는 목적극이자 국책극으로서, 이른바 ‘국민연극’이다.

 

노골적으로 일제의 정책을 선전·선동한 이 작품으로 유치진은 연극경연대회 개인상으로는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총독부 정보과장상)을 받았다. 이후 <대추나무>는 1943년 12월 제일극장, 1944년 5월 부민관, 그리고 1945년 4월 약초(若草) 국민극장에서도 재공연되었고, 현대극장의 주요 상연 목록으로서 매년 한 차례씩 반드시 공연되었다.

 

광복 뒤 1957년 유치진은 대학생 연극경연대회 공식 공연 작품으로 「왜 싸워?」를 써서 『자유문학』에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친일 국책극 <대추나무>를 개제·개작한 작품이었다. 이에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김광섭·모윤숙·이무영 등이 이를 문제 삼고 나섰다. 유치진은 이에 대해 『동랑 자서전』에서 이렇게 강변하였다.

 

「대추나무」는 이렇게 일제의 강압 하에서 쓴 작품이지만, 그 무렵에 쓴 「흑룡강」, 「북진대」와는 달리 일제에 아첨하는 구석이 없다. 물론 그중에는 간도로 떠나는 대목이 있어 당시 일제가 권장하는 북진(北進)과 부합한 점이 있지마는. 내가 그들의 북진 정책에 영합하려고 간도행을 넣은 것은 아니었다. ……일제의 작품상까지 받은 작품이었다 해도 「대추나무」만은 이 민족의 한 사람인 나더러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 『동랑 자서전』(동랑 유치진 전집 9, 서울예대출판부, 1993년)

 

유치진의 친일 부역은 연극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대극장 대표로서 각종 지면에 발표한 글을 통해서도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그는 감상문 「축 싱가폴 함락(祝新嘉坡陷落)」(《매일신보》 1942년 2월 19일 자), 일문 평론 「반도의 징병제와 문화인(半島の徵兵制と文化人)–우선 상무정신(先ず尙武の精神)」(《경성일보》 석간 1940년 5월 30일 자), 수필 「북진대 여화(餘話)」(『국민문학』 1942년 6월호)를 각각 발표하였다.

 

그는 또 일제의 만주 개척에 큰 관심을 보여 일문 보고서 「개척지 견학(開拓地見學だより)–통화에서(通化にて)」를 《경성일보》 석간(1942년 6월 18일 자)에, 평론 「개척과 희망–만주 개척지를 보고서」를 《매일 신보》(1942년 7월 30일 자)에, 그리고 대담 「만주 개척민 시찰 보고」를 잡지 『녹기』(1942년 8월호)에 연달아 기고하였다. 그가 만든 <북진대> 나 <대추나무> 같은 국책극이 흉내만 낸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유치진은 1943년 8월 도쿄에서 열린 제2회 대동아결전 문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하였다. 또 좌담회 ‘농촌문화를 위해서(農村文化のために)– 이동극단 이동영사대의 활동을 중심으로(移動劇團移動上映隊の活動を中心に)’(『국민문학』 1943년 5월호)에 참석하고 평론 「결전문학의 확립(決戰文學の確立)–싸우는 국민의 자세(戰ふ國民の姿)」를 발표 하였다.

 

다행히 일선의 황군이 굳게 전선을 지키고 있는 덕택으로 우리는 적의 위협을 직접 받지 않고, 일상생활에 다소의 부자유를 느끼면서도 너무나 안이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마음은 때때로 해이해져, 우리나라가 지금 정전의 와중에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기도 한다. 세계의 지도는 지금 색깔이 바뀌고 있는 중이다.

- 「결전문학의 확립-싸우는 국민의 자세」, 『국민문학』(1943년 6월호)

 

1944년 1월 1일 부민관에서 조천석 작 <무장선 셔먼호>를 현대극장과 약초극장(해방 후 수도극장) 산하 약초가극단의 합동 공연으로 상연하였다. 유치진 연출의 이 작품은 평양에 쳐들어온 미 해군을 물리친 역사적 사실(신미양요)을 극화한 것으로, 일제가 강요한 ‘배미영(排米英)’ 정책에 근거한 작품이었다.

 

또 현대극장은 자체 인력으로 이동연극보국대를 조직하여 산간벽지에 파견하였다. 1944년 4월 경성에서 선보인 작품을 가지고 평남 신창탄광에 있는 조선무연탄주식회사 내 각 탄광을 순회공연하였으니, 그야말로 옹근 ‘보국(報國)’을 한 셈이었다.

 

같은 해 유치진은 조선문인보국회 ‘소설·희곡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조선문인보국회는 조선문인협회를 비롯한 여러 문학 관련 단체를 통합한 거대 조직으로서, 조선총독부의 지휘 아래 문인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외곽 단체였다. 막 불혹으로 접어들던 유치진으로선 이 통합 조직에서 소설·희곡부의 수장이 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을 것이었다.

