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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최재서, ‘천황에게 봉사하는 문학’ 완성

by 낮달2018 2022.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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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비평가 최재서

▲ 최재서 (1908~196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친일 문인 가운데 상당수는 낯설다. 까닭이야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크게 보면 이들이 대중에게 알려진 문학 작품이 거의 없는 문인이거나 비평 중심의 문학 활동을 한 평론가(비평가)들이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평론가 최재서(崔載瑞·石田耕造, 1908~1964)는, 백철(1908~1985)과 곽종원(1915~2001), 조연현(1920~1981) 등과 마찬가지로 비평 활동에 주력한 까닭에 일반 독자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문인이다. 덕분에 화려한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반 독자들의 관심에서 비켜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전후하여 중고등학교에 다닌 이라면 국어 시간에 이 평론가들이 쓴 글을 적어도 한 편씩은 배웠을 터이다. 나 역시 정확하게 어떤 글이라고 기억하지 못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들 이 쓴 한국 문학사를 통해서 우리 근현대 문학의 얼개를 들여다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월간 『인문평론』 창간하여 친일적 글쓰기 시작

 

최재서는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아호는 석경우(石耕牛), 필명은 학수리(鶴首里)·상수시(尙壽施)·석경(石耕)·석경생(石耕生) 등을 썼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국에 유학하여 런던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조선인 최초로 경성제대 강사로 임용되고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였다.

 

최재서가 1930년대 데이비드 흄, T. S. 엘리엇 등 영국 평론가들의 이론을 주지주의 문학론으로 소개하며 모더니즘 계열의 평론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1년 첫 논문 「미숙한 문학」을 『신흥(新興)』 제5호에 발표하면서부터다.

 

그는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조선일보》 1936년 11월 2~7일 자)에서 박태원의 「천변 풍경」(1936)은 리얼리즘의 확대를, 이상의 「날개」(1936)는 리얼리즘의 심화를 보여 준다고 평가하였다. 이는 우리 문학을 리얼리즘의 측면에서 분석한 글로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현실성과 현대성의 조화, 즉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조화를 추구한 비평가’(허윤회)로 평가받기도 한다.

 

▲ 최재서의 친일 문필 활동이 시작된 월간지 『 인문평론 』 창간호

최재서는 1937년 12월 합자회사 인문사를 설립해서 대표로 취임하고, 1938년 6월 첫 평론집 『문학과 지성』(인문사)을 발간하였다. 『문학과 지성』은 그가 도입한 외국의 주지주의 문학론을 바탕으로 카프 문학이 표방하는 이념주의를 극복하고 비평의 현대화를 지향하고자 한 저서였다.

 

그는 인문사에서 『인문평론』을 창간하고, 1939년 10월부터 1941년 4월까지 편집인 겸 발행인을 지냈다. 창간호 권두언에서 그는 문학자들도 건설 사업에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일본의 침략전쟁을 긍정하고 합리화하였다. ‘국민문학의 선도적 역할’을 하다가 월간 『국민문학』(1941년 11월 창간)에 그 사명을 넘겨준 『인문평론』은 전기 문학을 암흑기의 친일문학으로 연결하는 가교 구실을 하였다.

 

창간호에 밝힌 것처럼 최재서는 『인문평론』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친일적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중일전쟁(1937)을 옹호하기 위해 쓴 「전쟁문학」(『인문평론』 1940년 6월호)은 그 전환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는 이 글에서 전쟁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인간성을 ‘최고 경지에까지 고양’시키는 ‘엄숙한 (전쟁) 체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최후로 전선의 병사들이 총후의 우리를, 그중에서도 더욱이 다음 세대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기대를 걸고 있는가. 그들의 전장의 신념이란 결국 조국의 다음 세대가 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행복스러워지라 하는 신뢰심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하지 않아서는 아니 되리라고 생각한다.

    - 「전쟁문학」, 『인문평론』(1940년 6월호)

 

그는 또 ‘일지사변(중일전쟁) 3주년 기념’ 기획 특집에 발표한 수필을 통해서 침략전쟁을 긍정하고 전쟁 동원 선전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바야흐로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 비평가 최재서는 황민화 정책 의 선봉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일장기의 범람이었다. 특별열차가 물론 정차도 할 리 없는 촌락 소역에도 일장기는 나부끼고 숲속의 농가에도 일장기가 벽에 붙어 있었다. 더욱이 논도랑에서 어린애를 안은 젊은 여인이 질주하는 열차를 향하여 기를 내휘두르며 만세를 부르는 정경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이리하여 나는 전쟁 속의 한 사람이 되었다.

