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노천명, 여성 화자를 앞세운 친일시들

by 낮달2018 2021. 5. 16.
728x90

‘사슴’의  시인도 일제에 부역했다

▲ 노천명(1912~1957) ⓒ 동아일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시인 노천명(盧天命, 1912~1957)의 「사슴」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한 퀴즈 프로그램에서 유명 연예인이 과감히 ‘기린’이라고 답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었듯 목이 길기로는 기린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기린도 목이 길어서 슬픈가? 사슴이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 된 것은 한 시인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로운 삶’을 노래한 시에서 ‘사슴’은 곧 감정 이입의 기법으로 투영된 시인 노천명 자신이었다.

 

일제에 부역한 「사슴」의 시인

 

내가 우리 현대시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때 한림출판사에서 펴낸 『영원한 한국의 명시』를 통해서였다. 나는 집안을 굴러다니던 세로쓰기의 이 장정 본 시집으로 우리 현대시에 입문하였다. 이 시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시인이 노천명이다.

 

정작 그의 대표작인 「사슴」보다는 「고향」이라는 시가 더 살갑게 다가왔다. ‘아프리카에서 온 반마(斑馬)처럼’이라는 구절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 물론 시 자체에 대한 호오라기보다 시가 초등학생도 알아먹을 만큼 쉬웠기 때문이다.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서 온 반마(斑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 「고향」, 『인문평론』(1940년 6월호)

 

노천명은 황해도 장연 출신이다. 진명여학교를 나와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화여전 재학 중 『신동아』(1932)에 「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졸업 후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였으며, ‘극예술연구회’와 『시원(詩苑)』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첫 시집 『산호림(珊瑚林)』(1932)을 펴냈다.

▲ 노천명이 펴낸 시집들. 왼쪽부터 <산호림>(1932), 창변(1945), <별을 쳐다보며>(1956)

노천명이 친일에 참여한 것은 1940년대다. 1941년 7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호국신사(護國神社) 어조영지(御造營地) 근로봉사’에 참여한 이래 조선문인협회의 간사, 조선임전보국단 산하 부인대(婦人隊)의 간사로 일하면서 친일 활동을 벌였다. 1942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군복 수리 근로’에 참가하였고, 조선임전보국단에서 주최한 ‘저축 강조의 결전 대강연회’에서 연사로 활동하였고, 징병제 선전을 위해 조선문인협회가 주관한 순국영령방문단의 일원으로 경상남도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회에도 참여하였다.

 

부인근로대 작업장으로

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훌륭히 싸워 주 공을 세워 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山)만 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 「부인근로대」, 《매일신보》(1942년 3월 4일 자)

 

2차 대전이 점차 치열해져 가던 1940년대에는 남자들만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간 것이 아니었다.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를 통해서 금비녀를 헌납하고 군복 수리 등에 동원되었으며, 말기에는 여자정신대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노천명의 「부인근로대」는 군복 수리에 동원된 부인을 통해서 ‘총후(銃後)’의 각오를 노래한 것이었다.

 

·애국금차회 : 1937년에 금차(금비녀) 등 금제 장신구의 헌납과 군인 환송연·위문 등 ‘황군 원호’를 강화할 목적으로 총독부가 사주하여 조직한 친일 단체. 일제 수작자(受爵者)들과 친일 장교의 아내 등 상류층 부녀와 중 견 여류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어머니와 누이를 내세운 ‘친일시’들

▲ 노천명이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진혼가'(1942년 2월 28일 자)

노천명은 주로 여성(어머니 혹은 누이) 화자를 내세운 시를 통해 일제에 부역하였다. 그의 시에는 참전 군인들의 무운을 기원하거나 전몰 병사들을 추모하고 학병 출전을 권유하며, 일본군의 승전을 찬양하거나 후방의 여성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가다듬는 내용 등이 담겼던 것이다.

 

노천명은 시를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을 옹호하고 미화하였다. 시 「젊은이들에게」를 통해서는 일본의 선전포고 행위를 미화하였고, 「기원」을 통해서는 총후 여성의 정신 자세를 노래하였다. 「싱가폴 함락」에서는 일제의 승전을 해방으로 미화하였다. 특히 ‘동아 민족’의 침략자로 규정된 ‘영미(英米)’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늙은 영국을 대해서

저 혼혈아 아메리카를 향해서

제국(帝國)은 드디어 선전을 포고했다

정의를 위해 대동아 건설을 위해서

우리는 불수레를 달렸다

    - 「젊은이들에게」, 『삼천리』(1942년 1월호)

 

신사(神社)의 이른 아침

뜰엔 비질한 자욱 머리 빗은 듯 아직 새로운데

 

경건(敬虔)히 나와 손 모으며 기원하는 여인이 있다

일본의 전 아세아의 무운을 비는 청정한 아침이어라

어머니의 거룩한 정성

아내의 간절한 기원

아버지를 위한 갸륵한 마음들……

같은 이 시간 방방곡곡 신사가 있는 곳

아름다운 이런 정경이 빚어지고 있으리

    - 「기원」, 『조광』(1942년 2월호)

 

아세아의 세기적인 여명은 왔다

영미의 독아(毒牙)에서

    -「진혼가」, 《매일신보》(1942년 2월 28일 자)

 

