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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장덕조, 총후봉공(銃後奉公) 제일선에 섰던 역사소설가

by 낮달2018 2022.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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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드라마 <대원군>과 <여인열전>의 작가 장덕조(1914~2003)

▲장덕조 (1914~2003)

50대 이하 세대라면 소설가 장덕조(張德祚, 1914~2003)는 낯선 이름일 수도 있겠다. 그는 흥미 위주의 스토 리 전개와 활달한 문체로 단편 120여 편, 장편 90여 편을 발표해 한국 문단사에서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다.

 

여성 작가 중 역사소설을 가장 많이 쓴 이로 꼽히는 그는 1960년대에 동양방송(TBC)의 텔레비전 드라마 대본 「대원군」과 「여인열전」을 썼고, 이는 방송 후 책으로도 나왔다.

 

서른 전 젊은 시절의 ‘자발적 친일’ 

 

장덕조는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에서 지주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부친은 외동딸에 대한 기대가 컸던 듯 한학을 가르치고 뒷날 서울로 유학까지 보냈다.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춘금여사(春琴女史)· 일파(一波)·노노자(怒怒子) 등의 필명을 썼다.

 

장덕조는 1927년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인 배척 동맹휴학 사건에 참여하였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동참하자는 격문을 써서 퇴학당하는 바람에 1929년 3월 서울 배화여자고등 보통학교로 편입하였다. 1931년 배화여고보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면서 기자로 개벽사에 입사하였다.

 

등단은 1932년 월간 종합잡지 『제일선』에 단편 「저회((低徊)」를 발표하면서다. 이후 단편 「어미와 딸」(『삼천리』 1934년 8월호), 「자장가」(『삼천리』 1936년 4월호), 「창백한 안개」(『조광』 1937년 4월호), 「한야월(寒夜月)」(『조선일보』 1938년 8월 12일~9월 1일 자), 「근친(近親) 전후」(『여성』 1939년 12월호), 「인간 낙서(落書)」(『조광』 1940년 11월호) 등을 발표하였다.

 

장편 소설 「은하수」(1937년 7월 17일~12월 29일 자)와 「여인도」(1939년 5월 21일~7월 6일 자)는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그는 소설 외에 희곡과 방송극도 발표하였다. 희곡은 「형제」(『조선문학』 1933년 11월호)와 「노처녀」(『조광』 1944년 2월호) 등을 썼다.

 

『여성』(1940년 1월호)에 실린 글 「조선 말 제2방송에 활약하는 여성 군상–경성 편」에 “라디오 소설 작가로 장덕조, 이선희, 최정희, 모윤숙 여사가 있다”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방송작가로도 활동한 듯하다.

 

장덕조는 대다수 남성 작가들과 달리, 조선임전보국단과 조선문인보국회 같은 친일 단체나 문학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1943년에서 1945년까지 집중적으로 친일 성향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14년생이니 1943년에 장덕조는 고작 스물아홉이었다. 1915년생인 서정주가 「마쓰이 오장 송가」(1944)를 발표하였을 때와 같은 나이다. 등단한 지 10년을 갓 넘긴 점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었다. 그것은 이들이 일제에 협력하라는 압력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들의 친일이 자발적인 행위였다는 방증이다. 무엇이 이들을 자발적 친일 부역의 길로 이끌었을까.

 

‘군국의 어머니’ 찬양, ‘맹목적 모성’ 교화

 

말기에 일제는 여성 문인들에게 애국반 활동이나 ‘군국의 어머니 역할’ 등 총후의 여성에게 부과된 역할을 적극적으로 선전해 주기를 바랐다. 장덕조가 발표한 방송소설과 희곡들은 그런 일제의 요구에 맞는 ‘후방문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었다.

 

장덕조는 일본인 니시다(西田) 목사에게서 진주만 전투(1941년 12월 8일)에서 사망한 9명의 특공대 이야기를 듣고서 수필 「출발하는 날」을 썼다. 이들은 미 함선 애리조나호를 침몰시킨 잠항정에 탑승하였다가 숨져 대본영(大本營)*에 의해 ‘9군신(九軍神)’ 이라는 전쟁영웅으로 미화된 병사들이었다.

 

* 태평양전쟁 중 일본 제국 육군·해군의 최고 통수기관

 

「출발하는 날」(《매일신보》 1943년 3월 7~10일 자)에서 장덕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결의와 결심”이 싹텄고,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그러나 부분 부분을 뜯어고쳐도 완전해지지 않을 때는 원형을 파괴해서라도 새로운 건설을 단행”해야 한다고 고백하였다.