     - 「사변(事變) 당초(當初)와 나」, 『인문평론』(1940년 6월호)

 

최재서는 1939년부터 국책 협력을 목적으로 발족한 친일 단체에 참여하여, 주요 임원으로서 일제의 전시 총동원 체제 구축에 부역하였다. 1939년 2월 임화·이태준 등과 함께 황군 위문 작가단을 발의하였고, 3월 14일 문단 사절의 위문사 후보 선거일에 실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4월에는 황군위문작가단 장행회(壯行會)*에서 경과보고를 하였고, 10월 조선문인협회가 만들어질 때는 발기인과 기초 위원을 맡았다. 1940년 9월 만주국 민생부가 주최한 만주 문화 건설 공작 강연회에서 순회 강연을 하였고, 11월 30일부터 12월 10일까지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총후 사상운동을 위한 문예 순회 강연에 연사로 참여하였다.

 

* ‘장행’은 ‘뜻을 품고 먼길을 떠남’의 뜻으로, 장행회는 출발에 앞서 벌이는 일종의 보고회.

 

1941년 8월 최재서는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선임되었고(1942년 9월에는 상임 간사), 9월에는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던 시점에서 전쟁에 협력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국민문학』을 통해 국책문학 지향하고 대동아전쟁 찬양

 

1941년 11월, 일제는 총력전을 명분으로 모든 잡지를 통폐합하여 친일 어용 잡지인 『국민문학』을 간행하였는데, 최재서는 이후 1945년 5월까지 『국민문학』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국민문학』은 조선 문단을 강제 통합, 어용화하여 ‘황도 정신에 입각한 국책문학’을 수행할 기관지였다.

 

최재서는 『국민문학』 창간호에서 국민문학을 “단적으로 말하면 일본 정신에 의해 통일된 동아문화(東亞文化)의 종합을 지반으로 새롭게 비약하려는 일본 국민의 이상을 담은 대표적 문학으로서, 금후의 동 양을 이끌어 나갈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이후 이 국책문학을 위해 눈부신 활동을 벌였다.

 

▲ 최재서가 발행한 친일문학의 산실 『 국민문학 』 창간호

실제로 『국민문학』은 친일 작가들의 어용 문학지에 불과하였다. 민족의 얼과 문화, 그리고 우리 말글을 말살하려던 일제의 책동에 영합하는 반민족적 문학 행위를 대변한 이 잡지를 통해, 최재서는 친일문학계를 대표하는 이론가로 부역하고 있었다.

 

최재서는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6월 평론·수필부 회장을 맡았다. 조선문인보국회는 조선문인협회와 국민시가연맹 등 4개 단체가 통합하여 ‘조선에 최고의 황도문학(皇道文學)을 수립한다’ 라는 구호 아래 1천여 명의 문학자들이 모여 결성한 친일 어용 조직이었다.

 

1943년 5월 일본 작가 가토 다케오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문인보국회 주최 내선 작가 교환회에 참석하고, 8월에는 도쿄에서 열린 제2차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 참가한 소감을 밝힌 「대동아 의식의 자각–제2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서 돌아와서」라는 참관기를 『국민문학』 1943년 10월호에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대동아전쟁을 하나의 큰 건설전”이라고 규정하면서 “동아 10억의 참다운 결속”을 주장하였다.

 

대동아전쟁을 ‘건설전’이라고 규정한 최재서는 일제가 조선에 징병제를 시행하기로 하면서 본격적인 친일 문필 활동에 들어갔다. 1942 년 5월 일본 각의에서 한국인 청년들을 강제 동원하기 위하여 지원병제가 아닌 징병제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자(실제 징병제는 이듬해 개정 병역법 이후에 시행되었다), 최재서는 이를 열렬히 반겼다.

