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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백철, 친일 부역하고도 한국 문학비평의 대들보

by 낮달2018 2022.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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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철 (1908~1985)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는 이번 사변에 의하여 북경, 상해, 남경, 서주, 한구 등이 연차 함락되는 보도와 접하고 또는 실사 등을 통하여 지나의 모든 봉건적 성문이 함락되는 광경을 눈앞에 볼 때에 우리들의 시야가 훤하게 뚫려지는 이상한 흥분이 내 일신을 전율케 하는 순간이 있다……. 기왕 허물어질 성문이면 하루라도 속히 허물어져 버리는 것이 역사적으론 진보하는 의미다.

    - 「시대적 우연의 수리-사실에 대한 정신의 태도」, 《조선일보》(1938년 12월 2~7일 자)

 

이 글은 문학평론가 백철(白鐵·白矢世哲, 1908~1985)이 1938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한 그의 친일 성향이 드러나는 첫 평론이다. 글에서 말하는 ‘사변’은 중일전쟁, 노구교(盧溝橋) 사건으로, 두 나라 간에 전면전이 시작된 이래 당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베이징, 톈진, 상하이를 함락한 뒤 난징을 공략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중국의 주요 도시를 함락하면서 중국을 무너뜨리고 있는 광경에 그는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이 받은 충격을 ‘흥분’과 ‘전율’이라 표현하고, 일본의 승리를 ‘역사적 진보’라고 강변하였다.

▲ 중일전쟁 때 일본군의 난징 입성(1937.12.13.). 백철은 이 무렵에 친일로 들어섰다. 난징학살 기념관 전시 사진

카프 맹원이었던 백철, 출감 후 전향

 

결국 중일전쟁의 전개가 백철을 친일 부역의 길로 들어서게 한 셈인데, 이는 일제 말기에 조선 지식인들이 대일 협력으로 전환하는 한 유형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대일 협력에 대거 나서게 되는 것은 만주사변(1931) 직후, 중일전쟁(1937) 직후, 태평양전쟁(1941) 개전 이후 등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나름대로 국제 정세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던 조선 지식인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는 세 사건 직후에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이들은 일제가 선전한 ‘대동아공영권’ 또는 ‘아시아·태평양 체제’의 구축이 불가항력이라고 ‘오판’하고 만 것이었다.

 

백철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이다. 본명은 백세철(白世哲), 백철은 필명이었다. 1926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27년 3월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그는 전원파적인 시 동인지 『지상낙원(地上樂園)』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백철은 1930년 나프(NAPF: 전일본무산자예술동맹)에 맹원(盟員)으로 가입하여 나프의 시 전문지인 『전위시인』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에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개벽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혜성(彗星)』의 기자와 카프 맹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백철이 본격적으로 평론을 시작한 것은 《조선일보》에 「농민문학 문제」를 연재(1931년 10월 1~20일자)하면서부터다. 1932년에는 문인 친목 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의 발기인, 전형위원, 집행위원 등으로 참가하였다.

 

백철은 1933년 《조선일보》(12월 22~27일 자)에 「문예 시평–인간 묘사 시대」를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인민성, 당파성, 전형의 창조, 현실반영론 등 프로문학의 기계주의적인 창작론에 회의를 느끼면서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임화 등 카프의 주요 맹원으로부터 정면 공격을 당하면서 그는 카프와 얼마간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34년 8월 카프 제2차 검거 사건(전주 사건·신건설사 사건) 때에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된 것은 1935년 12월로, 약 1년 반 동안 복역한 뒤였다. 이후 카프는 김남천(金南天, 1911~1953)이 경기 도경(道警)에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종식되었다.

 

백철이 1935년 12월 22일부터 27일까지 《동아일보》에 발표한 「비애의 성사(城舍)」는 일종의 전향서였다. 그는 이 글에서 “문학인이 과거의 같은 의미에서 정치주의를 버리고 맑스주의자의 태도를 포기하는 것은 비난할 것이 아니라 문학을 위하여 도리어 크게 찬하(贊賀)해야 할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1937년 백철을 대일 협력, 즉 부역의 길로 들어서게 한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베이징과 톈진, 상하이를 함락하고 난징을 공략하던 12월 초에 그는 평론 「시대적 우연의 수리–사실에 대한 정신의 태도」(《조선일보》 1938년 12월 2~7일 자)를 통해 일본의 침략전쟁을 긍정하고 일본의 승전을 역사의 진보로 포장하였다.