 

우익 연극계 선봉으로 재기, 초대 국립극장장 등 꽃길만 걸어

 

그러나 무적 황군의 승리는 진작에 끝나 있었다. 유치진은 1945년 8월 13일부터 시작한 현대극장의 「산비둘기」 공연 중에 해방을 맞이하였다. 자신의 친일 부역 행위가 걸렸던 것일까. 유치진은 1947년 2월경까지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은둔하던 유치진을 불러낸 것은, 당시 좌익 연극인이 연극계를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현실 상황에 대응하면서 재기를 꾀하기 시작하였다. 1947년 2월 그는 3·1운동을 소재로 한 단막극 <조국>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미군정이 좌익 연극을 탄압하는 상황 속에 그는 우익 연극계의 선봉이 되었고, 같은 해 5월 극예술협회 창립 공연작으로 외세 의존성을 떨쳐야 한다는 주제 의식을 담은 작품 <자명고>(5막)를 발표하였다. 정세의 변화에 그는 기민하게 적응하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은하수>(3막), <흔들리는 지축>(1막)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소』, 『역사극집』, 『흔들리는 지축』 등의 희곡집을 펴냈다. 우익 연극인들이 미군정의 지원 아래 한국무대예술원을 결성할 때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그는 연극계 전면에 다시 나섰다.

 

이후 그는 대학에서 연극을 가르치고 <용사의 집>과 <애국자>(이상 1949년)와 같은 우익 연극을 연출하였으며,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에는 <별>(5막)을 발표한 것 외에는 주로 논문 집필과 비평 활동에 주력하면서 남한 연극계의 주도권을 잡아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새 문화 정책에 대한 요망」, 「문화인의 건국에의 관심」 등을 통해 남한 정부 내의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넓혀 갔다. 그런 가운데 한국연극학회 회장과 서울시 문화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50년 초대 국립극장장에 피선되었고, 한국전쟁 뒤에는 <처용의 노래>(4막), <나도 인간이 되련다>(4막) 등 반공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역사물을 주로 발표하였다. 1955년에는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1막), <자매>(5막), <사육신>(4막)을 발표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문화상과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1958년에는 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 위원장에, 다음해 헬싱키에 서 열린 국제극예술협회에서는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61년에는 전국극장단체협의회장과 문교부 대학교수 자격심사위원에 위촉되었다. 도쿄에서 열린 아세아영화제에서는 국제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8년에 한국연극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62년에 부설 드라마센 터를 건립하고 한국연극아카데미 등의 부설 기관을 만들었다. 드라마 센터 개관 기념공연으로 <햄릿>과 <포기와 베스>를 각각 연출하였다. 297

 

같은 해에 전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초대 회장과 예술원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이때 그는 57세였다. 1963년 5월 문교부가 주는 문예상을 수상하였고, 1964년 극단 드라마센터를 창설한 이후 드라마센터와 서울연극학교 운영에 전력하였고, 3·1연극상(1967년) 등을 받았다.

▲ 1962 년 유치진이 건립한 남산의 드라마센터 . 그는 한국연극연구소와 한국연극아카데미 등의 기관을 만들었다 .

서울연극학교는 한국연극아카데미를 폐지하고 설립한 초급 대학 과정으로, 이후 1973년에 이를 다시 폐교하고 서울예술전문학교로 인가받았다. 이 학교가 서울예술전문대학을 거쳐 오늘의 서울예술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유치진은 1974년 2월 10일 지병인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9세.

 

1991년 문화부가 유치진을 ‘4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하였지만, 경남 충무시(현재 통영시)의 문화·예술인들이 유치진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는 바람에 김정호로 교체되는 일이 있었다. 대부분의 친일 부역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난 뒤에야 부역 행위가 조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유치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연극’ 부문에 수록되었고, 모두 12편의 친일 저작물이 밝혀져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일제 총독부의 관리들에게 연극인들이 ‘적당히 부려 먹을 수 있는 광대’쯤으로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연극을 통해서 식민지 지배 논리,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동하고 총동원 정책을 전파하는 일의 효율성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적지 않은 연극인들이 일제에 부역함으로써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유치진과 함께 활동한 연극인 가운데 극예술연구회 동인이었던 서항석과 함대훈을 비롯하여 극작가 이서향, 함세덕(「동승(童僧)」의 작가), 유치진의 작품을 주로 연출한 주영섭 등이 그들이다. 주영섭은 그의 형 주요한과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2018년 서울예대 학생과 교수들이 유치진의 아들인 유덕형 총장이 입학 전형료와 특성화 사업비 등을 유용하였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사퇴를 촉구하고 나선 일이 있었다. 유치진 일가가 법인 이사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세습 구조도 비판받았다.

 

학교 측이 개교기념일 무렵이면 교직원들에게 설립자 유치진의 묘소를 참배하라고 요구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이에 학생들은 ‘세습 철폐’, ‘교내 유치진 동상 철거’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를 행진하기도 하였다. 죽어서야 비로소 살아생전의 영예로 감추어졌던 삶과 문학이 새롭게 드러나고 있는 셈인데, 이것이 이 나라가 역사를 성찰하는 방식이라는 점은 씁쓸하기만 하다.

 

 

2019년 5월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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