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징용 사과 보상’에서 한국을 배제한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아래 시민모임)이 일본의 전범기업 미쓰비시(三菱)의 ‘한국인 징용 사과 배제’에 항의하여 다시 미쓰비시 제품 불매운동을 펴기로 했다고 한다. [시민모임 바로가기]
미쓰비시, ‘강제 징용 사과 보상’ 한국 배제
이는 미쓰비시가 외국인 강제 징용과 관련해 미국·중국 등에는 사과와 보상을 약속하면서 유독 한국인 징용자에 대해서는 사과와 보상이 어렵다고 하는 데 따른 것이다. 미쓰비시 머티리얼(Mitsubishi Materials: 미쓰비시금속광업의 후신)은 지난 20일 미국에서 미국인 강제노역 피해자를 만나 사과했다.
24일에는 중국인 강제노역 피해자 3,765명에게 1인당 10만 위안(약 1870만 원) 등 총 700여억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일본 대기업이 중국 강제노역 피해자에게 사과와 보상금을 주기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피해 보상자도 최다 인원이다.
미쓰비시는 이후로도 영국, 네덜란드, 호주 등 다른 국가 피해자들에게도 사과할 뜻을 밝혀 앞으로도 사과는 이어질 전망이다. 일본의 이번 사과는 아베 신조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를 앞두고 과거사 부정 등으로 나빠진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미쓰비시가 한국인 징용자에게 사과와 보상을 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일본의 강제 합병에 따라 당시 조선인은 법적으로 일본 국민이었기 때문에 강제 징용 사례에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인 강제 징용 피해자는 중국인 피해자의 30배가 넘는 총 10만8천여 명에 이른다.
미쓰비시 머티리얼은 또 현재 한국인 피해자들은 미쓰비시중공업과 소송 중이므로 다른 나라 피해자와는 법적인 상황이 다르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1940년대 일본 군수업체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피해자들은 업체의 후신인 일본 기업 신일철주금(구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1·2심에서 패소했으나, 대법원은 이를 뒤집고 배상 취지로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 2013년 서울고등법원과 부산고등법원은 피고 기업들에 위자료 지급을 명령했지만, 피고 기업들이 불복해 대법원에서 재상고심이 진행 중이다.
대법원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최종 배상 판결이 나고, 정부가 관련 일본기업들의 국내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에 나서면 이는 한일 간 전면적인 외교 갈등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정부가 강제 징용 배상 문제에 관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민모임, 미쓰비시 불매 범국민 선언 운동 재개
정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 동원되어 노역을 제공했던 모든 희생자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본다.”는 원론적 입장을 보였다. 정부가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 피력을 할 수 없는 것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관련한 소송이 현재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제 징용 청구권 문제와 관련한 정부의 입장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취지를 지금까지 견지해 왔다. 그러나 2012년 대법원이 한일협정으로 ‘개인 청구권까지 소멸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판결한 뒤에는 구체적 입장 표명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시민모임은 27일 “일본 미쓰비시그룹에 소속된 기업들이 생산하는 모든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다시 펼치기로 하고 시민단체들과 연대를 추진 중”이라고 한다.
미쓰비시그룹 소속 기업에서 생산된 제품은 국내에서도 꽤 많이 팔린다. 대표적 제품은 니콘주식회사에서 만든 카메라다. 1917년에 창업된 이 회사는 1930년대 2차대전 때 정부 명령에 따라 일본군 최대의 광학기기 납품업체가 되었다.
전쟁 말기에는 총 23,000명의 노동자가 군수물자를 위한 쌍안경, 렌즈, 폭탄 지시계창, 조준경 등을 만들어서 납품했다. 국내 생활 사진가들이 휴대하는 일본산 DSLR 카메라는 캐논이 아니면 니콘이니 그 점유율을 따로 말할 것도 없다. 카메라에는 렌즈가 필수이니 렌즈의 판매량도 무시할 수 없다.
국산 맥주의 맛이 없다며 수입 맥주가 늘어나면서 들어온 일본 맥주 가운데 기린(麒麟) 맥주도 미쓰비시 계열사다. 국내 예초기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해 온 예초기에도 미쓰비시 제품이 있으며, 63빌딩이나 현대자동차 사옥 등에서 가동 중인 엘리베이터도 미쓰비시 제품이다.
2009 불매운동은 자동차 철수로 이어져
미쓰비시 불매운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9년 10월부터 광주 시민들의 자발적 1인 시위로 시작된 첫 불매운동은 국내 수요 부진과 부정적 여론 확산과 겹치면서 미쓰비시 자동차의 철수를 끌어냈었다.