 

이 수필은 전체적으로 소설에 가까운 구성을 보여 주는데, 화자인 ‘나’가 출정하는 니시다를 배웅하기 위해 나간 기차역에서 기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하고 나서 “묵묵히 봉공(奉公)하는 자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 ‘봉공’의 대상이 일제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연재수필 「 출발하는 날 」 . 《 매일신보 》 (1943 년 3 월 7~10 일자 )

장덕조는 또 조선인보다 인격적, 문화적으로 훌륭한 ‘내지인’을 소개하면서 이들의 용기와 애국심, 멸사봉공의 정신까지 배워 가는 일이 필요하다면서 ‘내선융화(內鮮融和)’를 선동하였다. 『반도의 빛』 1943년 5월호에서 ‘하루바삐 본받을 내지(內地)의 습속(習俗)’이라는 제목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대한 답변이 바로 그것이다.

 

장덕조는 자신의 동네가 “부인회, 기타를 통해서 내지 부인과 반도 부인들 사이에 심히 친밀한 교섭을” 하는 곳이라며, 내지 부인들의 초청으로 무용제에 가보니 “그 청결과 정서적인 분위기를 배울 만한 습속”이었다고 탄복해 마지않았다.

 

한편으로 일제의 전쟁 동원에 부응하는 전형적인 여성상은 이른바 ‘군국의 어머니’로 불러 미화된다. 일제가 식민지 여성에게 요구한 역할은 애국반 활동 등을 통해 총후봉공(銃後奉公)에 힘쓰는 것이었다. 이런 여성상은 『방송소설 명작선』(조선출판사, 1943)에 실린 장덕조의 소설 「우후청천(雨後晴天)」과 「연화촌(蓮花村)」에 잘 드러난다.

 

「우후청천」에서는 애국반의 유일한 ‘내지인(일본인) 세대’인 ‘미나미(南) 부인’이 군국의 어머니로 찬양된다. 그는 첫째 아들을 나라에 바치고 둘째 아들마저도 소년 항공병으로 보내는 어머니다. 미나미 부인의 용기가 작중 인물인 김씨에게 자신의 ‘맹목적 사랑’을 반성하게 한다. ‘맹목적 사랑’이란 자식을 가까이에서 돌봐 주고 싶어 하는 것으로 작가는 이를 ‘군국의 어머니’가 될 수 없는 결격 사유로 규정하는 것이다.

 

때는 일본의 강제 동원령이 본격화하던 시기, 그러나 아들을 지원병으로 보내고 싶어 하는 조선 부인들이 어디 있겠는가. 부역 언론들은 이러한 태도를 ‘맹목적 모성’으로 비판하고 교화하려 하고 있었다.

 

장덕조의 소설은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인들의 맹목적 모성을 에둘러 비판하면서 ‘내지 부인’을 ‘군국의 어머니’의 전범으로 제시한 것이다.

 

「연화촌」 역시 모범이 될 만한 ‘총후 부인’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남편이 사고로 다친 후 살기가 어려워지자 자살하려다 목숨을 건진 여인이 주인공이다. 그녀는 목숨을 건진 후 “새로 난 사람으로서의 새 생애”를 남을 위해 봉사하는 데 바쳤고, 애국반원 만장일치로 멸사봉공, 동리와 국가를 위하여 공헌한 사람으로 뽑혀 국민총력 경기도연맹으로부터 상을 받게 된다. 이는 어려움을 겪던 여성이 국책을 충실히 따른 결과 새 삶을 살게 된다는 대중선전용 소설이었다.

 

‘선동의 논리’를 교묘한 서사로 포장한 친일 소설들

 

결심하는 데 갈등할 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작가가 ‘선전과 선동’을 목적으로 소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기엔 어떤 소설 미학적 고민도, 삶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선동의 논리를 교묘한 서사로 포장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 애국반 활동을 소개하는 화보

친일 부역에 참여한 문인들의 선전·선동문학에는 이러한 의도가 천편일률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지는 일본이 요구하는 전시 총동원 체제에 적극 협력·수용하는 방식으로 수렴되고, 식민지 조선인이 감내해야 하는 징병과 징용 등 모든 착취와 희생도 ‘대동아 공영’이라는 명분으로 미화되었다.

 

일제는 친일 부역 문인과 지식인을 통해 ‘총후’의 민간인들도 침략 전쟁에 협력, 봉사할 것을 끊임없이 선전·선동하였다. 이른바 ‘총후봉공’이라는 구호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장덕조는 노천명, 최정희, 모윤숙 등의 여성 문인과 마찬가지로 총후봉공의 자세를 선전·선동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그는 『반도의 빛』 1943년 10월호에 발표한 농촌에 보내는 서간문 「형(兄)이 거두신 것」을 통해서 이를 형상화하였다.

