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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정비석, 낙원 일본을 칭송하던 『자유부인』의 작가

by 낮달2018 2022.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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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부인>의 작가 정비석의 친일 부역

▲정비석(1911~1991)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비석(鄭飛石, 1911~1991)은 40대 이하의 독자들에겐 좀 낯선 작가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에 단편 소설 「졸곡제(卒哭祭)」와 「성황당(城隍堂)」으로 정식 등단한 소설가다. 그는 이른바 미문(美文)으로 널리 알려진, 1960, 70년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금강산 기행 수필 「산정무한(山情無限)」의 지은이이기도 하다.

 

정비석은 1911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하동, 본명은 서죽(瑞竹)이다. 필명으로 비석생(飛石生)·남촌(南村) 등을 썼으며, 본명 대신 스승 김동인이 지어 주었다는 필명 ‘비석’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6월 신의주중학교 4학년 때 ‘신의주 고등보통학교 생도 사건’으로 검거되어, 1930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 형사 법정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과 제령 위반 불경죄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때만 해도 그는 자못 식민지 소년다운 패기가 넘쳤던 모양이다.

 

이후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의 니혼(日本)대학 예과에 들어갔다. 니혼대학 재학 중에 《프롤레타리아신문》에 편지체 단편 소설 「조선의 어린이로부터」를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1932년 니혼대학 문과를 중퇴한 뒤 귀국하였다.

 

그는 국내에서 1935년 1월 《매일신보》에 콩트 「여자」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같은 해 7월 『조선문단』에 시 「도회인에게」를 발표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졸곡제」가 가작으로 뽑혔고, 이듬해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성황당」이 1등으로 당선되었다.

 

붓을 총으로 바꾸어 지원병제 미화와 군 입대 독려

 

그의 친일 부역은 1940년에 《매일신보》 기자로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같은 해 10월, 정비석은 조선 문사 부대 자격으로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육군 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 행사에 참여하였다. 이 행사를 마치고 발표한 소감문에서 그는 육군 지원병제와 훈련소 입소를 미화하였다.

 

육군 지원병훈련소를 견학하고 나는 성덕(聖德)의 무궁함을 깨달으면서 다음과 같이 감상을 느끼었다.

① 전 조선 청년들이 모두 한 번씩 훈련소 문을 거쳐 나오는 날이면 조선에는 새로운 광명이 비칠 것이다. 지원병제도야말로 성상(聖上)이 반도 민초에게 베푸신 일시동인의 결정임에 틀림없다.

② 스파르타식 교육이 없었던들 저 희랍문화가 그토록 찬란히 개화할 수 있었을까.

③ 고래로 문인은 약질인 것을 무슨 자랑거리처럼 삼아 오던 그릇된 인식을 우리는 하루바삐 시정해야 하겠다.

   - 「반도민초(半島民草)에 일시동인(一視同仁)」, 『삼천리』(1940년 12월호)

 

일시동인(一視同仁)이란 “멀고 가까운 사람을 친함에 관계없이 똑같이 대한다는 뜻으로, 성인이 누구나 평등하게 똑같이 사랑함을 이르는 말”이지만 그의 글에서 ‘성인’은 곧 일왕이다. 그는 조선인에게 지워진 병역의 의무를 일왕이 베푼 은혜로 인식하면서 전사한 조선인 지원병과 그 유가족의 애국심을 찬양하였다.

▲전몰 유가족 방문기 「영예의 유가족을 찾아서」, 《매일신보》 (1943.1.15. )

병역의 의무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전몰 유가족이라는 명예를 차지할 자격이 없다. 한 나라의 국민 된 자로 그 나라의 은혜 밑에서 살아가면서 제 나라를 위하여 정의의 칼을 뽑을 자격을 못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일까. 한번 주먹을 들어 내리갈기면 무쇠라도 부숴 버릴 만한 끓어오르는 정열과 억센 힘을 가진 청년으로서는 그것은 다시없을 수치일 것……. 스물세 살로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것은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 「영예의 유가족을 찾아서-겸허와 청순의 극치」, 《매일신보》(1943년 1월 15일 자)

 

정비석은 1942년부터 이듬해까지 채만식·이무영 등과 함께 만주국 젠다오성 초청으로 조선문인협회가 파견한 재만 조선인 개척촌 시찰단에 참가하였다. 시찰 후에 그는 「간도성 시찰 작가단 보고」를 통해 일제의 ‘지원병제’를 선전하였다.

