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가장 거리낌없이 흐르는
넓은 바닷가 모래 위에다
나는 내 아픈 마음을 쉬게 하려고
조그만 병실(病室)을 만들려 하여
달빛으로 쉬지 않고 쌓고 있도다.
가장 어린애같이 빈 나의 마음은
이때에 처음으로 무서움을 알았다.
한숨과 눈물과 후회와 분노로
앓는 내 마음의 임종(臨終)이 끝나려 할 때
내 병실로는 어여쁜 세 처녀가 들어오면서
—당신의 앓는 가슴 위에 우리의 손을 대라고 달님이
우리를 보냈나이다.—
이때로부터 나의 마음에 감추어 두었던
희고 흰 사랑에 피가 묻음을 알았도다.
나는 고마워서 그 처녀들의 이름을 물을 때
—나는 ‘슬픔’이라 하나이다.
나는 ‘두려움’이라 하나이다.
나는 ‘안일(安逸)’이라고 부르나이다.—
그들의 손은 아픈 내 가슴 위에 고요히 닿도다.
이때로부터 내 마음이 미치게 된 것이
끝없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 되었도다.
-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 『백조』 3호(1923년 9월호)
박영희(朴英熙·芳村香道, 1901~ ? )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서였다. 문학사를 다루는 소단원에서 1920년대의 시인과 작품을 서술하면서 그의 「월광으로 짠 병실」을 소개하고 있었다. 제목부터가 꽤 애상적인 이 작품은 시인 자신의 평가대로 ‘정서의 난만한 향락에 빠’진 것이었다. 이른바 1920년대 초기 ‘병적·퇴폐적 낭만주의’의 경향이 여과 없이 드러난 작품인 셈이다.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다”
카프(KAPF) 따위의 낯선 낱말들 틈바구니에서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다”라는 그의 유명한 글귀를 접하게 된 것도 비슷한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그때는 ‘이데올로기’는 고사하고 ‘예술’조차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회월(懷月) 박영희는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나 배재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1919년 3월 5일 배재고보 학생들의 만세운동 때 체포되었으나 훈계 방면되었다. 배재고보 수료 후 일본에 유학하면서 나도향 등과 펴낸 잡지 『신청년』에 시 「목동의 적(笛)」을 발표하였다.
1921년에는 박종화, 황석우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인 『장미촌(薔薇村)』을 펴냈다. 창간호에 「적(笛)의 비곡(悲曲)」과 「과거의 왕국」 두 편을 발표하였는데, 박영희는 이 중 「적의 비곡」을 첫 작품으로 간주하였다. 등단작은 1921년 5월 『청년』에 발표한 시 「인생」과 「애홍(愛虹)」이다.
박영희는 1922년, 우리 문학사에서 낭만주의 또는 상징주의 문학의 요람으로 일컫는 문예 동인지 『백조(白潮)』 창간에 관여하였고, 그 창간호에 「미소의 허화시(虛華詩)」 등 7편의 시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루 살로메」를 번역해 실었다.
『백조』 제3호 발간을 전후하여 박영희의 문학은 중대한 사상적 변모를 보이는데, 그는 스스로 이를 “『백조』 이전은 정서의 난만한 향락에 빠졌으며, 그 이후는 인생파의 문예 사조에 옮기기 시작”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신경향파’를 거쳐서 ‘카프’로 이어지는 이른바 ‘프로문학’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 말 일본의 사회주의자인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가 조선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박영희는 파스큘라를 결성하여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싸우는 의지의 예술”을 지향하게 된 것이다.
「전투」, 「정순이의 설움」, 「사냥개」, 「피의 무대」 등이 이 ‘인생을 위한 예술’의 결과물이다. 1925년 8월 송영 등이 중심이 된 염군사와 파스큘라가 합쳐져 카프가 결성되었다. 박영희는 카프 결성 후 이 조직의 교양부 책임자를 맡았다.