 

이 편지의 수신인 ‘형’은 “몇 날만 피아노 연습을 게을리하여도 손가락이 굳어질까 염려하던” 도시 여성이다. 그런데 그가 농촌으로 내려가 “농업 전사로서의 증산 보국에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는, 거룩할 정도의 ‘묵묵한 봉사자’로 변한 것이다. 장덕조는 이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국책에 발맞추어 변신한 도시인의 총후봉공을 넌지시 드러내고자 하였다.

 

같은 편지 형식의 「결전하(決戰下)의 서울 소식」(『반도의 빛』 1944년 1월호)도 앞 편지의 수신인인 ‘김형’에게 보내는 글이다. 장덕조는 이 편지에서 신체제에 맞게 근검절약하고 생활 개선, 부인 근로봉사, 공출 등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등 여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총후봉공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우리 부인회에서도 일제히 폭 치마와 옷고름을 없이 하고 통치마에 단추를 달기로 했습니다. 부인 근로의 봉사와 공동작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우량한 1평(坪) 농원의 수확과 적지 않은 피마자를 거두어 공출할 수 있었고, 물자 회수 운동에서는 시국에 필요한 금속류의 공출에 적극적 열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 「결전하(決戰下)의 서울 소식」, 『반도의 빛』(1944년 1월호)

 

장덕조는 또 「결전하의 아동 지도」(『반도의 빛』 1944년 3월호)에서 ‘군국의 어머니’들이 ‘국책’에 부응하여 어떻게 아동들을 길러낼 것인가에 대해 말하는가 하면, 일제의 징병에 호응하는 ‘내지인’ 노부인의 예를 들어 이를 찬양하기도 하였다.

 

또한 ‘등장시켜 보고 싶은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시리즈의 여러 글 중 하나인 「병사의 어머니」(『반도의 빛』 1943년 8월호)는, 아들 셋을 나라에 바치고도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어느 ‘내지인’ 노부인의 이야기다. 이 글에서 그는 “놀라운 대전과(大戰果)의 그늘에는 이같이 평범한 많은 힘의 결합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며 감탄한다.

 

‘가정소설’이라는 부제가 달린 「재생(再生)」(『방송지우』 1944년 2월호) 은 일본어 소설 「행로(行路)」(『국민총력』 1943년 12월호)와 더불어 ‘총후봉공’과 병력 동원의 문제를 통속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재생」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식을 버렸던 여주인공이 허위의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에 눈뜬다는 이야기고, 「행로」는 문인으로 성공한 뒤 방종하게 살아가다 끝내 비구니가 된 여주인공 ‘애라’의 삶을 통해 서구적 개인주의를 공격적으로 비판한 소설이다.

 

「행로」(1944년 5월 조선도서출판 발행 『반도작가단편집』에 재수록)는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는 ‘나’가 ‘애라’를 우연히 경부선 기차 안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기 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아이조차 아비에게 맡겼던 애라는 열네 살 아들로부터 소년 항공병으로 출정한다는 편지를 받고 아들을 만나러 경부선을 탄 것이다.

▲ 「 행로 ( 行路 ) 」 『 국민총력 』 (1943 년 12 월호 )

짧은 생애에 아름다운 모성의 이름을 남길 것인지, 그것을 영원히 잃을 것인지는 각자의 품성과 각오에도 의하겠지만, 대부분은 일시적으로 틀린 생각과 잠시 잘못 밟은 사상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 「행로(行路)」, 『국민총력』(1943년 12월호)

 

소설 속 이 진술을 통해 작가는 전시 체제하에서 애라와 같은 신여성의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일체의 서양적인 것들이 배척되던 당대 상황에서 애라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설 자리는 없었다. 마침내 아들을 낳아 잘 길러 지원병으로 보내는 ‘군국의 어머니’ 역할을 깨달은 ‘총후 부인’으로 거듭나는 애라의 진술은 일제의 논리와 정확히 겹친다.

 

인간이란 마음속 문제만 해결하면 몸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신념대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요즘 많이들 말하는 총후봉공도 제일선(第一線)의 동(動)에 지지 않는다는 말, 이런 의미가 아닐까.

   - 「행로(行路)」, 『국민총력』(1943년 12월호)

 

소설과 서간문에 이어 장덕조는 희곡으로도 신체제와 지원병 문제를 선전·선동하였다. 희곡 「노처녀」(『조광』 1944년 2월호)는 소극(笑劇)의 형식으로, 지원병을 다녀온 청년에게 시집가고 싶은 노처녀 이야기를 다룬다.