 

그러나 그가 쓴 평론의 잉크가 채 마르기 전인 1937년 12월 13일, 마침내 난징을 함락한 일본군은 이듬해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30여 만에 이르는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그는 본격적 침략에 나선 일본의 서슬에 놀라 마침내 일제에 투항한 것이었다. 일문(日文)으로 발표한 평론 「시국과 문화 문제의 행방」(『동양지광』 1939년 4월 호)에서도 같은 주장을 폈다.

 

1940년 1월, 『인문평론』에 발표한 중편소설 「전망」도 “새로운 진리에 접근하려면 우선 지금까지의 태도를 대담하게 버리고 새로운 입장에 앉아 보아야 한다”라는 주제 의식 아래 일본의 침략전쟁을 ‘비약을 위한 희생’으로 긍정 한 것이었다.

 

낡은 것이 지나가고 새로운 건설이 오는 그 광경을 어디 감격 없이 바라볼 수가 있느냐! 전쟁! 물론 그 자체는 결코 명랑한 광경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 비약하는 데는 언제나 커다란 희생이 따른다고 하지 않는가? 이 희생 위에 동양 역사가 크게 비약하는 풍경을 나는 바라보고자 한다.

    - 「전망」, 『인문평론』(1940년 1월호)

▲ 일문 평론 「시국과 문화 문제의 행방』, 『동양지광』(1939년 4월호)

소설 형식을 빌려 친일의 논리를 개진한 그는 이어서 1940년에 두 편의 글로 일제의 정책에 동조하고 그에 따른 문화 논리의 계발을 촉구하였다. 『인문평론』 7월호에 발표한 논문 「금후엔 문화적 사명이 중대」와 『인문평론』 11월호에 발표한 「신체제와 저널리즘」이 그것이다.

 

「금후엔 문화적 사명이 중대」에서 그는 “지나(支那) 국민이 우리 제국의 진의를 이해해서 제국의 협력에 응하는 문제 같은 것이 건설기의 중심 문제인데, 이 중심 문제의 실천을 위한 수단이란 역시 정치가 아니고 문화의 힘”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체제와 저널리즘」에서는 “신체제에 순응하여 저널리즘의 기관이 분담할 임무는 선전적인 임무다. 그리고 그 선전은 과거의 것과 같이 다만 센세이션한 것이면 그것을 특별 기사로서 대서(大書) 특서(特書)하는 자유로운 선전이 아니고, 그것은 어디까지든지 국가라는 전 체적 입장에서 생각하여 국가에 봉사하는 가치 관념에 기사의 경중을 결정하여 선전하게 될 것”이라 하여, 저널리즘의 의무가 국가에 봉사하는 데 있다는 전체주의적 시각을 보였다.

 

1939년 3월 백철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기자로 입사하였다. 같은 달, 조선총독부가 주도하는 ‘북지 황군 위문 문단 사절’ 후보로 뽑혔으나 최종 선정되지는 못하였다. 그해 10월 그는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조선문인협회(회장 이광수)는 결성식에서 발표한 성명서에서 밝힌 대로 “흥아(興亞)의 대업을 완성시킬 황군적(皇軍的) 신문화 창조를 위하여 용왕매진(勇往邁進)코저 맹세”한 총독부 어용 문인단체였다. 이 단체는 1943년 국민시가연맹 등의 단체와 더불어 조선문인보국회로 강화, 재편되었다.

 

일본 해군 찬양하고 부여 신궁 조영에 참여

 

1940년 10월에는 《매일신보》 학예부장을 맡았다. 같은 달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에서 추천하는 조선 특파 문인으로, 일본 요코하마 근해에서 천황의 참관 아래 열린 ‘미카마루(三笠丸)’ 대전함의 진수식에 참가하였다. 이어 『삼천리』 12월호에 「천황폐하 어친열(御親閱) 특별 관함식(觀艦式)* 배관근기(拜觀謹記)」를 기고하여 신의 이미지를 덧입히는 방식으로 천황을 찬양하였다.