 

그는 「징병제 실시의 문화적 의의」(『국민문학』 1942년 5·6월 합병호) 에서 “조선에서 징병제가 포고된 근본적인 의의는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서 반도 2천4백만을 고굉(股肱, 다리와 팔, 온몸)이라고 믿고 하셨다”는 점이라며, 천황의 시혜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최재서는 징병에 대하여 식민 지배 국가 일본과 일왕을 위해 동포 젊은이들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천황의 시혜’로 이루어지는 징병의 ‘영광과 감격’에 참여하기를 촉구하였다. 그는 징병제 시 행으로 “반도인은 확실하게 그리고 영구히 조국 관념을 파악할” 수 있게 되고, “반도인의 자질이 급격히 향상되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또 “반도인의 지위가 비약적으로 향상되리라는 것이 명백하다”고 확신하면서, 내선일체의 견고한 확립을 위해 “조선인이 진실로 황국신민이 됨으로써 대동아공영권에 있어서의 지도적 민족”이 되어줄 것을 당부하였다.

 

반도인이 일본에 대하여 조국 관념을 가질 유일한 길은 제국 군인이 되어 직접 국토방위의 임무를 맡는 것 이외에는 없다. 만일의 경우에 자기의 피를 흘려, 아니 가장 사랑하는 자식의 목숨까지도 바치는 데 서, 비로소 진정한 조국 관념이 생긴다.

    - 「징병제 실시와 지식계급」, 『전환기의 조선 문학』(1943년)

 

최재서는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매일신보》 1943년 8월 4일 자)에서 “황군의 일원이 되어 세계의 사악을 걷어치워 버리고 도의적 세계 질서를 건설하는 성전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반도 청년으로서 다할 수 없는 영광”이라며 조선에 시행된 징병제를 다음과 같이 환영하고 선동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황군의 일원으로서 중심적인 지도 세력이 된다는 것은 거듭 말하거니와 반도가 일찍 이 갖지 못했던 영광이다. 그중에서도 직접 군인이 되어 역사의 활(活) 무대에 등장하는 청년은 참으로 세기의 선사(選士)라 할 수 있다. 이 감격과 이 영광을 가슴 깊이 새겨 넣고 감히 그 지닌바 사명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를 조선의 부형(父兄)은 커다란 사랑과 동시에 깊은 정성으로써 기원한다.

 

1943년 8월 1일부터 조선에서 징병제가 실시되자 최재서는 수필 「징병서원행(徵兵誓願行)–감격의 8월 1일을 맞이하여(感激の八月一日を迎へて)」(『국민문학』 1943년 8월호) 에서 감읍해 마지않았다.

 

그는 ”하늘처럼 어버이처럼 받들어 모시고 있는 천황폐하 스스로가 ‘부탁한다’고 말씀하신” 징병제이니 “감격이라 할까, 감분(感奮)이라 할까, 아무튼 우리는 신명을 바쳐 이 대어심(大御心, 임금의 마음)에 보답해야 한다고 마음속 깊이 맹세하는 것”이 ‘우리의 서원’이어야 한다고 흥분했던 것이다.

▲ 「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 」 『 매일신보 』 (1943 년 8 월 4 일 자 )

그는 이 글에서 오늘날 어능위(御稜威)*가 세계에 떨치는 것은 “황군 분투의 결과”요, “황군의 사명은 단순히 이민족의 정복이나 의미 없는 파괴가 아니”며, 징병 반도는 “신명(身命)을 바침으로써 이 폐하 의 뜻에 보답해 받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 ‘능위(稜威)’는 ‘존엄한 위세’를 이르는 말. ‘어(御)’는 일본어에서 상대를 높이거나 음식, 사물을 미화하는 역할을 하는 접두어로 쓰인다.

 

친일 문인 가운데 시인이나 작가는 시나 소설 또는 수필 따위를 통해서 친일 부역하였지만, 평론가들은 친일의 당위성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 부역에 동참하였다. 비평가 최재서는 「문화이론의 재편성」(《매일신보》 1941년 1월 14일자)을 통해 국가 본위의 문화이론 건설을 주창하였다.

 

그는 또 “일본적인 사고방식을 실천하고. 일본의 이상을 추구함으로써 일본 정신을 현양하여 가는 것”을 새로운 비평이라고 규정하였다 (「새로운 비평을 위하여」, 『국민문학』 1942년 7월호). 그는 “국민 전체에 통일을 주고 국민적 단결을 더욱 공고케 만드는 문화”를 ‘국민문화’라고 천명하면서 일본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국민문화 건설이 시급한 과제임을 강조하였다(「전형기(轉形期)의 문화이론」, 『인문평론』 1941년 2월호).