일본군은 마침내 신가파(新嘉坡)를 뺏어 내고야 말았다

동양 침략의 근거지

온갖 죄악이 음모되는 불야의 성

싱가폴이 불의 세례를 받는

이 장엄한 최후의 저녁

싱가폴 구석구석의 작고 큰 사원(寺院)들아

너의 피를 빨아먹고 넘어지는 영미를 조상(弔喪)하는 만종(晩鐘)을 울려라

    - 「싱가폴 함락」, 《매일신보》(1942년 2월 19일 자)

 

추녀 끝 드높이 나부끼는

일장기ㅅ발도 유난히 선명한 이 낮

고운 처녀들아 꽃을 꺾어라

푸른 하늘에 흰 비둘기를 날려라

    - 「흰 비둘기를 날려라」, 《매일신보》(1942년 12월 8일 자)

 

「흰 비둘기를 날려라」는 일본군의 진주만 습격(1941) 1주년을 맞아 일본군의 명복을 비는 내용이다. 특히 진주만 폭격에서 숨진 일본군 의 충성 뒤에 뛰어난 ‘아홉 어머니’, ‘굳센 일본의 아내’가 숨어 있다는 점을 환기하기도 하였다.

문인들의 친일 행위를 들여다보면 일정한 시기를 지나면서 이들의 반민족적 일탈이 매우 위태위태하게 치달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을 본인이 얼마나 체감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자기 부정과 굴욕의 수사들 너머에 최소한의 민족적 정체성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다.

 

노천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친일에 대한 변명이나 해명도 따로 보이지 않으니, 일말의 갈등이나 번뇌조차도 상정해 볼 수 없다. 정말 그는 친일 부역, 그 반민족적 선택을 전폭적으로 수용했던 것일까. 노천명의 친일은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는 시기까지 일관되게 이루어졌다.

 

전쟁이 말기로 접어들면서 친일시의 내용도 일본군의 승리를 찬양하는 것에서 전쟁 동원 논리를 전파하는 것으로 변해 갔다.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전쟁터로 나갈 것을 선동한 시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 서」와 「출정하는 동생에게」 등이 있다.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쟁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더면 나도 사나이였더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매일신보》(1943년 8월 5일자)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조선인 징병제가 시행에 대한 찬양시.

노천명은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로 나가 전사한 조선인 청년 마쓰이(松井) 오장의 명복을 비는 추모시 「신익(神翼)–마쓰이 오장 영전에」(《매일신보》 1944년 12월 6일자)를 발표하고, 1944년 12월 《매일신보》의 대동아전쟁 3돌 기념 특집호에 「군신송(軍神頌)」을 싣는다. 병사들의 죽음을 ‘거룩한 역사’를 완성하기 위한 ‘아름다운 희생’으로 미화 한 시다.

 

이 아침에도 대일본 특공대는

남방 거친 파도 위에

혜성 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싸움하는 나라의 거리다운

네거리를 지나며

12월의 하늘을 우러러본다

어뢰를 안고 몸으로

적기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하늘가에 장미처럼 핀다

성좌처럼 솟는다

  - 「군신송(軍神頌)」, 《매일신보》(사진판, 1944년 12월) 106

 

전쟁 때 부역 혐의로 수감, 불우한 만년

 

1945년 2월에는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을 간행하면서 「흰 비둘기를 날려라」, 「진혼가」, 「출정하는 동생에게」, 「승전의 날」, 「병정」, 「천인침(千人針)」, 「학병」, 「창공에 빛나는」, 「아들의 편지」 등 9편의 친일시를 수록하였다. 이 시집은 해방 직후에도 친일시만 뺀 채 계속 출판되었다.

 

노천명의 친일은 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단상·논설·참관기 등을 통해서도 친일 행위를 계속하였다. 수필 「싸움하는 여성」에서 그는 총 후 여성으로서 생산 증대에 노력할 것을 주장하는 등 결연한 모습을 유감없이 연출한다.

 

대동아전쟁의 승패는 결국에 있어서 적국 여성들과 일본 여성의 근로의 투쟁에 있을 것입니다. ……유복자의 외아들을 전지로 바치는 늙은 어머니도 있습니다. 엊그제 혼인한 남편을 특별지원병으로 내보내는 젊은 아내도 있었습니다. ……여자정신대는 이때 우리 여성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길인 줄 압니다.

     - 「싸움하는 여성」, 『조광』(1944년 10월호)

 

친일에 눈먼 문인들이 시로, 수필로 전쟁을 찬미하고 젊은이들의 희생을 요구하였지만, 이미 대세는 꺾이고 일본은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바칠 외아들도 남편도 없었던 것이 노천명에게 있어 다행한 일이었을까.

 

해방이 되었지만, 시간은 여전히 노천명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남았고 북한군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서울 수복 후 노천명은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따라 20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문인들의 석방 운동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본인의 선택과 그 결과이긴 하지만, 노천명은 여느 친일 문인들과 달리 불운하였다. 그는 1957년 백혈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46세. 2001년 이후 한국시연구협회에서 노천명 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수필·평론 등 9개 부문에서 시상하고 있다.

 

시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제정한 것은 그의 문학을 기리고자 함일 터이다. 그러나 이 기림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동포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떠미는 데 쓰인 그의 친일 부역은 감춘 채 나머지 성취만을 선택적으로 비추고 있다. 굴절된 역사 속에 노천명은 여전히 ‘사슴’의 가련한 시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2019. 5.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