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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김소운과 ‘문둥이의 조국’

by 낮달2018 2021.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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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운의 ‘친일’과 <목근통신>의 분노

▲ 벗들과 함께. 왼쪽부터 김소운, 이승만(화가), 소설가 박태원과 정인택. 1933 년 서울 .

나는 우연히 이 시대에 처하고, 또한 마치 방패의 양면을 보는 위치에 있다. 일본문화의 본질을 이해하고 감수(感受)하는 일인 이상, 나는 어떠한 내지인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다. 동시에 당연한 사실로서 나는 조선의 청년이다.

 

조선의 금일이 명하는 과세(課稅)에 대해서 반 발자국의 후퇴도 도피도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두 개의 언어를 가지는 고로 두 종류의 잠꼬대를 하고, 두 종류의 문장을 쓴다. 만요(萬葉)의, 잇사(一茶)의, 조루리(淨琉璃)의 정신이나 기분을 어느 정도 내가 체득하고 저작(詛嚼)해 내고 있는가.

 

자기 입으로는 어떻다고도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오늘날 내 몸 속에 있는 ‘일본’은 지식이나 교양은 아니고 이미 생리요 생활임에 틀림은 없다. 동시에 나는 고려의 화병에, 혜원(惠園)의 풍속화에 머리를 숙이고 혈액을 직감하는 진정진명(眞正眞銘)한 조선 청년이라는 것도 한 점 의심 없는 진실이다.

 

     - ‘청년들에게 지워진 짐’(<녹기>1939.9.) 중에서

 

*만요(萬葉): 일본의 고가집(古歌集) *잇사(一茶): 일본 고대 하이쿠(俳句) 시인

*조루리(淨琉璃): 조선의 판소리 비슷한 일본의 민속예술

 

▲ 김소운(金素雲, 1907~1981)

나는 사나흘 전에 어느 친구 집에서 우연히 30여 년이 지난 헌 기록 사진 몇 장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기미운동이라고 부르는 이른바 1919년의 ‘독립 소요사건’ 때 당신네들 손에 학살당한 그 처참한 송장들의 사진을 내가 그 날 처음 본 것은 아닙니다. 20여 년 전 도쿄 시모오치아이 오키노 선생 댁 서재에서 본 것도 바로 이 사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무에다 주렁주렁 목을 달아매어 죽인 그 사진을 그날 다시 대했을 때 내 감정은 다시 한 번 설레었습니다.

 

“죽일 놈들 같으니……, 이 죗값으로도 나라가 안 망할라고!”

 

그때 내 입으로 복받쳐 나온 말이 이것입니다. ‘왜적’이니 ‘강도 일본’이니 하는 말로는 형용치 못할, 더 한결 절실한 미움이 용솟음치는 것을 고백합니다.

 

    - 목근통신(木槿通信) ― 일본에 보내는 편지(<대한일보>1951.8.)

 

위의 두 글은 김소운(金素雲, 1907~1981)이 10여 년 시차를 두고 썼다. 흐름이 비슷하긴 하지만 두 글의 쓰인 배경은 완전히 상반된다. 앞의 글은 이른바 친일 문학으로 비판받는 글이라면 뒤의 글은 일본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소운의 ‘굴종’과 ‘분노’ 사이

 

앞의 글은 이른바 일제의 ‘내선일체’, ‘동조동근(同祖同根)’의 논리를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내용이다.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이 글이 “일본의 국민임과 동시에 뿌리 깊은 4천 년의 전통의 아들이라는 것도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하여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라며, “새도 되고 짐승도 되더라는 박쥐의 동화 같아서 읽기가 거북하였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

 

뒤의 글은 1950년 9월 10일 호 <선데이 마이니치(每日)>에 실린 좌담 기사 ‘한국전선에 종군하여’를 읽고 분노한 김소운이 ‘일본에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로 쓴 글이다. 그를 분노케 한 것은 그 좌담에 참석한 세 사람의 미국, 일본 기자들이 나눈 이야기 속에 담긴 한국에 대한 멸시와 조롱, 폄훼였다.

