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여류 명사로 살다 간 모윤숙(1909~1990)
우리는 높이 펄럭이는 일장기 밑으로 모입시다. 쌀도, 나무도, 옷도 다 아끼십시오. 나라를 위해서 아끼십시 오.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만은 아끼지 맙시다. 아들의 생 명 다 바치고 나서 우리 여성마저 나오라거든 생명을 폭탄으로 바꿔 전쟁마당에 쓸모 있게 던집시다.
- 「여성도 전사다」, 『대동아』(1942년 5월호)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 『풍랑(風浪)』(문성당, 1951)
모윤숙의 ‘두 얼굴’
앞엣것은 산문이고 뒤엣것은 시니, 일률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두 글의 지은이가 같고, 두 글을 관통하는 열쇳말이 ‘애국’이 라고 하면 어떤가. 물론 ‘애국’의 대상은 명백히 다르다. 하나는 식민 종주국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찬양과 선동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전쟁에 희생된 젊은이에 대한 추모와 기림이다.
이 두 편의 글에 모윤숙(毛允淑, 1909~1990)의 멘탈리티가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듯 보인다. 어디에서든 주어진 조건 안에서 언제나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간 20세기 여류 명사 모윤숙의 삶 말이다. 그 현란한 변신은 가히 무애(?)의 경지라 할 만하다.
그러나 국제연합(UN)에서 외교 활동을 벌이고 국제펜클럽을 무대 로 전방위 활약을 펼친 그의 삶은, 동포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내몬 친 일부역 행위 앞에서 빛을 잃는다.
모윤숙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호는 영운(嶺雲), 필명으로 모악인(母岳人), 모악산인(母岳山人) 등을 썼다. 시인 노천명과 소설가 최정희의 친우로, 이광수의 문단 제자다.
모윤숙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1931년 『동광』에 「피로 새긴 당신의 얼굴」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19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조선창문사)을 펴냈고, 1935년에는 『시원(詩苑)』 동인으 로 활동하였으며, 1934년부터 1938년까지 극예술연구회 동인을 지냈다. 그러나 모윤숙은 시인으로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둔 것 같지는 않다.
1937년에 산문과 시의 중간 형식인 일기체 연가(戀歌) 『렌의 애가(哀歌)』(일월서방)를 출간하였는데, 이 39쪽짜리 책은 닷새 만에 매진 되었다. 나머지 일기도 읽을 수 있게 해 달라는 독자들의 성화가 빗발쳤고, 유진오는 『렌의 애가』가 한국판 『좁은 문』이며 여자 쪽에서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 극찬하였다.
시몬!
그러나 저는 책보다 당신을 더 동경하여서는 안 될 것을 알아요.
저 하늘에 윤회하는 성좌의 비밀을 알기 전에 당신이란 환상의 비밀을 알려고 고민함이 의롭지 못함인 줄 잘 압니다.
시몬!
당신의 애무를 원하기보다 당신의 냉담을 동경해야 할 저입니다. 용서하세요.
그러나 저는 당신의 빛난 혼의 광채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당신이 알려 준 인생의 길, 진리, 평화에 대한 높은 대화들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때로 내 생명을 장성시켜 주는 거룩한 사도이기도 합니다. 신에게 향한 이 신앙의 비애를 마음속으로부터 물리치려고 때로 노력합니다.
- 『렌의 애가』 제1신(일월서방, 1937년)
글쎄 평가야 평자의 자유겠지만, 중학교 때 『렌의 애가』를 읽은 나는 막연하지만 삶과 사랑을 감상적으로 읊은 달착지근한 연애편지 같다고 느꼈다. 내게 모윤숙이 시인으로 기억되지 않는 까닭은 그때 『렌 의 애가』에서 받은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성도 전사다’, 목숨만은 아끼지 말자!
모윤숙이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대체로 1940년 이후로 보인다.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문예강연대회에서 시를 낭독한 이래, 시국 강연 등에 나서다가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그의 친일 은 날개를 단다.