 

‘죽 한 사발, 김치 한 보시기, 냉수 한 그릇’으로 검소한 ‘신체제 밥상’을 차려 내올 줄 아는 ‘신체제’ 며느리 점순은 청년의 부친에게 며느릿감으로 인정받아 혼인 승낙을 받아 낸다. 소설은 지원병 출신의 남편감을 ‘이파나 헤이따이상(立派な兵隊さん: 훌륭한 병정님)’으로 묘사하는 등, 근검절약과 정신 무장, 지원병에 대한 선동 등 신체제 담론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총후의 꽃」은 1945년 1월, 『방송지우』에 ‘징병 소설’이라는 부제로 발표한 작품이다. 여주인공은 징병검사를 마친 남동생이 입대하게 되자 쓸쓸해 하는 홀어머니를 위로하고 설득한다. 여주인공은 어머니에게 ‘우리 둘은 총후의 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으로 징병되어 전선으로 간다는 것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친일 부역 문인들은 전시 동원 체제에 부응하여 학병제와 징병제를 찬양하고, 동포 젊은이들에게 일왕의 총알받이로 지원하라고 부추기며, 후방의 여성들에게는 총후봉공에 힘쓰라고 선동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들 가운데 자기 자식을 일본 군대에 보낸 이는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모두가 징집 연령에 미치지 못했거나 훨씬 넘겼던 것일까.

 

친일 과거는 잊히고 역사소설가로 제2 전성기

 

해방 후에 장덕조는 몇몇 문인단체의 회원이었으나 공식적 활동 기록은 없다. 몇 편의 소설을 썼고, 1950년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난 가서 《영남일보》 문화부장 겸 종군작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최초로 종군한 여성 작가였다. 그 외에도 최정희, 손소희, 전숙희 등이 종군한 작가였다.

 

장덕조는 『전선문학』과 같은 잡지에 반공 소설과 반공 수필을 발표하고 강연회에서 소설을 낭독하며 문인극을 공연하는 등, 전시 기간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적이 ‘영미 귀축’에서 공산 침략자로 간단히 바뀌었고, ‘황군의 총후봉공’ 대신 그는 직접 군복을 입고 국군을 따랐다.

 

장덕조는 뒤에 《대구매일신문》(1951~1952) 문화부장과 논설위원, 《평화신문》 문화부장을 지냈다. 여기자로는 유일하게 휴전협정을 취재하였으며, 그 공로로 뒷날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1976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장덕조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문학 부문에 수록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705인 명단에도 올랐다. 전후에 장덕조는 대중적 취향의 신문연재소설, 대하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하였다. 해방 후부터 1970년대까지 유수의 중앙 일간지와 지방지에서 그의 연재소설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벌일 만큼 그는 전성기를 누렸다.

 

《동아일보》에 연재한 「광풍」(1953~1954), 「낙화암」(1956~1957), 《한국일보》에 연재한 「벽오동 심은 뜻은」(1963~1964), 「이조의 여인들」(1968~1972) 등의 역사소설과 함께, 「다정도 병이런가」(『신태양』 1954년 2~9월호), 「원색지대」(《서울신문》), 「지하여자대학」(《중앙일보》) 등의 대중소설도 연재하였다.

 

텔레비전 드라마 시나리오 「대원군」과 「여인열전」은 방송 후 책으로 출간되었고, 그의 작품 중 『다정도 병이런가』(1957), 『광풍』(1962), 『벽오동 심은 뜻은』(1964), 『지하여자대학』(1970) 등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89년 대하소설 『고려왕조 500년』 14권을 펴냈을 때, 그는 75세였다. 곧 기왕에 펴낸 『조선왕조 500년』 10권에 더하여 『해동 삼국지』 20권 집필에 들어갔지만, 2003년 2월 사망하면서 『한민족 5천년사』 50권을 채우려던 계획은 이루지 못하였다.

 

장덕조는 살아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적지 않은 기림을 받았다. 그는 한 인터넷 언론의 기획 기사 ‘경북 여성 로드를 만들다’ 제3편 (「우리나라 최초의 종군기자로 명성」)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가 남자현(1872~1933, 1962년 대통령장), 이희경(1894~1947, 2002년 건국포장) 선생에 이어진 기사였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가 쓴 친일 작품에 관한 내용은 없다. 이 기사는 장덕조의 삶에 대하여 “평생을 쉼 없이 살았던 장덕조는 언제나 자기완성을 향해 구도자처럼 꾸준히 걸어갔다”라고 기리고 있다.

 

또 장덕조는 《영남일보》 주말 매거진 ‘위클리 포 유’에서 2017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표지 이야기로 다룬 「대구·경북 여성사를 빛낸 인물들」 16명에 남자현, 이희경, 정경주(1866~1945) 등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포함되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펴내는 월간지 『문화예술』 2002년 7월호는 ‘예술인 탐구’ 기사로 「작품으로 행동하고 참여하는 작가 장덕조」라는 글을 실었다. 그의 일생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이 글에도 일제 말기 그의 행적은 비어 있다. 다만 글 뒤에 실린 그의 육성이 흥미롭다. “인생 오십을 살거나 육십을 살거나 영겁으로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다 같이 일순이요, 일 찰나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2019년 5월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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