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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팔공산 골짜기에서 ‘철 이른 봄’을 만나다

by 낮달2018 2022.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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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줄기를 다잡은 왕실 원당, 파계사(把溪寺)

▲ 파계사 팔공산 기슭 경사면에 깃든 이 절집은 천연석으로 지은 축대 위에 전각을 세웠다 .

옛 친구들과의 모임에 다녀오는 길에 팔공산 파계사(把溪寺)에 들렀다. 파계사는 804년(애장왕 5) 심지(心地) 왕사가 창건한 절로 인근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다. 계율을 따라 수행하는 납자(衲子)들의 도량이니 그럴 리 없건만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중생들은 ‘파계(破戒)’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파계는 ‘잡을 파(把), 시내 계(溪)’의 파계니, 아홉 갈래나 되는, 절 좌우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따라 땅의 기운이 흘러나가는 것을 방비한다는 의미다. 진동루(鎭洞樓)라는 이름 역시 골짜기‘동(洞)’의 지기를 눌러 준다[진(鎭]’는 뜻을 담고 있다. 누각 아래로 보이는 인공 못 은 바로 물줄기를 따라 흘러나온 기를 모으는 곳인 셈이다.

▲ 진동루에 걸련 현판 일제 강점기 때의 서예 대가 회산 박기돈 선생의 글씨다 .

일주문을 지나 절집으로 오르는 산길은 완만한 오르막이다. 산비탈에 우거진 소나무와 잡목 숲 사이로 음력 동짓달의 햇살이 시나브로 내려앉다가 사라지곤 한다. 진동루 앞 맨흙의 주차장엔 적지 않은 수효의 여러 종류의 차량이 들어차 있었지만, 절집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요하다.

 

진동루 앞 주차장 한가운데 서 있는 수령 250년의 키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생뚱맞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석축 위마다 가지를 뻗고 선 나무와 전각들이 연출하는 조화가 무던하기 때문이다. 상당한 규모의 이층 누각과 범종루 등이 높다랗게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인 듯하다.

▲파계사 진동루는 정면 5 칸, 측면 3칸 규모의 100 여 평에 이르는 2 층 누각이다 .
▲ 기영각은 '영조를 위해 기도하는 곳' 이라는 뜻이다 . 숙종, 영조, 정조의 어필을 보관해 '어필각(御筆閣)'이라고도 불린다 .

이 절은 조선조 제19대 임금인 영조와 인연이 깊다. 영조의 부왕인 숙종이 숭례문 근처에서 청룡이 승천하는 꿈을 꾸고 난 다음 날 예의 장소에서 한 승려를 만나니 이분이 파계사의 영원 선사다.

 

숙종은 선사에게 아들을 얻고자 백일기도를 부탁했고 후에 숙빈 최씨가 영조를 낳는다. 이에 숙종은 영원 선사에게 현응이라는 호를 내리고 파계사에 인근 40여 리의 조세권을 준다.

 

그러나 현응은 이를 물리치고 선대 임금의 위패를 모시게 하여 달라고 청원한다. 현응은 경내에 기영각(祈永閣)을 짓고 선조·숙종·덕종·영조 네 임금의 위패를 모심으로써 지방 유생들의 행패를 막고 왕실 원찰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1910년 국권 강탈로 위패는 서울로 옮겨갔고, 지금은 탱화만 걸려 있다. 이 전각은 숙종·영조·정조의 어필을 보관해 ‘어필각(御筆閣)’이라고도 불린다.

 

성전암 법당에 걸린, 영조가 열한 살에 썼다는 ‘현응전(玄應殿)’ 현판과 1979년 원통전의 관음보살상을 개금(改金, 금칠을 다시 하는 것)할 때 불상 안에서 나온 영조의 도포 등이 그런 역사적 사실을 증빙한다. 도포와 함께 한지 두루마리에 적힌 발원문에 따르면 1740년(영조 16) 12월에 대법당을 개금하고 불상과 나한을 중수하였으며, 영조가 탱불 일천 불을 희사하여 왕실의 원당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 원통전은 파계사의 중심 전각으로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씩인 맞배집이다 .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100여 평에 이르는 2층 누각인 진동루를 지나면 원통전이다. 원통전은 파계사의 중심 전각으로 좌우, 앞의 설선당과 적묵당, 그리고 진동루에 둘러싸여 ‘ㅁ’자 형의 안온한 공간을 여미고 있다. 이런 공간 구성으로 파계사는 내부 공간을 외부인으로부터 차단하면서 최소한의 수행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원통’이란 주원융통(周圓融通), 즉 ‘진리는 두루 원만하여 모든 것에 통해 있다’라는 뜻으로 관세음보살을 가리키니, 원통전은 곧 관음전의 다른 이름이다. 이 맞배지붕의 전각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씩이어서 그리 크지 않은 전각인데도 날렵한 느낌보다는 통통한 양감으로 다가온다. 원통전에는 은해사 백흥암의 수미단(須彌壇)과 같은 형태로 정교하게 무늬를 새겨 넣은 불단 위에 보물 제992호 목조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다.