 

‘국민문학론’ 선도하여 총독상 수상

 

최재서는 일찍이 「문학정신의 전환」(『인문평론』 1941년 3월호)에서 일본정신에 바탕을 둔 국민문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친일문학론인 ‘국민 문학론’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한 바 있었다. 그의 친일문학론은 『국민문학』의 주간을 맡으면서 노골화되었다. 그는 친일문학의 산실이었던 『국민문학』 창간호에 실은 「국민문학의 요건」에서 국민문학론이 일본 정신을 담은 이론적 틀임을 강조한 바 있었다.

 

『국민문학』은 1942년 5·6월 합병호부터 ‘반도 황국신민화 최후의 결정’을 위하여 한글을 완전히 폐지하였다. 「편집 후기」에서 그는 『국민문학』이 일본어 잡지로 전환된 것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곧 한글 사용이 문화적 창조력에 장애가 된다는 인식을 드러내면서 문인으로서 민족어, 모국어를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또한 조선어에 대하여 “조선의 문화인들에게는 문화의 유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민의 종자”였다며 “이 고민의 껍질을 깨뜨리지 못하는 한, 우리들의 문화적 창조력은 정신의 수인(囚人)이 될 뿐”이라고 말하였다.

 

일제가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획책한 조선어 사용 금지가 조선 문학의 주체인 자신에 의해 수행된 셈이었는데, 이는 문인 최재서의 심각한 자기 부정이면서 동시에 친일 부역 행위의 정점이기도 하였다.

 

같은 해 『국민문학』 1942년 8월호에 게재한 「조선 문학의 현 단계」에서 최재서는 조선 작가가 더는 한글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향후 글쓰기는 국민문학이므로 당연히 “국어(일본어)로 쓰이는 것이 원칙”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집필자는 내선인 공동”이 될 것이며, “독자는 반도 2천만이 아니라 1억의 전 국민이며 10억의 대동아 제 민족으로 되는 것이 그 이상”이라고 강변하였다.

▲ 국어총독문예상을 안겨 준 평론집 『 전환기의 조선 문학』

그는 모국어를 버린다 해도 “조선 문학은 멸망하기는커녕, 새로운 조건의 출현으로 오히려 크게 그 규모가 확대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조선 문학이 멸망한다는 ‘절망론’은 “보수적인 조선 문학관”에 서 나온 그릇된 생각이니, “창조적 능력을 살려서 신일본 문화 건설에 기여”하려 노력하자고 당부하였다.

 

『국민문학』 1942년 10월호에 발표한 「문학자와 세계관의 문제(文學者と世界觀の問題)」에서 최재서는 “일본적 세계관을 수립함이 절대적인 임무”라고 하면서 “천황을 세계의 천황으로서 봉대(奉戴)하고 일본 국민의 도의성에 의해서 이 지상에 영구적인 질서를 건설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43년 4월에 최재서는 『전환기의 조선 문학(轉換期の朝鮮文學)』을 발간하였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먼저 가 버린 아들 강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면서 “네가 죽었을 때 나는 막 태어난 『국민문학』을 너의 추억과 함께 키워 가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한다. 그 자신이 “일본 국가의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르기까지의 혼의 기록”이라고 하였으니, 이 책은 황국신민 최재서의 ‘국가 정체성 발견 기록’이라 할 만하다.

 

1944년 1월 최재서는 돌연 창씨개명을 단행하여, 이시다 고조(石田耕造)가 된다. 최재서라는 이름으로 황민화에 앞장서던 그가 “나는 작년 말경 생각 끝에 나아갈 길을 깊이 결의해 1944년 1월 1일에 그 첫 순서로 창씨를 했다. 그 다음 날 그것을 조선 신궁에 가서 고했다”고 밝혔으나, 그 자세한 까닭은 알 수 없다.

 

1944년 2월, 이시다 고조는 평론집 『전환기의 조선 문학』으로 제2회 ‘국어총독문예상’을 수상하였다. 총독부에서 ‘반도 문예의 건전한 발전과 반도 문단의 국어화 촉진 목적’의 상장과 부상 1천 원으로 신설한 국어총독문예상은 최재서에게 친일 부역의 상급(賞給)이었을 것이다.

 

최재서의 친일문학론은 『국민문학』 1944년 4월호에 발표한 “받들어 모시는 문학은 천황에게 봉사하는 문학”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받들어 모시는 문학(まつろふ文學)」에서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고 있었다. 천하무적이라는 황군은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고, 허울 좋은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이상이 그 근저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었다.

