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당 대표의 ‘격양가’ 타령에 부쳐
격양가(擊壤歌)는 오래된 중국의 노래다. 이는 풍년이 들어 오곡이 풍성하고 민심이 후한 태평 시대를 비유하는 뜻으로 흔히 쓰인다.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린 지 50년이 되었을 때 그는 백성들의 삶을 확인하고자 변복하고 저잣거리로 나섰다.
한 노인이 길가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한 손으로는 배를 두들기고 또 한 손으로는 땅바닥을 치며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일출이작(日出而作) 해가 뜨면 일하고
일입이식(日入而息) 해가 지면 쉬고
착정이음(鑿井而飮) 우물 파서 마시고
경전이식(耕田而食) 밭을 갈아먹으니
제력우아하유재(帝力于我何有哉)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랴
이 노래의 요체는 ‘정치의 고마움’을 알게 하는 정치보다는 그것을 전혀 느끼기조차 못하게 하는 정치가 진실로 위대한 정치라는 것이다. 이 노래가 ‘격양가’다. ‘격양’이란 원래 나무를 깎아 만든 ‘양(壤)’이라는 악기를 친다는 뜻과, 땅[壤]을 친다는 뜻이 있다.
이 노래를 들은 요임금이 크게 기꺼워하였음은 물으나 마나다. 노래한 노인이 했다는 ‘한 손으로는 배를 두들기고 또 한 손으로는 땅바닥을 치’는 행위가 곧 ‘함포고복(含哺鼓腹)’이다. 이는 장자가 다스림의 최고 경지라 한 것으로 ‘백성들이 먹을 것이 풍족하여 아무런 걱정 없이 즐겁게 지내고 있음’을 뜻한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데 뜬금없이 ‘격양가’를 들먹이는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한나라당이 미디어법 강행처리를 지축하는 가운데, 박희태 대표가 미디어법 처리를 가리켜 ‘우리의 돌파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면서 ‘격양가’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정확히 박 대표는 “MB 서민 정책 덕에 우리도 이제 발 뻗고 자게 됐다는 ‘격양가(擊壤歌)’를 부를 수 있는 사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했다고 한다. 문맥으로 보면 ‘격양가’는 현재형이 아니라 미래형이긴 하다. 그러나 그 속내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인식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박 대표는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미디어법 처리에 대해 “만나는 사람마다 기분 좋은 말을 많이 한다. ‘수고했다. 시원하다. 계속 좀 밟아 달라’는 말을 한다. 오죽 가슴에 맺혔던 게 있어서 그런 말을 했을까 싶다.”고 했다. 또 수도권 등에서 전통적 지지에 흔들림이 없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국민들이 뭐라고 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미디어법의 강행처리 이후, 여론에 나타난 민심은 만만찮다. <한겨레>의 여론조사에 나타난 결과는 침묵하고 있지만 국민은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음을 시사한다. 미디어법 처리 갈등이 한나라당의 책임이라고 본 응답자가 80%, 방송법 내용에 대해서도 전체 응답자의 66.8%가 반대했고, 응답자의 73.7%가 미디어법 통과에 문제가 있다고 답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당이 터뜨린 자축의 샴페인은 후안무치를 떠나 너무 일러 보인다. 이미 그들은 새 미디어법을 통해 보장될 장기 집권의 환상에 포획된 것일까. 머지않아 도래할 유토피아에 대한 흥분으로 그들은 현 시국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거기, 그러나 국민은 없다
당연하다. ‘수고했다. 시원하다. 계속 좀 밟아 달라’고 요구하는 이들은 분명 있다. 그들은 노무현 탄핵에 환호했고, 행정수도법의 위헌판결에 박수를 보냈고, MB정부의 감세정책에 즐거이 화답했다. 그러나 미디어법 날치기 처리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시대가 왔다고 환호하는 무리 중에 서민 대중은 없다.
거기엔 목숨을 잃은 지 반년이 넘도록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 아니 지금도 서울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재개발 지역의 세입자들도 없다. ‘해고는 살인’이라며 공장에서 두 달이 넘게 파업 농성하다가 기어이 물과 가스, 음식물마저 끊긴 상태에서 싸우고 있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도 없다.
거기엔 850만 비정규직 노동자도 없고, 한미 FTA와 한EU FTA 등 개방농정에 반대하며 절망의 시간을 삭이고 있는 농민들도 없다. 무료급식으로 상처받는 결식아동들도, 비교육적 일제고사에 반대하다 학교에서 쫓겨난 교사도, 시국선언으로 검찰에 고발당하고 중징계 위협을 당하고 있는 교사도 거기엔 없다.
거기에는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는 언론노동자들, ‘PD수첩’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MBC의 PD들도, 여전히 싸우고 있는 YTN 노동조합의 기자들도 없다. 시국선언으로 지식인의 소명에 응답한 대학교수들, 문인들, 연극인들, 예술인들도 거기에는 물론 없다.
거기에는 1%를 위해 봉사하는 한나라당, 그리고 그들과의 권언유착을 통해 제4부의 권력으로 떠오르고 있는 조중동 등 거대 보수 언론과 방송 진출을 보장받은 재벌 대기업만이 있을 뿐이다. 22조 원의 혈세를 퍼붓는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호황을 맞은 토목건설 자본이, 감세로 더 행복해진 강남의 부자들과 부동산 보유자들, 도래하는 사교육 천국을 맞아 일취월장하는 사교육업체들이 있다.
이들이 앞다투어 부르는 격양가가 멀지 않다고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굳이 미래형‘’으로 말한 것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겸양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아침 신문에서 조중동이 지은 의제에 흠씬 녹은 국민들은 저녁 뉴스에서도 그 사촌 형제들의 비슷한 목소리로 한 시대를 가늠하게 될지도 모른다.
국민을 오도한 MBC 같은 ‘나쁜 방송’을 퇴출하고 온 국민을 위무할 상업방송과 집권당에 대한 비판과 견제 기능을 상실한 관제 공영방송으로 이룩할 새 세상은 얼마나 찬란한가. 그들이 부르는 ‘격양가’는 기름지고 우렁차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 사회가 마땅히 지녀야 할 상식과 공동체의 윤리,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포함하는 정의와 진실 따위의 덕목은 없다. 그것은 그들만의 격양가를 구성하는 데는 달리 필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성채가 아무리 강고할지라도 그 결핍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의 결핍이 그들의 성채를 사상누각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이기 때문이다.
2009. 7. 27. 낮달
* 2009년 한나라당이 강행 처리한 미디어법은 ‘방송법, 신문법, IPTV법으로 이루어진 미디어 활성화를 위한 법안들’을 가리킨다. 대기업과 신문사의 방송사 지분 참여 허용, 종합편성 PP신규 허가, 보도전문채널 허가 등을 골자로 한 이 법에 따라 지금의 ‘종합편성채널(종편)’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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