 

마치 백주(白晝)에 직사하는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려는 어리석은 어린애와 같이 바라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 그 열광(熱光) 앞에서 시력을 잃고 나중에는 눈앞이 캄캄해져서 아무것도 안 뵈는 것과 같이, 나와 같은 미천지신(微賤之身)이 일단(一旦)에 신상(身上)에 남아 넘치는 광영을 힘입어 황공하옵게도 폐하를 이처럼 머지않은 거리에 모시게 될 때에 내 감격은 너무 높고 컸으며, 그 높으신 어능위(御稜威) 앞에 오직 형용할 수 없는 성엄(聖嚴)의 순간을 가질 뿐이요, 그 감격을 분석하는 소이성(小理性)은 이 순간에는 광채를 잃고 무색해지는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 「천황폐하 어친열 특별 관함식 배관근기」, 『삼천리』(1940년 12월호)

 

* 국가의 원수 등이 해군 함대를 검열하는 의식.

 

백철은 또 이 기행문에서 온갖 형용으로 일본 해군의 위용을 칭찬하였다. 그는 해군의 용맹한 모습에서 ‘신동아 질서’의 건설을 보았고, ‘강력한 국가 질서 아래’ ‘안주’하게 된 ‘국민의 행복’을 찬양하였다.

 

우리 제국은 실로 성전 4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에 전선의 용맹무쌍한 공육해(空陸海)의 병사들의 혁혁한 공훈에 의하여 현재 신동아의 질서가 건설 실현되는 도상에 있는 동시에, 우리 총후의 일반 국민은 정연하고 강력적인 국가 질서하에 금일의 안주를 얻은 것을 몇 번이나 행복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물며 이 전시하에 있어 오히려 이와 같은 군비의 여력을 기울여 해군 일본의 위용을 준비하는 것을 어디 타국에 그 예를 허할 사실이랴.

    - 「천황폐하 어친열 특별 관함식 배관근기」, 『삼천리』(1940년 12월호)

 

해군의 위용에 대한 찬양과 탄복은 이듬해 5월에 《매일신보》(1941년 5월 27일 자)에 발표한 산문 「제국 해군의 위용–기념일과 문화인의 각오」에서도 되풀이되었다. 그는 “아(我) 제국이 사변 처리 중에 지나 연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확보한 나머지 오히려 이만한 거세(巨勢)를 국내 해상에 거느리고 있다는 데 다시금 제작의 국민 된 긍지와 행복을 일신에 느끼는 것”이라며 감탄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 국민의 비범한 결의’와 ‘문화인의 새로운 각오’를 촉구하였다.

 

1940년 11월 백철은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맡았다. 그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순회 시국강연회 연사로 11월 30일부터 ‘총력운동과 선전의 임무’라는 연제로 약 열흘간 평안도 방면에서 강연하였다. ‘총력운동’은 중일전쟁 이후 전쟁 시국에 대한 협력과 조선 민중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목적으로 시행한 관제 운동이었다.

 

1941년 1월, 백철은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을 맡았다. 그는 《매일신보》 학예부장 자격으로 총력연맹 문화부의 시중을 든다고 말함으로써 《매일신보》 학예부의 위상과 자신의 역할을 규정하였다. 그는 독립된 언론인이라기보다 친일 어용 조직인 총력연맹의 실무자임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2월 8일 경성부 내 6개 문화단체 연합으로 조직한 ‘부여신궁(扶餘神宮) 어조영(御造營) 근로봉사 문화인부대’에 참가하여 부여에서 근로봉사를 하였다. 백철은 이 봉사 참관기인 「내선유연(內鮮由緣)이 깊은 부소산성」을 『문장』 1941년 3월호에 발표하였다.

 

일제는, 조선 병합 30년이 되는 해이며 관변 역사학자들이 일본이 건국되어 만세일계(萬世一系) 국체를 이어나간 지 2600년이 된다고 선전하던 해인 1940년에 맞추어서 부여에 대규모 신궁을 짓고, 여기에 여러 ‘천황’들의 위패를 모시고자 기획하였다. 내선일체 이념을 선전하기 위하여 고대 일본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며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에 신사(神社)를 짓고자 한 것이다.

 

부여신궁은 사격(社格)이 높은 관폐대사(官弊大社)*로 1943년에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공사가 늦어지다가 일제의 항복으로 완공되지 못하였다. 총독부는 1940년부터 봉사대라는 이름으로 조선영화인협회 소속의 영화인들이나 조선문인협회 소속의 문인들, 개신교 목사들 등 지식인을 대거 동원하여 신사 조영 작업에 참여하게 하였다.