▲ 묵적당의 풍경에 낀 푸른 녹과 날렵한 물고기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
▲묵적당 뒤편의 석축 아래 목련 꽃눈이 아련하다 .

산등성이에 깃든 절집이어서일까. 대부분 전각은 돌축대 위에 올라앉아 있다. 그리고 그 손대지 않은 돌의 수더분한 결과 맵시가 정겨웠다. 적묵당 뒤편 석축 아래 목련 꽃눈이 아련하였다. 1월 초순, 소한이니 봄은 아직 멀다. 그런데도 뜬금없이 그게 내일모레면 성큼 다가올 봄의 조짐처럼 마음에 닿아온다.

 

내 죽은 사상을 시든 잎들처럼

우주에서 몰아내 새로운 탄생을 재촉해다오!

그리고 이 시를 주문(呪文) 삼아

 

꺼지지 않은 화로의 재와 불티처럼

내 말을 온 세상에 흩뜨려다오!

내 입을 통해 잠 깨지 않은 대지에

 

예언의 나팔이 되어다오! 오 바람이여

겨울이 오면 봄이 어찌 멀다 할 수 있으랴?

 

- 셸리 <서풍에 부치는 노래> 중에서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라고 노래한 이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셸리다. 봄은 어쨌든 겨울의 추위가 물러가야 온다. 캄캄한 어둠의 한밤을 건너야 새벽이 오는 것처럼. 온전한 봄을 맞으려면 석 달을 좋이 기다려야 하는데도 꽃눈이 건네는 봄기운은 황홀하다.

 

목련 꽃망울 너머로 벽돌로 쌓은 굴뚝과 그 너머 풍경이 연초록으로 다가왔다. 눈높이에서 묵적당의 풍경에 낀 푸른 녹과 날렵한 물고기가 바람에 흔들렸다. 하늘은 깨어질 듯 명징한 청남빛. 오랜만에 돌아온 동네 거리를 둘러보는 건달처럼 나는 경내를 두어 바퀴 돈 주마간산의 절 구경을 마치고 휘적휘적 절 아래 계곡을 굽어보며 하산한다.

▲ 절 아래 아홉 물줄기를 모은 파계사의 인공 못 .날씨는 따뜻했는데도 꽁꽁 얼어 있었다 .
▲ 두꺼운 흰 구름의 띠가 팔공산 산봉우리를 휘감고 있다 .

팔공산 자락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팔공산은 오악(五嶽)의 하나로 신라의 영산(靈山),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방 세력의 거점지였다. 927년(태조10),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의 대회전이 펼쳐진 무대다. 서라벌을 침공 도륙한 견훤 군에 맞서 신숭겸·김락을 거느린 왕건은 팔공산 기슭에 이른다.

 

동화사는 당시 백제계 법성종 사찰로 견훤 세력의 근거지였다. 왕건의 군대는 은해사 부근에서 매복 작전에 나서지만, 오히려 견훤의 역매복에 걸려 패퇴한다. 살내[전탄(翦灘)]를 거쳐 지묘에서 대패한 왕건은 동화사와 파계사가 갈리는 길목의 고개에서 신숭겸의 희생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예의 고개가 ‘파군재[파군치(破軍峙)]’로 불리게 된 까닭이다.

 

왕건의 도주로에 따라 만들어진 땅이름도 숱하다. 도동 부근은 후백제군이 있을까 근심했다가 무사히 빠져나가면서 그의 얼굴이 펴졌다고 해서 ‘해안(解顔‘’이 됐고 지금은 대구시로 편입된 반야월이 ‘안심’으로 불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반야월(半夜月)’이라는 지명도 하늘에 반달이 떠서 그의 도주로를 비춰 주어서 붙은 이름이다.

 

산문으로 내려오는 비탈길 오른쪽은 예의 아홉 물줄기를 모은 인공의 못이다. 햇살은 더할 나위 없이 따스한데 못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다. 아직도 겨울의 한복판, 봄은 아직 먼 것이다.

 

왕실 원당 파계사를 빠져나오면서 고개를 돌리자 두꺼운 흰 구름 띠가 팔공산, 이 대도시의 진산(鎭山) 봉우리를 병풍처럼 휘감고 있었다.

 

2008. 1. 8. 낮달

 

 

팔공산 골짜기에서 '철 이른 봄'을 만나다

물줄기를 다잡은 왕실 원당, 파계사(把溪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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