불매운동에 이은 ‘후생 연금 99엔 지급 사건’(2009년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게 일본이 후생 연금 탈퇴수당 ‘99엔’을 지급한 일)이 터지면서 분노한 여론에 밀려 미쓰비시 자동차는 결국 2012년에 광주 전시장을 접었고 이듬해 6월 국내 영업을 중단한 것이었다,
당시 시민모임은 성명을 내고 “반성 없는 일본 전범 기업 제품이 외면받는 것은 사필귀정”이라며 “역사의 심판에는 결코 시효가 없다”고 비판했었다.
미쓰비시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뿐만 아니라,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일본의 산업시설 가운데, 나가사키(長崎) 조선소와 ‘군함도’라고 불린 하시마에서도 조선인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한 기업이다.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만 약 6천여 명이, 하시마 해저탄광에서도 500~800명 조선인들이 노역에 투입되었다고 추정된다.[아래 관련 글 참조]
시민모임은 누리집으로 운영하고 있는 다음 카페에 “제1의 전범 기업 미쓰비시 불매 범국민 선언 운동” 관련 서명 용지 양식을 올리고 서명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 미쓰비시(三菱) 나가사키(長崎) 조선소와 전함 무사시
미쓰비시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 확대와 함께 성장한 대표적인 독점 재벌이다. 그 유착은 ‘미쓰비시가 있는 곳에 전쟁이 있다’는 말이 낳았을 정도다. 미쓰비시의 광업과 중공업은 전쟁 수행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지속하는 동안 미쓰비시 조선소에서는 군함 82척과 어뢰 1만 7천 개가 생산되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전함의 자랑’ 무사시(武藏)를 비롯해 진주만 기습에 사용된 어뢰도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나가사키는 전쟁의 주동력이었던 미쓰비시 군수산업의 요람이었다.
미쓰비시 계열 탄광에는 일찍부터 식민지 저임금의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전쟁의 확대와 함께 미쓰비시는 각지에서 자원을 수탈해 현지 민중을 혹사했다.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만 약 6,0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 연행되어 노예노동을 강요당했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도 많은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현장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이 얼마나 희생되었는지 그 숫자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 미쓰비시는 여전히 조사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전체 피폭자의 10%가 조선인 희생자였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메이지 시대부터 원폭 투하가 이루어지던 날(1945. 8. 9.)까지 나가사키는 무기 생산의 도시였다. 원폭 투하 6일 후인 8월 15일 일본 제국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지금도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서는 해상자위대의 이지스함이 건조 중이다.
일본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세계 최고의 전함 무사시’를 건조한 나가사키 조선소의 일부 시설을 등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조선소 시설을 등재하여 일본은 전함 무사시를 건조한 1938년, ‘욱일승천(旭日昇天)’하던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 지옥섬, 하시마(端島) 해저 탄광
나가사키 항구에서 약 23km 떨어져 있는 섬, 군함처럼 생겨 일명 ‘군함도’라고 불린 하시마는 섬 전체가 탄광으로, 바닷속 곳곳으로 갱도를 파내어 수백 미터씩 내려간 해저 탄광이다. 1890년, 하시마 옆에 있던 다카시마(高島) 탄광을 운영하던 미쓰비시가 이곳을 인수해 확장했다.
이 작은 섬에 무려 5,300명이나 되는 인구가 거주하였다. 1916년에 건립된 콘크리트 아파트에는 일본인 광부와 직원이 살았고, 쇠창살이 쳐진 허름한 건물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수용되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10m 높이의 탑도 있었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작업장이었다. 육지와 철저하게 고립된 이 섬에서 징용자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잔인한 폭력 속에 사투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들에게 하시마가 ‘지옥의 섬’으로 통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해저 탄광은 막장 바닥에 물이 차 습기가 많아서 작업이 매우 힘들다. 규슈 지역 탄광은 막장 높이가 아주 낮아 거의 눕다시피 해 탄을 파야 했다. 하루 10시간 이상을 이런 자세로 탄을 파야 했던 노무자들의 고통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43년에서 45년 사이 500~800명의 조선인이 하시마 탄광에 있었다고 추정되고 화장(火葬) 관련 문서로 확인된 사망자만 50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일본 정부도 기업도 하시마에 동원된 조선인이 몇 명인지, 몇 명이나 사망했는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화장 관련 자료에 따르면 하시마 탄광 사망자 가운데 사고사가 절반을 넘으며, 나머지 사망원인은 질식, 외상, 압사, 익사, 변사 등이다.
일부 생존자는 “너무 힘들어 섬을 나가려고 신체 절단까지 생각했다”라고 증언했다.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하시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시내 복구 작업에 투입되어 피폭 피해까지 보아야 했다.
- [관련 글 : 조선인 강제노동에 대한 대법원 배상 판결과 ‘메이지(明治)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015. 7.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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