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훈격 승급 결정에 부쳐
정부는 어제(26일) 유관순 열사의 독립 유공 훈격을 '독립장'(3등급)에서 '대한민국장'(1등급)으로 높이기로 했다고 한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이 공정하지 않아 '3·1운동의 상징 운동가'로서 그의 공적이 저평가되었다는 여론을 반영한 것이다.
서훈의 승급은 2008년 대한민국장으로 승격된 여운형 선생에 이어 두 번째라고 한다. 2005년에 여운형 선생이 추서 받은 건국 공로 훈장은 2등급의 대통령장이었다. 2008년 2월 21일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직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이 서훈의 승급이 행정적으로 처리되지 않은 듯하다. 국가보훈처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확인해 보면 여전히 여운형은 2005년 대통령장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장 서훈통계에서도 그가 포함되지 않은 듯 30명으로 게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 서훈 제도는 1949년 4월 '건국공로훈장령'이 공포되면서부터 시작됐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1962년부터 본격적인 서훈을 시행했다. 1965년 한일협정 조인 뒤에는 서훈이 더 자주 이루어졌다. 서훈을 관장하는 원호처(국가보훈처)가 설립된 것도 그 이후다.
이승만 정부 집권 동안 1953년 장제스(蔣介石)에게 수여한 것을 빼면, 1급 대한민국장의 서훈은 이승만(1875~1965)과 초대 부통령 이시영에게만 주어졌다. 이른바 '셀프 서훈'이다. 박정희가 서훈을 확대해 나간 것은 군사정권이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으로 서훈을 시행한 것이었다. (참고 기사 : 유관순 열사의 서훈)
성재 이시영(1869~1953)은 초대 부통령으로 이승만에 이어 대한민국장을 받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여 1951년 5월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했다. 동시에 국정 혼란과 사회 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고 이승만 정부를 떠났다. 그도 오랜 기간 임정의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이승만과 이시영은 임시정부 공적으로 서훈을 받았는데, 사실상 임정을 상징한 마지막 주석 김구와 안창호·김창숙·신익희 등의 임정 인사들이 이 공적으로 대한민국장을 받은 것은 1962년 박정희 집권 때였다. 조소앙·김규식이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은 것은 1989년이다.
1962년에는 임정 인사 4명을 포함하여 모두 18명이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의병 공적으로 허위·이강년·최익현, 의열 투쟁으로 안중근·윤봉길·강우규, 을사늑약 뒤 순절한 조병세·민영환,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한 김좌진·오동진, 헤이그밀사 이준, 3·1운동의 손병희·이승훈·한용운 등이다.
백범 김구(1876~1949)나 도산 안창호(1878~1938)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심산 김창숙(1879~1962)은 일찍이 1·2차 유림단 의거를 주도하고 망명하여 임정 의정원 부의장을 지낸 이다. 감옥에서 복역하다 옥중투쟁과 일본 경찰의 고문에 의해 두 다리가 마비되기도 했으나 한 번도 뜻을 굽히지 않은 열혈 독립운동가다. (관련 기사 : 혼자 된 며느리에게 담배 가르친 시아버지)
해공 신익희(1894~1956)는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과 대결하려다 급서한 정치인으로 더 많이 떠오르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도 26년 동안 망명 생활 가운데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회의장 등을 역임하고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기초한 독립운동가다.
소앙 조용은(1887~1958)은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정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다. 임정 수립에 참여하여 민주 공화제 헌법의 기초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국체와 정체의 이론을 정립하고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 독자적 이념체계인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제창한 정치사상가다.