 

젊은이는 후방은 물론 자진해서 군인이 되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북쪽 변방의 수비는 자신들이 맡겠다는 기백에 불타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든든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 「간도성 시찰 작가단 보고」, 『녹기』(1943년 2월호)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전쟁 동원을 긍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문학과 문화가 오직 전쟁 승리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조선문인보국회 소속으로 제1회 조선군 보도연습에 참가한 뒤에는 조선인의 군 입대를 독려하였다. ‘보도 연습’이란 조선군이 전 조선의 출판·문예 등 문화계 전반에 걸친 문사를 동원하여 이른바 ‘보도 전사’로서의 자질을 닦도록 훈련시키는 과정이었다.

 

정비석은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로 ‘성전의 승리’를 기원하고, 조선인에게도 “군문에 들어갈 수 있는 광영”이 베풀어짐에 감읍하면서 “지상 최고한 명예를 외람되게 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들이 지금 국력을 기울인 성전(聖戰)의 와중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헛되이 휴머니티 따위를 외치고 있을 수 없게 된다. 일단 싸우기 시작했으면 무엇보다도 전쟁에 이겨야 한다. 전쟁의 의미는 승리에 있다. 오늘날 문화 정책이 허용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승리를 위한 무기로서의 문화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은…… 이 지구상의 단 한 곳, 낙원 일본이 아니면 안 된다.

    - 「국경」, 『국민문학』(1943년 4월호)

 

지원병 출신 병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나는 문득 ‘병영은 군대가 살고 있는 처소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인간 수업의 도량’이 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었다. 지금까지 우리 반도인과 군대와는 너무나 인연이 멀었다. 그러나 명년부터는 우리 주위의 청년들에게도 군문에 들어갈 수 있는 광영이 베풀어졌다.

    - 「군대생활」, 『신시대』(1943년 7월호)

 

붓을 총으로 나는 바꾸어 쥔 것이다. ……함부로 옛날 개념에 따라서 필연(筆硯)을 계속하고 있을 세태는 아닌 것이다. 거편(巨篇)의 시 문(詩文)을 완성하는 것보다도 1발의 탄환을 적에게 맞추는 편이 보다 더 의의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 「사격」, 『국민문학』(1943년 7월호)

 

시국에 눈뜬 지식인의 ‘문필보국’

 

그의 친일 행위는 당연히 작품 활동으로 이어진다. 그가 『국민문학』(1942년 2월호)에 발표한 단편 「한월(寒月)」은, 고장 난 버스를 타게 된 승객의 운명을 ‘대동아전쟁’에서 홍콩에 잔류한 일본인의 운명과 비교하면서 ‘대동아공영권 확립’을 위한 자세를 역설한 작품이다.

 

주인공 ‘나’가 딸을 데리고 고향에 다니러 가던 도중에 목탄 자동차가 고장이 난다. 운전사가 새 차를 가지러 평택으로 돌아간 동안 ‘나’는 좁은 주막집에서 승객들에게 이야기한다. 저번 홍콩이 함락될 때 일본인 잔류민들이 좁은 방에 모여서 침착히 영미인의 박해와 싸워나간 사실을 실례로 들면서,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려는 자신들에게는 이러한 경험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단편 「순정(純情)」(『반도의 빛』 1943년 11월호)에서는 ‘총후’ 생산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사랑을 나누는 모범 청춘남녀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이 작품에는 일본 ‘내지’의 출정군인 가정으로 파견돼 그 군인을 대신해 농사일을 돌보는 임무를 맡은 ‘농촌 청년보국대’가 나온다 (끔찍하게도 이런 방식의 노동력 수탈도 있었다). 이들 조선 청년들은 ‘총후의 전사’로 칭송을 받았다.