 

기탄없고, 솔직한 점으로 보아 그 이상 바랄 수 없으리만치 한국의 약점을 찌른 명담(名談)이요, 쾌변이었습니다. 도시니 촌락이니 할 것 없이 온통 구린내 천지란 이야기, 독가스는 없어도 구린내에 코가 떨어지지 않으려면 가스 마스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길거리에서 보는 거지며 부랑아들 이야기……,

 

“무슨 죄를 졌기에 이런 나라를 위해 전쟁까지 해주어야 하느냐?”, “소련을 응징하는 것이 이번 전쟁의 목적이라면 차라리 이런 나라는 소련에 주어 버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 아니냐?” 등등, 바로 한국인의 심장에 비수를 겨누는 언언구구(言言句句) 기고만장한 대경구(大警句)들이었습니다.

▲ 김소운의 <목근통신> (2006, 아롬미디어 )

내가 <목근통신>을 읽은 것은 스무 살 무렵이었다. 삼성그룹에서 펴낸 ‘삼성문화문고’ 시리즈였는데, 그 책은 단돈 100원에 살 수 있었다. 국한문 혼용에다 세로쓰기로 된 <목근통신>을 자전의 도움을 받아 읽으면서 나는 적지 않게 감동하였다.

 

목근통신은 20여 년 동안 일본에 산 작가가 13세 때부터 몸소 겪은 일본의 생리를 돌이켜보면서 한국을 이유 없이 멸시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와 항의를 차분한 편지 형식으로 짚은 글이다.

 

일본 지식인의 양식에 호소한 이 글은 일본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주선으로 <중앙공론(中央公論)>(1951.11.)에 번역, 소개되어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일본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받은 모멸과 학대에 항의하고, 일본인들의 허위와 약점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는 이 글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말미의 일절이었다. 그것은 편지의 이름을 ‘목근(무궁화)’라고 지은 쑥스러운 애상의 고백만큼이나 진정한 것이었다.

 

내 어머니는 ‘레프라(문둥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니를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습니다.

 

책 끝머리에 실린 저자소개를 읽어도 김소운이란 이름은 낯설기만 했다. 소월처럼 ‘흴 소(素)’자가 아니라 ‘집 소(巢)’자를 쓴 이름이 참 별나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교직에 들던 해, 국어 교과서에 실린 ‘가난한 날의 행복’이란 수필을 통해서였다.

 

목근통신의 진정성과 감동

 

“왕후의 밥, 걸인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관련 글 : 가난도 가난 나름, ‘가난을 다시 생각한다]

 

80년대는 소장 교사들을 중심으로 ‘삶을 위한 문학교육’이 모색되던 시기였다. 국어나 문학 교과서에 실린 글에 담긴 가식과 허위를 냉정하게 분석한 이 작업을 통해 김소운의 수필도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그의 수필에서 가난이 실존이 아니라 ‘장식’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냉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한 날의 행복’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내게 김소운은 한동안 <목근통신>이 안겨준 묵직한 감동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삶과 문학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 것은 2000년대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앞두고 벌어진 친일 논란 때문이었다.

 

김소운은 부산 출신이다. 본명은 교중(敎重)이었으나 광복 후에 소운(巢雲)으로 개명했다. 필명은 삼오당(三誤堂). 1919년 옥성보통학교 4년을 중퇴하고 1920년 일본으로 밀항, 동경 개성중학 야간부에 입학하였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3, 4년씩 체류했는데, 이때 일본에 한국문학을 번역 소개하는 일에 힘썼다. 1927년 <조선의 농민 가요>를 일본의 <지상낙원>지에 번역, 소개하면서 시작된 그의 한국문학 번역 작업은 민요·동요·동화·현대시·사화(史話) 등 여러 부분에 걸쳐 폭넓게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조선구전민요집>(1933)·<조선동요선>(1933), <조선민요집>(1941)과 일본어 번역시집으로 <유색(乳色)의 운(雲)>(1941), 한국의 시를 일문으로 번역한 <조선시집>(1943) 등을 들 수 있다.