 

* 신사 가운데 사격(社格)이 가장 높은 곳으로 국가 의례가 거행되는 곳.

 

백철이 참여한 근로봉사 문화인부대의 이름은 이른바 ‘성초(聖鍬) 부대’, 곧 ‘거룩한 농기구 부대’라는 뜻이다. 봉사대의 지식인들을 가래나 삽 같은 농기구에 비유한 것이다. 그는 참관기에서 “그 당시 전후(前後) 300년을 통하여 역대의 일본 황조(皇朝)에서 대륙과 신라의 병세(兵勢)를 거(拒)하여 백제를 돕고 협력하는 데 있어 대군과 군량을 보내어 왔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이는 고대 백제와 일본의 교류를 내선일체의 근거로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 ⓒ 위키백과

‘국민문학’의 선봉으로 전시 총동원 체제 선전

 

1941년 말부터 일제는 조선의 문화인들에게 정책적으로 ‘국민문학’을 강요하기 시작하여 11월에 『국민문학』을 창간하였다. 백철은 1941년 조선문인협회 상무 간사를 맡아 ‘국민문학’ 건설에 대한 방향과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였다.

 

『국민문학』 창간호에 실린 「조선 문단의 재출발을 말하는 좌담회」에는 일제가 구축하려는 ‘국민문학’의 상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일제가 요구하는 ‘직역봉공(職域奉公)’을 문화계에서 원만히 수행하게 하는 방편 같은 것이었다.

 

백철은 이 좌담회에서 “새로운 국민문학의 목표는 개인주의적인 입장을 부정하여 전체적인 입장에서 국책에 맞는 문학을 수립”하는 것이요, 그 과제는 결과적으로 “국책을 민중에게 선전하여 그것을 계몽”하는 것이며, “대동아공영권의 세계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국민문학의 출발에서 기초적 입장”이라 밝혔다.

 

또 그는 1942년 1월 『국민문학』에 기고한 평론 「낡음과 새로움(舊さと新しさ)」에서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논의 진행 과정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관철하기 위한 처세로 해석되는 이 글에서 그는 “새로운 정신의 구체적인 화제”로서 “새로운 세계관의 파악, 새로운 감정의 준비, 새로운 문학관의 수립”을 꼽았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새로운 일본 정신, 일본주의, 적어도 일본적인 것을 체내에 받아들여 충분히 씹고 소화하여 문학 속의 살아 있는 생명의 흐름으로까지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것은 일제 총독부가 원하고 기대한 바의 모범답안이었다. 새로운 세계관의 방향으로 일본 정신과 일본주의를 말하였다면 더는 바랄 게 없는 완벽한 전시 동원 체제를 기대함 직했다. ‘국책’과 ‘민중’과 ‘계몽’을 거쳐 완성되는 ‘대동아공영권 세계관’이라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백철의 친일 부역은 쉼 없이 이어졌다. 그는 1942년 『동양지광』 6·7월호에 평론 「문학의 이상성(文學の理想性)」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서구를 구세력으로, 일본을 신흥 세력으로 구분한 뒤 일본 민족을 “2602년이란 장구한 시간 동안 대화혼(大和魂)이라는 독특한 정신을 혈관 속에 이어온 우수한 정신력을 가진 민족”으로 평가하였다.

▲ 일제 강점기 말의 친일 월간지 <동양지광>. 약칭은 <동광>이었다.

그리고 “금일의 승리를 이끄는 것”은 “일본 정신에 근거한 일본 민족의 전통적인 정신이요, 일본 국민의 국민성”이며, 문학은 이러한 승리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백철은 “지금 건설기 신흥 민족의 문학으로서 야심에 충만한, 개척적인, 건설적인, 구성적인 문학으로 그 문학이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이상성에서 발견함은 지극히 정당하며 필연적”이라는 논리로 ‘문학의 이상성’을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문학이란, 문학의 이상이란 일본 정신에 근거한 일본 민족이 수행하는 전쟁의 승리에 이바지하는 것이며, 문학을 그리 규정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고 필연적인 것이었다. 친일 부역에 눈먼 비평가의 논리는 늘상 그런 궤변으로 귀결되기 마련이었다.

 

1942년 11월 『국민문학』에 발표한 평론 「결의의 시대(決意の時代)– 평론의 1년(評論の一年)」에서 그는 평론가들의 태만을 꾸짖었다.