박영희는 1931년 6월 이른바 제1차 카프 검거 사건 때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다. 카프가 점차 좌경향을 띠게 되면서 내부의 노선 대립이 계속되자, 박영희는 이에 회의를 느껴 1933년 12월에 카프를 탈퇴하였다. 그가 《동아일보》에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이라는 사설을 기고하면서 공 개적으로 카프 탈퇴와 전향을 선언한 것은 그 이듬해인 1934년 1월이다. ‘이데올로기와 예술의 득실’에 대한 그의 언급이 이 글에 실렸다.
1934년 12월 신건설사 사건(제2차 카프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구속되었으나, 1935년 12월 29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1937년에 초기 시를 묶어 시집 『회월시초(懷月詩抄)』를 펴냈다.
카프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카프를 주도한 박영희가 친일 문인으로 변신한 것은 1938년 이후로 보인다. 박영희는 1936년에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에 따라 만들어진 경성사상범 보호관찰소에 수용되었는데, 이는 앞서의 투옥 경험과 함께 박영희의 친일 동기를 ‘생존’에다 두는 견해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박영희는 1938년 전향자들을 국민정신총동원에 적극 참여시킬 목적으로 도쿄에서 열린 시국대응전국위원회에 조선인 대표위원으로 참석하였다. 그는 이 행사의 참석 결과 보고회를 가진 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결성을 위한 준비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그해 6월 박영희가 각색한 최초의 친일 방첩영화인 <군용열차>가 개봉되고, 7월에 결성된 사상보국연맹에서도 몇 가지 직책을 맡게 된 다. 사상보국연맹은 ‘일본정신을 파악하여 내선일체 정화’를 목표로 하며, ‘사상을 정화해서 품성을 연마하며 생활의 쇄신을 도모’한다는 표어를 내건 단체였다.
그는 1939년, 황군 위문 작가단의 단장으로 김동인 등과 함께 중국을 다녀와서 《국민신보》에 「북지여행기」(1939년 6월 4일 자)를, 『동양지광』에 「전선 기행」(1939년 9~10월호)을 발표하고, 이광수 등과 함께 조선문인협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조선문인협회는 결성대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된 이광수가 밝혔듯이 ‘새로운 국민문학의 건설과 내선일체의 구현’을 위한 조직이었다.
*조선사상범 보호관찰소의 외곽 단체로 1938년 7월 24일에 조직된 친일 전향자 단체. 민족운동 또는 좌 익운동과 관련된 사상 전력자 중 친일로 변절한 자를 맹원으로 하였다.
박영희는 조선문인협회의 목적이 단순한 애국 행사만이 아니요, “현재 문학운동에 주류를 형성할 수 있는 어떠한 통일된 정신”을 수립함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통일된 정신’을 ‘도덕, 종교·인륜, 성애(性愛), 생활 전체를 관통해서 흐르게 하는 동양적 정신, 일본적 정신의 표현’이라 규정하였다.
박영희는 1940년 2월과 10월, 2회에 걸쳐 조선문인협회 ‘문사부대(文士部隊)’의 일원으로 경기도 양주 지원병훈련소에 1일간 입영하여 견학하였다. 같은 해 3월 전후부터 1941년 2월까지 국책영화 <지원병>의 대본 원안을 집필하는 등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카프의 발기인이기도 했던 영화인 안석영이 연출한 친일 영화 <지원병>은 일본군이 되고 싶어 하는 조선 청년의 이야기다(칼 찬 군인이 되고 싶어했다는 청년 박정희, 다카키 마사오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주인공에게는 일본의 군인이 되어 전장에 나가 싸우겠다는 꿈이 있다.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있어도 그의 꿈은 흔들리지 않는다. 주변 인물들도 그가 일본군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지주도 그의 선택에 감복하여 남은 가족을 보살펴 주겠다고 약속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남아 있는 가족은 국가가 책임질 터이니, 조선의 청년은 충성심을 가지고 국 가를 위해 싸우라”인 것이다.
일제가 창씨개명 정책을 시행하자 박영희는 누구보다도 빨리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로 개명함으로써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가 된 이광수의 방식을 따랐다. 일제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한 경우 대부분 한 자를 추가하거나 성씨를 두 자로 분리하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이들은 성과 이름자를 전부 바꾸어 버린 것이다.