1941년 《매일신보》가 주최한 시국 부인 대강연회에 연사로 참가하여 ‘총후 부인의 가정 결전 체제를 갖출 것’을 역설하였고, 조선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에서 ‘여성도 전사(戰士)다’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모두에 제시한 “물자는 아끼되 목숨만은 아끼지 말자”라는 사자후가 바로 그것이다. 모윤숙은 이 연설에서 전시의 ‘도덕적’인 여성상을 제시하면서 총후봉공의 소임을 다할 것을 주장하였다.
여느 친일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모윤숙의 친일 부역도 태평양전쟁의 전개와 함께 일제의 총동원 정책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시행된 지 3년이 지난 1941년 『삼천 리』에 발표한 시 「지원병에게」는 지원병에 대한 찬양을 담았다. 1943년 5월 해군지원병제도 시행이 결정된 후에도 해군지원병 참여를 독려하는 시 「아가야 너는–해군기념일을 맞이하여」를 발표하였다.
눈은 하늘을 쏘고 그 가슴은 탄환을 물리쳐
대동양의 큰 이상 두 팔 안에 꽉 품고
달리어 큰 숨 뿜는 정의의 용사
그대들은 이 땅의 광명입니다.
대화혼(大和魂) 억센 앞날 영겁으로 빛내일
그대들이 나라의 앞잡이 길손
피와 살 아낌없이 내어 바칠
반도의 남아 희망의 화관(花冠)입니다.
- 「지원병에게」, 『삼천리』(1941년 1월호) 113
아가야! 조개잡기 즐겨 모래성을 쌓고
땅에서 서기보다 물에 놀기 좋아하는 너 그 못 잊어운 바다가
이제 너를 오란다.
이제 너를 부른다.
해군모 쓰고 군복 입고 나오란다.
대동아를 메고 가란 힘찬 사명이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너를
부른다.
사나운 파도 넘어
네 원수를 물리쳐라.
너는 아세아의 아들
대양의 용사란다.
-「아가야 너는-해군기념일을 맞이하여」, 《매일신보》(1943년 5월 27일자)
시 「아가야 너는」은 일부만 개작하여 해방 직후에 ‘등대지기 아가’라는 제목으로 시집 『옥비녀』에 실렸다.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어떤 정서와 이념의 변화 없이 일부 구절만 바뀌어 이 시는 살아남았다. 장차 일제의 전사가 될 ‘대동아의 아들’이 졸지에 순진무구한 ‘등대지 기’가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친일부역 행위에 골몰하다 이내 신생 대한민국의 외교 전선에 서는 그의 무한 변신을 닮았다.
정책적인 주문이 있었든지, 아니면 그 자신의 취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해군에 대한 그의 찬양은 산문에서도 이어진다. 모윤숙은 1943년 6월 『춘추』에 발표한 산문 「해군의 얼굴」에서 해군특별지원병제의 시행을 환영하였다.
사실 나는 육군지원병제가 공포될 때보다 이번 해군특별지원병제가 공포될 때 더 감격이 되었습니다. ……우리 반도의 남자들은 지금까지 큰일, 즉 나라를 위하여 바다에 떠본 일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는 어서 해군모의 키 큰 자태가 우리 동리에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만약 내게 아들이 태어난다면 나는 꼭 해군 되기를 빌겠습니다. 사나이다운 사나이, 그는 오직 해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기품일까 합니다.
- 「해군의 얼굴」, 『춘추』(1943년 6월호)
위태하게 내닫던 모윤숙의 글쓰기는 1943년 10월 육군특별지원병 채용 시행규칙이 공포되어 같은 해 11월 20일 학병 모집의 마감을 앞두고 11월 12일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에서 절정을 이룬다. 지원을 독려하는 어머니와 자신의 죽음을 설워 말라는 아들의 말을 교차시켜 ‘애국 모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오냐! 지원을 해라 엄마보다 나라가
중하지 않으냐 가정보다 나라가 크지 않으냐.