우사 김규식(1881~1950)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임정 대표 명의의 탄원서를 제출하고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해방 후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에 반대하고, 김구와 연합하여 남북협상을 벌여 실패했으나 그는 남북 모두가 존경한 독립운동가였다. (관련 기사 : “우리는 우리 장단에 춤추자” 남북 모두가 존경한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장을 받은 3분의 의병장도 널리 알리진 이들이다. 면암 최익현(1834~1907)은 병자수호조약과 을사늑약 이후 이들 조약을 결사반대한 위정척사 운동의 선봉이었다. 운동이 무력적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한 뒤에 전라도 태인에서 거의(擧義)한 뒤 적지 대마도의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왕산 허위(1854~1908)와 운강 이강년(1858~1908)은 1907년 항일의병부대 십삼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 진동(鎭東:경기·황해) 창의대장과 호서(湖西) 창의대장으로 함께 싸운 의병장이다. 이들은 서울 진격이 실패한 뒤 일제에 잡혀 1908년 서대문감옥에서 8일 간격으로 각각 처형 순국했다. (관련 글 : 1908년 오늘-경성감옥에서 이강년, 허위 선생 순국하다)
의열 투쟁 공적의 안중근(1879~1910)은 1909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고, 윤봉길(1908~1932)은 1932년 상하이 훙커우공원 투탄 의거, 강우규(1855~1920)는 1919년 9월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에게 수류탄 투척한 의거의 주인공이었다. (관련 기사 : 두 아들에게 남긴 윤봉길의 편지...북받침을 어찌하랴)
김좌진(1889~1930)은 독립군의 3대 대첩의 하나인 청산리 대첩의 주역, 북로군정서 사령관을 지낸 독립군 지휘관이다. 다소 낯선 이름인 오동진(1889~1944)은 1920년 광복군총영(總營)을 결성, 총영장(總營長)으로 항일전투를 전개했고, 1925년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고, 군사부위원장으로 독립군을 지휘하여 국경지방의 일본경찰관서를 습격, 파괴하다 붙잡혀 감옥에서 순국한 이다. (관련 글 : 1930년 오늘 - 청산리의 김좌진, 흉탄에 스러지다)
을사늑약 체결 뒤 순절한 조병세(1827~1905)·민영환(1861~1905)도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상소하여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 국권 회복을 요구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민영환은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조병세도 유서 등 3통을 남기고 음독 자결해 그를 뒤따랐다.
고종의 밀사로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했다가 분사한 이준(1859~1907) 열사도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거족적 항일운동으로 승화한 3·1운동의 민족대표 손병희·이승훈·한용운도 1급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손병희(1861~1922)는 천도교측의 대표로 3·1운동의 주역으로 참가, 실질적인 33인 대표 중의 대표 역할을 했다. 오산학교 교장과 동아일보사 사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승훈(1864~1930)은 기독교 대표였고,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한 만해 한용운(1879~1944)은 불교 대표다.
교육과 언론 공적으로 서훈(1970)받은 고당 조만식(1883~1950)은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했다.
서재필(1864~1951)은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1884)에 참여한 개화 인사다. 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사가 되었고, 갑오개혁 뒤에 고국에 돌아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는 창립 후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이바지한 공로로 1977년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1976년에 대한민국장을 받은 임병직(1893~1976)은 낯설다. 미국 유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어 일제의 한국 강점을 폭로하면서 세계에 독립지원을 호소하였다. 1919년 이승만·서재필 등과 같이 필라델피아에서 재미한인대회를 열어 독립투쟁의 방향을 모색하였고 임정 구미(歐美)위원회서 비서로 이승만을 도왔다.
대한민국장을 수훈한 이는 2019년 2월 현재 전체 독립유공자 15,178명 가운데 30명밖에 안 된다. 비율로 따지만 0.2%에 채 미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 5명의 중국인이 포함되어 있다.
중국 신해혁명의 주역인 쑨원(孫文,1866~1925)과 천치메이(陳其美, 1878~1916), 중화민국(대만) 총통 장제스(蔣介石, 1887~1975), 그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 1927~1975), 중국 국민당 출신의 군인·정치가 천궈푸(陳果夫, 1892~1951) 등인데, 이들은 한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로로 최고 등급의 훈장을 받았다.
2008년에 훈격이 승급했다는 여운형 선생과 이번 국무회의 의결로 승급이 결정된 유관순 열사를 더하면 이제 대한민국장 수훈자는 모두 32명이 된다. 그러나 다분히 주관적인 평가겠지만 실제로 수훈자 모두가 1급 훈장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2등급이 대통령장인데, 여운형을 포함해 모두 93인이다(<위키백과> 명단.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는 명단 없이 통계만 92명임). 일송 김동삼, 남자현, 신돌석, 이봉창, 지청천, 유인석, 홍범도 같은 분들이 대통령장 수훈자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이 훈격을 가르는 잣대가 무엇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공훈심사위원회가 공정하게 심사하였다 하여도 친일파가 서훈을 받은 예처럼 과대평가되어 공적 이상의 서훈을 받은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3등급인 독립장을 수훈한 이로는 김마리아, 윤동주, 이육사, 우당 이회영, 제암리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린 스코필드 박사 등이 있는데, 이들의 공로를 대통령장과 대한민국장 수훈자와 비기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3·1운동 100돌을 맞으며, 상징적 조치로 유관순 열사의 훈격을 격상하는 게 크게 무리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현 서훈이 미흡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면 문제는 좀 복잡해지지 않겠는가. '서훈의 기준은 공적에 대한 학술적 평가'라야 한다는 주장을 새삼 되새겨보는 이유다.
2019. 2.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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