▲일본 이와나미(岩波)서점에서 펴낸 김소운의 번역시집. <조선동요선>(1941), <조선시집>(1954)

이들 시집은 모두 한국문학을 일본에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히, 3년여의 편집과 번역 끝에 완수하여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 출판한 <한국현대문학선집>(전5권, 1976)은 이 한국문학의 일역이라는 그의 업적을 총결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국문학 소개에 진력한 삶

 

김소운은 일본의 고전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원어로 읽을 수 있을 만큼 일본어에 능했다. 당연히 일본의 만요(萬葉)나 바쇼(芭蕉)의 하이쿠(俳句) 따위에 대한 이해도 넓었다. 그것이 한국문학을 일본에 소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김소운의 친일은 1939년 10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참여를 전후하여 이루어졌다. 그의 친일 문학작품은 첫머리에 소개한 ‘청년들에게 지워진 짐’(<녹기>1939.9.)과 ‘야마모토 이소로쿠 원수 국장일’·‘재장(齋場)’(<매일신보>1943.6.5.) 등 추도시 두 편, 그리고 지원병에 나가는 학생들을 격려하는 ‘부조(父祖)의 오명을 일소’(<매일신보>1943.11.21.) 등 네 편이다.

 

감사의 눈!

연민의 눈!

불붙어 끓어오르는 비분의 눈!

히비야장장(日比谷葬場)에 겹겹이 둘러선 몇만 명의

북받쳐 오르는 상념을 담은 그 눈이여 눈이여

다마묘지(多磨墓地)에 신(神) 잠 드오시는 성장(聖將) 국장의 날

조총(弔銃)은 하늘에 메아리치고

1억 머리 숙이고 소리 죽이다

원수(元帥)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거대한 역사가 밝아오는 진두(陳頭)에

몸소 가르치신 귀하신 수범(垂範),

아 이토록 숭고한 죽음이 어디 있으리,

이토록 아름다운 죽음이 어디 있으리,

일개 병사의 영령조차 신으로 모시거늘

하물며 당신은 제독

연합함대 사령장관

 

수염 없으신 다사로운 얼굴에 싸인 강철의 의지

만 리의 파도를 차며 의연하셨던 영자(英恣)

지하 3척에 몸은 쉬일지라도

오늘부터는 해 떠오르는 나라의 수호신이옵신

원수 야마모토 이소로쿠

아아 이 이름!

1억 함께 복(服)을 입으며

지금 이 시간 새로운 결의를 가슴에 새기오리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 원수 국장일’(<매일신보>1943.6.8.)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의 반격에 거세지던 1943년 4월에 전사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대장의 국장을 노래한 이 시는 일본어로 발표되었다. 개전 1년 반에 미영 해군 병력의 과반을 태평양에 수장했다는 야마모토는 호국의 군신으로 일본이 숭앙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영결하는 각오를 노래한 이 시가 어떤 연유로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김소운이 자발적으로 쓴 글인지, 일제의 압박에 밀려서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인지는 본인만이 아는 일이다.

 

그는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아래 <사전>) 발간을 위해 발표한 예비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김소운은 <사전>에 등재된 다른 문인들에 비해 친일 작품의 편수가 적었다. 또 발표 시기가 강압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일제 강점기 말기에 몰려 있고 내용도 일제의 침략 정책을 적극 미화 찬양하지는 않았다. 또 친일단체 간부로 적극 활동하지 않아 경력이 적다는 점 등의 사유로 김소운의 <사전> 등재는 보류되었다.