생명보다 중한 나라 그 나라가
지금 너를 나오란다. 너를 오란다.
조국을 위해 반도 동포를 위해 나가라.
폭탄인들 마다하랴 어서 가거라.
엄마도 너와 함께 네 혼을 따라 싸우리라.
어머니여! 거룩한 내 어머니여!
찬 들에 구르거나 진흙에 파묻히거나
내 나라의 행복을 위함이어니
설워 마소서.
내가 가면 아세아의 등불이 되어
번개가 되어 광명이 되오리다.
- 「내 어머니 한 말씀에」, 《매일신보》(1943년 11월 12일자)
모윤숙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백의 용사」(『신시대』 1941년 6 월호)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였고,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제가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시 「호산나·소남도」를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아시아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전쟁으로 미화하기도 하였다.
애국채권을 팔고 군복 수리에 동참하며
1942년 1월에는 대중잡지 『신시대』에 정월 맞이 기념시로 발표한 「동방의 여인들」에서 ‘대일본 제국’ 여인의 참모습을 기렸고, 이듬해 12월 『신시대』에 발표한 시에서 가미카제로 출격하여 전사한 조선인 소년 비행병 출신 하사관인 히로오카 겐야(廣岡賢載, 이현재)를 찬양하였다. 이현재는 1945년 5월 27일 오키나와 주변 해상에서 18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이렇듯 한국인 가미카제 희생자들은 대부분 일제 패망 서너 달 전에 전사하였다.
새날이라서
상 차려 즐기지 않겠습니다.
입던 옷 그대로
먹던 밥 그대로
달가워 새아침을 맞이하렵니다.
동은 새로 밝고
바람은 다시 맑아졌습니다.
훤한 하늘 새로
힘차게 날으는 독수리 나래
쳐다보며 쳐다보며 호흡을 준비합니다.
비단 치마 모르고
연지분도 다- 버린 채
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다.
온갖 꾸밈에서
행복을 사려던 지난날에서
풀렸습니다.
벗어났습니다.
들어 보세요.
저 날카로운 바람 새에서
미래를 창조하는
우렁찬 고함과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산- 발자국 소리를.
우리는 새날의 딸
동방의 여인입니다.
- 「동방의 여인들」, 『신시대』(1942년 1월호)
고운 피 고운 뼈에
한번 새겨진 나라의 언약
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
적의 숨을 끊을 때까지
사막이나 열대나
솟아 솟아 날아가라.
사나운 국경에도
험준한 산협에도
네가 날아가는 곳엔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라.
- 「어린 날개-히로오카(廣岡) 소년 항공병에게」, 『신시대』(1943년 12월호)
모윤숙은 군국가요 「군국의 어머니(軍國の母)」, 「어머니의 희망(母の希ひ)」을 직접 작사하기도 하였는데, 이 노래들은 1943년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서 여러 차례 방송되었다.
1941년 임전대책협의회가 이른바 ‘채권가두유격대’(채권봉공대 또는 채권보국대)*를 꾸려 경성부 11곳에서 “총후의 봉공은 채권으로부터!”를 외치며 애국채권을 팔 때 그는 종로대원으로 참가하였다. 1942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의 군복 수리 근로에 동참하였고, 1943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선전·선동하기 위해 전위 여성격려대를 조직하여 조선 각지에 파견하자 함흥·원산·북청 지역 강사를 맡아 강연회와 좌담회를 통해 ‘일본 여성의 갈 길’을 주장하였다.
* 1941년 9월 7일 친일 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가 서울 시내에서 전개한 친일 활동 조직. 전쟁 경비를 확보하고자 사회 저명인사들을 동원하여 거리에서 소액 채권을 판매하였다.
