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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평사리엔 ‘최참판댁’ 말고 ‘박경리 문학관’도 있다

by 낮달2018 2021.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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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곳, 평사리에 가다

▲ 평사리의 박경리 문학관. 단층으로 기와 목구조다. 2016년 5월에 문을 열었지만, 붐비는 최참판댁에 비기면 한적하기 짝이 없다.

[이전 기사] 그냥 한번 와 봤는데… 진주 시민들이 진심 부럽습니다

피아골 단풍을 만난 뒤 진주로 가는 길에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들렀다. 알아듣기 좋게 ‘최참판댁’에 간다고 했지만, 박경리 문학관에 간다고 말해야 옳다. 문을 연 순서로 치면 문학관이 늦지만, 최참판댁은 실재하는 집안이 아니라 <토지>를 바탕으로 짜인 허구의 집이고, 그 작가가 박경리 선생이니 말이다.

평사리, 박경리의 거대 서사에 편입된 역사적 공간

그간 남도를 다녀오는 길에는 늘 평사리(平沙里)에 들르곤 했다. 경상도에서 남도를 오가는 길목에 하동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길목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평사리가 있어서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악양면의 한 동리에 불과하지만, 평사리는 작가 박경리(1926~2008)의 거대 서사에 호명되면서 이 땅의 근현대사 속으로 편입된 역사적 공간인 까닭이다.

원고지 4만여 장, 등장인물만 600여 명에 이르는 5부작 장편소설 <토지(土地)>는 1897년 한가위를 맞은 평사리의 모습을 그리며 대서사의 막을 올린다. 이후 반세기 동안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선과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국인의 장대한 삶의 파노라마를 다룬 이 대하소설은 1945년 8월 15일 최참판댁 별당에서 해방 소식을 들은 서희가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별당. 별당 주인 서희 어머니는 시동생과 사랑에 빠져 도주했고, 뒷날 서희는 여기서 해방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대하소설 <토지>는 1969년 1부를 쓰기 시작했을 때 마흔둘이었던 작가가 예순일곱이 된 1994년, 25년 만에 그 위대한 여정을 마치고 완간됐다. 한민족의 ‘원형’인 토지를 중심으로 교직(交織)한 이 위대한 서사는 한국 현대문학의 가장 뛰어난 성취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선생의 <토지>를 처음 읽은 것은 고교 시절, 형이 읽고 있던 <문학사상>에 연재 중인 제1부에서였다. 그때 토막글로 읽은 <토지>의 감동이 이후 한 부씩 출판될 때마다 이 책을 사 모은 힘이 되었다.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을 통해 내가 이해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쉼 없는 모색과 투쟁이었고, 한국인의 삶의 원형을 바라보는 이 위대한 작가의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이었다.

한국 현대문학의 위대한 성취, 네 번 완독한 <토지>

나는 <토지>를 통틀어 네 번쯤 완독했고, 부별로 읽은 것까지 포함하면 여섯 번쯤 읽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이해와 깨달음을 새록새록 되새기는 ‘다시 읽기’의 시간은 행복했다. 내가 토지의 주요 인물들의 계보를 막히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 정도가 된 것은 그 서사에 흔연히 이입하였기 때문이었다.

진주성 이야기에서 썼듯, 처음 평사리를 찾은 것은 1988년이다. 고교생 제자 둘을 데리고, 버스를 갈아타 가면서 평사리에 내리니 마을 앞에는 나지막한 농막 하나가 서 있을 뿐이었다. 거기 앉아 동네 사람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들은 <토지>도 박경리도 잘 몰랐고 나는 내 흥에 겨워 마을을 찾았다는 걸 눈치채고 평사리를 떠났었다.

내가 다시 평사리를 찾은 것은 2007년 1월, 아내와 보길도를 다녀오는 길에서였다. 이미 평사리는 ‘최참판댁’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나는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마을 사람들의 삶과 운명을 하나씩 복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마이뉴스>에 그 답사기를 썼다(관련 기사 : 평사리, 그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서다).

그리고 이태 전 10월에 이어 이번에 다시 평사리를 찾았으니 네 번째 방문이다. 2019년에 평사리를 찾았을 땐 2016년 5월에 문을 연 박경리 문학관을 반갑게 둘러보았었다. 해마다 수십만 명이 넘게 찾는 관광지가 되면서 최참판댁은 <토지>와 무관한, 거기 있음 직한 마을이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최참판댁. 오른쪽 끝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은 고방, 왼쪽은 하인들의 거처인 행랑채다 .
▲ 행랑채(솟을대문 오른쪽). <토지>는 최참판댁이 대표하는 양반, 그리고 하인, 소작인들 같은 다른 신분의 인물을 축으로 진행된다.
▲ 최참판댁 사랑채. 행랑채가 하인들 등 피지배계급의 거처라면, 사랑채는 상전들, 남자들의 공간이다.

허구에서 서사적 생명을 얻고 있는 최참판댁

비록 소설 문학을 바탕으로 하지만, 최참판댁이 소설과 무관한 서사적 생명력을 갖추는 걸 고까워할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문학이 창조한 허구가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사람들의 삶과 일상으로 녹아든 흔치 않은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사리와 최참판댁은 작가 박경리가 창조한 <토지>를 떠나서 생각하기 어렵다. 한 작가가 창조한 서사가 마을을 만들고, 거기 살았던 사람들의 운명과 삶을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하게 하는 ‘문학의 힘’을 부정할 순 없기 때문이다.