▲ 김소운이 주도해 세운 이상화 시비(대구 달성공원)

해방 후, 그는 첫 수필집 <마이동풍첩(馬耳東風帖)>(1952)에 이어 <목근통신>(1952)·<삼오당 잡필>(1955) 등 8권의 수필집을 펴냈다. 또 그는 <은수삼십년(恩讐三十年)>(1954) 등 3권의 일문(日文)으로 된 수필집을 내기도 한 대표적 현대 수필가다.

 

1978년, 그동안의 수필을 총정리한 <김소운 수필전집>(전5권)을 간행하였다. 그의 수필은 인정에 감싸인 유려한 문체로 개인과 민족애에서 우러난 분노의 감정이 깃들어 있으며, 명상보다 성찰의 경향이 두드러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소운은 1952년 베네치아 국제예술가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귀국하던 중, 도쿄에서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입국 금지 조치를 당했다. 그는 13년 동안이나 입국이 거부되어 1965년에야 영구 귀국할 수 있었다.

 

평생에 걸쳐 이어온 한국문학의 번역 소개로 한국문화를 일본에 알리는 데 이바지한 공으로 그는 1980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번역 소개 작업에 대해서도 냉정한 평가도 없지 않다.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일제 강점기 말엽의 조선 작품의 일역 또는 일본 작품의 조선어역은 바로 내선의 문화교류 및 국어보급 문제에 직결되는 것”이라며 비록 친일 작품은 아니지만 “그 방조적 역할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친일 행적이 여느 친일 문인에 비해 두드러지게 적다고 해서 김소운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문화를 일본에 소개한 업적이 크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잘못이 상쇄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자랑스러운 조국의 문학을 지배국의 독자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 아래 번역했기 때문에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다”(임용택)는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

 

김소운은 1981년 11월에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세. 차녀 김윤(1953~2004)은 민청학련 사건의 홍일점으로 투옥되었다가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부인 김한림은 김윤 때문에 환갑이 지난 나이에 구속자 가족협의회(구가협) 초대 총무를 지내며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는 김소운의 딸 김윤과 부인 김한림 .

그의 ‘훼절’에 대한 안타까움

 

새삼스레 반세기도 전에 쓴 <목근통신>의 몇몇 구절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향토를 사랑했던 조선인 김소운의 훼절을 안타까워하기 때문이다. 거듭 읽어도 그의 글에 담긴 진정성은 달라 보이지 않는다.

 

(…) 전쟁 도발, 집단 학살에서만 일본의 죄악이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내가 어려서 자란 진해 군항에서 수비대의 일하사관(一下士官) 앞에 불손했다는 이유로 길 가던 양민 하나가 타살당한 것을 압니다.

 

이름 없는 촌부 한 사람이 일본에 한을 품고 죽었다고 하면 그것은 적은 일이므로 죄가 아니라 할 것입니까? 하물며 마을 하나가 아니요, 13도 방방곡곡이며, 하물며 어느 하루가 아니요, 반세기의 긴 세월에 걸쳐서입니다.

 

나라 없음으로 해서 억울하게 죽고, 혹은 그 생애를 진창에 파묻어버린 그런 내 동족들의 고발장을 만일에 일일이 수리했다고 한다면, 그 서류의 무더기는 일본의 의사당 하나를 다 비워서 충당해도 부족했을 것입니다.

 

(…) 1939년 11월호 <후진코론(婦人公論)>에 ‘보노 하나(박꽃)’란 수필 하나가 실려 있습니다. 향토에 대한 내 애정과 신앙을 고백한 글입니다.

 

“향토는 내 종교였다.” 거기 쓴 이 한마디 말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내 가슴에 지닐, 괴로우나 그러나 모면치 못할 십자가입니다.

 

문둥이의 조국!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어느 극락정토보다도 더 그리운 어머니의 품입니다.

 

- ‘목근통신’ 중에서

 

 

2015. 8.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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