 

그는 또 농촌 생산 현장의 ‘총후보국’을 독려하면서 지식인의 분발도 촉구하였다. 「지식인」(『동양지광』 1942년 7월호)에서 과거에는 ‘숨 쉬는 편리한 농기구’ 정도에 지나지 않던 농민이 ‘열렬한 국가의식’ 아래 새로 태어났다고 칭송하였다. 그는 ‘놋쇠 제품 헌납 운동’에 참여하고, 쌀 절약을 위해 모내기 때에도 도시락을 싸 오고, 생산 확충을 위해 밤잠도 안 자며 가마니를 짜는 등의 모습을 보여 주는 농민과 견주어 이제 간신히 시국에 눈을 뜬 지식인으로서 부끄럽다고 자책하기도 하였다.

 

단편 소설 「산의 휴식(山の憩ひ)」(『신시대』 1943년 4~5월호)에서 정비석은 침략전쟁 상대국인 미국과 영국의 사상을 비난하는 형식으로 스스로 ‘문필보국’을 실천하였다. 이 소설에서 그는 미영(美英) 사상의 하나인 기독교적 내세관을 버리고 신체제와 동양 정신에 눈떠 가는 기독교인을 그렸다.

 

미션스쿨에서 일하는 기독교인인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미션스쿨이란 것은 신체제가 아니잖아요. 예수교 같은 것은 양놈들의 위선의 껍데기예요”라는 상대의 공격적 발언과 설득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나는 갑자기 잠을 깬 느낌이었다. ……뒤돌아보건대 우리는 그런 것(내세에서 영원의 낙원을 구하는 일)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생활을 희생하였고, 또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얼마나 게을리해 왔던 것일까”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야기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 정비석이 『방송지우(放送之友)』(1944년 2월호)에 발표한 「야마모토(山本) 원수」는 그가 한 친일 부역 행위 중에서 정점을 찍는 작품이다. 그는 1943년 4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사한 일본 해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원수를 따라 침략전쟁에 목숨을 바칠 것을 선동하였다.

 

진두지휘는 우리 제국 해군의 전통적 무사 정신이었거니와 태평양상에서 호국의 꽃으로 떨어지게 된 것도, 야마모토 원수 자신으로서도 본망(本望)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야마모토 원수의 기상전사(機上戰死)를 헛되이 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제야말로 1억 군민은 야마모토 정신을 정신으로 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미국을 쳐 물려야 한다. 오직 그 길만이 야마모토 원수를 참마음으로 앙모(仰慕)하는 길인 것을 일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 「야마모토(山本) 원수」, 『방송지우(放送之友)』(1944년 2월호)

▲ 「군신전(軍神傳)-야마모토 원수」, 『방송지우』(1944년 2월호)

야마모토를 따르자는 그의 사자후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패망하였고 조국은 해방이 되었다. 침략전쟁에 목숨 바치라고 동포 청년들을 선동한 식민지 지식인에게 해방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해방 후 그는 신문 기자, 잡지사 주간 등을 맡으며 『소설작법』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 한국전쟁 중에는 육군종군작가단으로 활동하였다. 그때, 일찍이 조선문인보국회 소속으로 ‘조선군 보도 연습’에 참여한 ‘보도 전사’의 기억은 그에게 부끄러움이었을까, 자랑이었을까.

 

해방 후에는 대중작가로

▲ <산정무한>은 정비석이 1941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매일신보>에 연재한 '내금강 기행문'을 묶은 수필집이다.
▲ 대중소설 <자유부인>과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 <자유부인>

해방 후 그는 대중작가로 전신하여, 『청춘산맥』, 『장미의 계절』, 『세기의 종(鐘)』 등 숱한 통속소설을 펴냈다. 특히 《서울신문》에 연재(1954년 1~8월)된 뒤 정음사에서 펴낸 『자유부인』은 한 대학 교수 부인의 일탈을 통해 자유주의적이면서도 향락적인 서구 문화에 물든 당시 풍속을 파격적으로 묘사하여 사회적으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낭만열차』, 『유혹의 강(江)』, 『여인백경(女人百景)』, 『명기열전(名妓列傳)』, 『소설 손자병법』과 『소설 초한지』 등 정력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면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위원장, 방송윤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정비석은 1991년 10월에 향년 80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2002년 공개된 친일문학인 42인 명단에 올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문학 부문에 수록되었다. 그는 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일찌감치 대중작가로 전신해 버렸기 때문인지 그는 해방 후 문단의 주역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였든 아니든 친일 행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얼마간 비켜 있었던 것은 그가 만년에 누린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2019년 5월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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