통영 출신으로 진주에서 여학교를 나와 서울과 원주에서 살았던 작가 박경리는 평사리를 자기 작품의 무대로 삼았다. 그는 한 번도 평사리를 찾지 않고도 거기서 전개된 파란 많은 삶과 사건을 세밀화처럼 그려냈다. 작가는 평사리와 간도의 이미지를 축소한 지도만 보고 완벽하게 이 마을과 간도를 그려냈는데 탈고 후 현지에 가보고 상상력과 현실이 닮은 부분이 많아 놀랐다고 했다.

생전에 작가는 평사리를 무대로 선택한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였다고 밝혔다. 무대는 만석지기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드넓은 평야가 있으며, 지리산이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가 뒷받침이 되는 곳이어야 했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쓸 토속적인 언어, 경상도 방언을 쓰고 싶어서 섬진강을 낀 경남의 끝자락, 평사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토지>를 완간한 지 7년 뒤에 평사리를 찾았고, 2004년 평사리문학관 개관식에서 최참판댁의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바라보며 자기 작품으로 말미암아 지리산이 훼손된 것 같아 가슴이 아프고, 지리산에 미안하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것은 생전의 인터뷰에서 한 “모든 생명을 거둬들이는 모신(母神)과도 같은 지리산의 포용력” 덕분에 글쓰기를 마칠 수 있었다는 회고와 이어지는 것이었다.

▲ 만추의 평사리를 배경으로 집필을 시작했던 사십 대 초반의 작가를 재현한 박경리 초상(이제)
▲ 권민호가 그린 토지 인물도. 앞줄 중앙의 정자관을 쓴 최치수 오른쪽이 최서희와 김길상이다.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봉순이.

 

▲ 박경리 문학관에는 작가의 유품 41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쓰던 재봉틀, 국어사전, 나무 문패, 필기구, 그릇, 소액자 등이다 .

문학관과 최참판댁, 혹은 서사의 생명력

박경리 문학관은 단층으로 된 기와 한식 목구조 건물이다. 기역 자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90도 비튼 형태인데, 세로 두 줄로 쓴 ‘박경리 문학관’ 현판이 인상적이었다. 문학관에는 선생의 유품 41점, 출판사가 발간한 소설 <토지> 전질, 초상화, 영상물, 소설 속 인물 지도 등을 전시했다.

유품은 육필 원고와 재봉틀과 국어사전, 책상, 원피스와 재킷 등 의류, 안경과 돋보기, 만년필과 볼펜 등 필기구와 주소를 돋을새김한 나무 문패 등이다. 전시관 오른쪽 벽에는 2년 전에는 없던 대형 부조가 걸렸다. 선생의 초상화를 판화로 제작한 김봉준 작가의 흙 부조 ‘흙으로 춤추다’이다.

그 밖에도 선생의 주요 문학작품 관련 자료, 평사리를 배경으로 한 사진, 이미지, 평사리 공간지도 등도 전시했다. 2년 전 전시에 비해 훨씬 깔끔해진 듯한데, 옛 전시 품목이 빠진 것 같지는 않았다. 토지가 연재되던 <현대문학>과 <문학사상> 같은 50년 전 낡은 잡지를 바라보면서 나는 최서희를 처음 만나던 내 고교 시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문학관 오른쪽 뜰에 조성한 박경리 선생의 동상이 멀리 평사리 들판을 비스듬히 바라보고 서 있다. 선생의 동상은 거대한 크기에 높다란 대에 올린 위압적인 규모가 아니라, 어깨동무를 할 수 있을 만큼 조그맣다. 유족의 뜻에 따라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만든 결과다.

뜰 아래 나란히 서서 우리도 평사리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바둑판처럼 정돈된 평사리 들판은 274만여 ㎡(약 83만 평). 여장부 윤 씨 부인이 최참판댁을 당대의 만석지기로 만든 기반이다. 이 동네가 <토지>의 무대로 낙점받은 이유로 그것은 충분해 보였다.

▲ 박경리 동상은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할 수 있을 만큼 낮고 조그맣다. 답사객의 눈높이를 고려한 유족의 뜻을 반영했다고 한다.
▲ 문학관에서 내려다본 평사리 들판. 바둑판처럼 정돈된 274만여 ㎡(약 83만 평). 이 들판 때문에 평사리가 <토지>의 무대가 될 수 있었다.

문학관은 마을 가장자리라,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를 읽은 이들이 주로 이곳을 찾는다. 젊은 여성 몇이 작가의 동상 주변에서 사진을 찍는데, 이들은 가슴에 <토지>를 1권씩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건 최참판댁이 단순 관광지가 아니라, 한 작가의 소설에서 비롯한 서사를 재현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최참판댁 문전에 붐비는 관광객에게 그 집이 박경리의 소설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의 펜 끝에서 태어났지만, 이 만석지기의 저택은 집의 곳곳에 묻은 손때와 함께 원전으로부터 서사의 생명력을 하나씩 얻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작가와 무관하게 최참판댁을 찾아, 집을 둘러보고 그 일가를 비롯하여 평사리 소작인들의 삶과 운명을 귀담아듣고 그걸 이 마을의 이야기로 알고 떠난다 한들 어떠하랴.

작가의 손을 떠나면서 그가 창조한 허구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 숙성되면서 새록새록 새로운 이야기의 자양으로 자라나도 좋은 것을. 그게 ‘이야기의 운명’이라는 걸 13년 전에 통영 미륵도에 잠든 박경리 선생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2021. 11. 10. 낮달

 

평사리엔 '최참판댁' 말고 '박경리 문학관'도 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곳, 평사리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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