모윤숙 친일시의 으뜸은 1945년 1월 2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신년송(新年頌)–금녀의 노래」다. 그는 ‘금녀’라는 이름의 아낙을 화자로 삼아, 침략전쟁과 그 출정자를 찬양하고 내선일체와 총후봉공 을 선동하였다.
그러나 님이여!
한 줄기 피의 자손
그 얼굴 그 얼굴 같은 얼굴들
제 나라 위해 모이는 장사들
무에 서먹하리까 맘 놓고 손잡으사
앞으로 앞으로 저 원수 물리치소.
씨름도 첫째, 헤엄도 첫째
이 동리 이름 낸 장사이시니
산도 물도 무서울 게 없으리다.
바람 눈비 속도 마다 않고 가시리다.
오늘부터 이 몸은 공장 색시 되어서
서방님 달리던 길 아침저녁 걸으며
나라 위해 왼 정성 이바지하려 하오.
님이 쓰실 총포탄을 내 손수 만들려오.
- 「신년송(新年頌)-금녀의 노래」, 《매일신보》(1945년 1월 2일 자)
금녀의 소망은 그러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해 8월 조국이 해방 된 것이다. 내선일체와 총후봉공을 외쳤던 친일 부역자들은 일왕의 항복 선언을 들으며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러나 알다시피 이들은 신생 조국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누렸던 기득권을 잃지 않고 너끈히 간직할 수 있었다.
눈부신 입신과 낙랑클럽
모윤숙은 해방 후 이승만의 노선을 따르면서 외교 활동을 벌였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단장인 메논(V. K. Krishna Menon)과 긴밀한 관계 를 맺어 메논이 애초의 뜻을 뒤집고 남한만의 총선거를 통한 단독정 부 수립을 지지하도록 유도하였다. 1948년 10월에는 프랑스에서 열 린 제3차 유엔총회에 참석하여 한국이 합법적 국가로 승인받도록 외 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모윤숙은 1949년 4월 유엔 한국위원단 연락관, 제4차 유엔총회 대표단원, 한양여성클럽 회장, 대한여자청년단 총본부 단장과 북진통일여성투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 산에서 영어에 능통하고 외모가 뛰어난 지식인 여성을 모아 ‘낙랑클럽’을 조직하여 정부 고위 관리, 군 장성, 주한 외교사절 등을 대상으로 사교 활동을 벌여 이승만 정부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로비를 전 개하였다.
1954년에 한국펜클럽을 창립하였고, 제10차 유네스코 총회, 아시아반공대회와 아시아여성단체연합회 등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였고, 1960년에 드디어 국제펜클럽 한국위원장을 맡았다. 1970년에는 국민 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민주공화당 소속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가히 눈부신 활약이요, 입신이다.
모윤숙은 1973년 한국현대시협회 회장에, 1976년 국제펜대회 종신 부회장에 추대되었다. 1980년 『황룡사 구층탑』으로 3·1문화상을 수상하였다(3·1정신을 계승한다는 이 상은 『친일 인명사전』에 오른 문인 가운데 조연현, 백철, 최정희도 수상하였다).
1980년에 문학진흥재단 이사장, 1987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 회원에 올랐다. 모윤숙은 1990년 6월 사망하였다. 향년 80세. 한갓진 수사 가 아니라 ‘영욕을 넘나든 삶’은 결국 80년을 넘기지 못하였다. 다음 날 정부는 고인에게 1등급의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어떤가. 이만하면 한 인간의 삶으로는 만족할 만한가.
인간에 대한 평가로 흔히 공과를 논한다. 쿠데타로 민주 헌정을 짓밟은 박정희의 ‘과(過)’는 ‘조국 근대화’라는 공으로 상쇄되다가 결국 슬그머니 지워진다. 식민 종주국을 위해 동포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몬 친일 부역자 모윤숙의 과도 신생 대한민국을 위한 헌신으로 덮어질까. 설사 그런 타협이 우리 역사의 아쉬운 선택이었다 치더라도 그것이 성찰 없이 추인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2019.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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