 

문학이 제창된 지 1년이 지났으나 평론가들이 지도적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 뒤, “새로운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각”을 일깨우면서 “새로운 현실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용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요구를 앞세운 것이다.

 

1943년 4월, 백철은 《매일신보》 베이징 지사장으로 부임하였다. 6 월 조선문인보국회 평론·수필부회 평의원,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를 맡았으나 주로 베이징에 머물렀기에 본격적으로 활동하지는 못하였다. 이 무렵이 그나마 그가 친일 부역에서 얼마간 비켜나 있었던 시간인 셈이다.

 

《매일신보》 베이징 지사장 백철은 1945년 6월 중순, 일본군 보도실에 들렀다가 베를린이 소련군에게 함락되는 기록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그가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온 것은 8월 2일이었다. 14일 오후 본사에 들러 “내일 정오 중대 발표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튿날 ‘덴노헤이카’는 ‘옥음(玉音)’으로 종전을 선언하였다.

 

해방 뒤, 참회 없이 대학교수로 문화계 주류로 복귀

 

해방 직후 백철은 임화의 권고로 문화건설중앙협의회 기관지인 『문화전선』의 책임 편집을 제2호까지 맡았다. 1945년 10월에는 서울여자사범대학 교수로 부임하였다. 1948년 『조선신문학 사조사』(수선사)를 발간하였으며, 이해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후 그는 『문학개론』(동방문화사, 1949), 『국문학 전사』(이병기 공저, 신구문화사, 1957), 『한국문학의 이론』(정음사, 1964) 등 국문학 관련 저서를 꾸준히 펴내면서 동국대학교를 거쳐 중앙대학교에서 정년까지 재직하였다.

 

그가 자신의 친일 부역 행위에 대한 단죄나 양심의 가책을 두려워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해방 조국은 그에게 친일 부역의 죄를 따로 묻지 않았다. 그는 해방 조국에서도 유명 평론가로서 주류 사회에 편입되었다.

▲ 중앙대 서울캠퍼스 법학관 건너편에는 백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백철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 : 중대신문사

1960년 7~8월 브라질에서 개최된 제31차 국제펜클럽대회에 동향 후배인 소설가 정비석과 함께 참가하였고, 1961년 문화사절단으로 동남아 각국을 순방하였다. 1963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66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68년에는 『백철 문학 전집』(전 4권, 신구문화사)을 펴냈다. 1969년 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1971년 1월 제37차 국제펜클럽 서울대회 대회장과 문화예술진흥 위원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다. 1972년 문화예술진흥 위원회 작가기금 운영위원장을 지냈고,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975년 『문학 자서전–진리와 현실』(박영사)을 펴내고, 1976년 3·1문화상 예술상을 받았다.

 

물론 그도 여느 친일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역 행위에 대해서 어떤 참회도 하지 않았다. 임종국은 그의 역저 『친일문학론』에서, 1965년 발행된 『한국의 인간상』 제5권 433면에 실린 ‘백철이 말하는 이광수’를 다음과 인용한다.

 

그는 일제의 주구(走狗)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회장이 됐고,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郎)’로 개명하였으며,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김기진과 더불어 남경으로 ‘대동아문학자협회’에 참석하는가 하면, 학병을 권유하기 위하여 각지를 순회하며 친일 연설을 하는 등, 실로 무섭고 실로 가증한 짓을 감행하였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인데, 어처구니가 없어선지 임종국은 이 글의 몇몇 단어를 바꾸어 백철에게 돌려준다. ‘회장’을 ‘간사’로, ‘가야마 미쓰로’를 ‘시라야 세이테쓰(白矢世哲)’로, ‘대동아 문학자협회’를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또 ‘친일 연설’을 ‘친일 좌담회’로 바꾸면, 이광수에게 겨눈 화살이 고스란히 그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 한편의 소극은, 우리 문학사에 명멸한 숱한 친일 부역 문인들이 저지른 반민족 행위에 대한 단죄가 사라진 한국 근현대사가 얼마나 왜곡되었는가를 방증한다. 그나마 조선문인협회가 ‘주구 단체’이고, 문인들의 부역 행위가 ‘실로 무섭고 실로 가증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긴 했으니 다행인가.

 

백철은 77세를 일기로 1985년 10월 13일 사망하여 충남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선영에 묻혔다.

 

2019. 0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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