요시무라 고도가 된 박영희는 각종 친일 조직의 간부를 맡아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벌인다. 그는 평론의 형식으로 일제의 각종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조선인과 조선 문인이 가져야 할 자세와 이른바 ‘국민문학’, ‘전시문학’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였다.
그는 1941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문학의 새로운 과제」(4월 11~16 일자)를 통해 “조선 사람이 소설 한 권을 읽고 황국신민의 진의를 깨달을” 때에 “문학은 훌륭한 무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 우리가 해결할 문제는 무기로서의 문학을 창조함에 있다. …… 전쟁문학이니 국민문학이니 하는 것은 역시 국민 전체가 비상시에 있 어서 나가야 할 방향과 의식을 고양하고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 것……
- 「문학의 새로운 과제」, 《매일신보》(1941년 4월 11~16일자)
그는 계속해서 조선문인협회와 사상보국연맹 외에도 조선방공협회, 황도학회(皇道學會),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문인보국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국민을 대상으로 일제의 침략 전쟁을 홍보·지원하는 이 같은 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박영희는 문필 활동에서도 적극적 친일 성향을 보였다.
박영희는 『인문평론』(1939년 10월호)에 기고한 「전쟁과 조선문학」을 통해 “당면한 신계단의 문학운동인 전쟁문학”은 “위정자나 국민이나 일치단결된 대중적 한 과정”이라면서 ‘전쟁문학은 일본 정신의 일 영역에 불과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또 일본 정신이 “조선 사람들 이 귀중하게 생각하던 도덕과 정의감이나, 또는 지나(중국)인들이 생각하던 그것이 다 포함되어 있는 광범하고 또 광범한 그 정신”이므로 “이 정신을 기초로 한 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성전(聖戰)임에 틀림없다”고 찬양하면서 중일전쟁을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위한, 일본 정신의 발로”라고 주장하였다.
황군의 고로(苦勞)를 국민에게 보이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황군과 한가지 국민 전체가 움직이고 있는 그 정신적 기본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
- 「전쟁과 조선문학」, 『인문평론』(1939년 10월호)
국민사상의 앙양이 사상계의 임무라면 국민의 전시 생활로부터 생기는 국민감정의 조직은 문학의 임무라고 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가리켜서 문학의 전시 체제라고 한다.
- 「문학운동의 전시 체제」, 《매일신보》(1940년 7월 6일자)
박영희는 「지식인의 윤리」(《매일신보》 1940년 8월 4일 자)에서 지식인 이 사상적 법규에서 탈출하여 “역사적으로 새로이 전개되는 새로운 신생활”의 실천에서 재출발할 것을 호소하였다. 또 「포연 속의 문학」(《매일신보》 1940년 8월 15~20일 자)에서 “대동아 건설의 계속 완수를 위하여 포연 속을 달리고 있는 현대의 작가야말로 충의와 정의와 정열(貞烈)에서 즐겁게 고민하는 인간형을 새로 창조”하는 전지(戰地) 문학의 기수라고 주장하였다.
이데올로기조차 잃은 ‘잊힌 문인’
이러한 글들은 그 논리의 정합성 여부를 떠나 식민지 문인이 일제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어떤 방식으로 소비하였는가를 보여 주는 씁쓸한 자료다. 그러나 그의 곡학아세는 불과 5년 후에 도래한 조국 광복 앞에서 그 허구성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으니,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옛말이 단지 ‘어설픈 앎’을 저어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박영희는 1945년 8월 1일 조선문인보국회 평론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1940년을 전후하여 눈부시게 보여 준 친일 부역 활동의 끝이 되었다. 보름 후, 그가 말한 ‘광휘 있는 대동아의 건설’은 수포가 되고 ‘천황폐하’는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해방 후 박영희는 중등학교 교사, 대학 강사 등을 지냈고, 1949년 국민보도연맹 선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납북되었다. 납북 이후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방과 분단 이후 반세기가 흘렀다. “변혁적 이데올로기에 철저하려 했다가 탄압의 고통 속에서 그 이념을 벗어던지자 탄압의 회피를 위한 또 다른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족쇄를 차지 않을 수 없었던”(임규찬) 박영희는 이제 우리 문학사 한 모퉁이에 희미한 자취만 남긴 채 잊혀 가고 있다.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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