 

1944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께까지 최재서는 국민동원총진회(國民動員總進會)의 발기인과 상무이사를 지내면서 연사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44년 9월 민간에 근로정신을 계몽하여 태평양전쟁에 협력한다는 목적으로 부유층 유지들이 결성한 이 단체는, 태평양전쟁을 찬양하고 징용과 징병, 군사기지 건설을 위한 노무 동원에 앞장섰다.

▲ 「받들어 모시는 문학」, 『국민문학』(1944년 4월호)

최재서는 1944년 10월, 노무 동원 협력과 민중의 전의 앙양을 위해 평양에 파견되었으며, 같은 달에 ‘성전 찬양 및 학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개최된 국민 동원 대강연회에 참가하였다.

 

12월에는 응징사 가족 위안 대회에 참가하고, 만주예문협회(滿洲藝文協會) 주최 전국 결전 예문회의에 조선문인보국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각종 시국 행사에 ‘결전(決戰)’이라는 표현이 빈번히 쓰인 것은 이 시기 전쟁 상황을 반영된 것이었다. 1945년 1월, 최재서는 친일 단체 대화동맹(大和同盟)*의 처우 감사 총궐기 전선대회에서 ‘철(徹)하라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연제로 연설하였다.

 

1945년 이시다 고조는 『국민문학』 1~2월호에 단편 소설 「민족의 결혼(民族の結婚)」을 발표하였다. 김유신의 누이가 김춘추와 연을 맺게 되는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이 소설에서 최재서는 “무열왕이 가락 민족의 딸**을 받아들인 것은 이토록 자극적이었고 혁명적이기조차 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최재서는 무열왕의 결혼이 삼국 통일의 숨은 원동력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1940년대 전반기의 시대적 명제였던 대동아공영권 수립과 내선일체, 조선의 황국화 문제 등을 염두에 두면 최재서의 집필 의도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1945년 2월, 서울에서 필승 체제 확립과 내선일체 촉진을 목표로 조직된 친일 사회단체.

** 김유신이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임을 가리킨다.

 

해방 뒤 반민법으로 구속되었으나 기소유예

 

급박하게 전개되던 태평양전쟁 말기에 각종 시국 행사와 함께 시국에 대응하는 단체의 결성도 이어졌다. 최재서는 6월 8일, 연합군의 본토 상륙작전을 예상하여 한일 언론·출판 관계자로 조직된 친일 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 발회식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선언문을 낭독하고 상무이사로 선임되었다.

 

7월 7일 조선언론보국회가 주최한 본토 결전 부민(府民)대회에서 선언결의문을 낭독하였고, 같은 날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대체하여 결성된 전국 조직인 조선 국민의용대 총사령부에 참가하였다. 같은 달 18일 대일본흥아회 조선지부 연구조사위원을 맡았으며, 19일 조선언론보국회 주최 ‘본토 결전과 국민의용대 대강연회’ 연사로 평안남도에 파견되었다. 8월 3일에는 조선문인보국회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12일 후, 친일 부역자들에게는 믿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겠지만 해방이 되었다. 그는 평론 일선에서 물러나 연세대학교와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셰익스피어 작품 번역 등 영문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948년 12월 27일과 28일 양일간 시공관에서 열린 민족정신 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에 최재서는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9년 8월, 그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속되었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기소유예되었다.

 

1961년 동국대학교에서 『셰익스피어 예술론』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문학원론』(춘조사, 1957), 『최재서 평론집』(청운출판사, 1957), 『영시개론』(한일문화사, 1963)과 『셰익스피어 예술론』(을유문화사, 1963) 등의 저서를 남겼다. 1964년 11월 16일, 5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최재서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문학인 42인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당대의 지성이었지만, 그는 일제와 일제 침 략 전쟁의 본질도, ‘대동아공영권’ 구호에 숨겨진 허구도 꿰뚫어 보지 못하였다.

 

일제의 ‘욱일승천’을 오판하고 일본의 신체제에 투항해 버린 그가 역사에 민족을 등진 부역자로 남은 이유다. 그나마 팔봉 김기진과 달리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 하나 제정되지 못한 것은, 그의 불운이지만 뒷사람의 행운일지도 모른다.

 

 

2019.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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