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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심산 김창숙 - 혼자 된 며느리에게 담배 가르친 시아버지

by 낮달2018 2019.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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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경북 성주와 봉화로 떠난 ‘심산(心山) 역사기행’

▲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 병상의 선생에게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찾아왔지만, 심산은 끝내 그를 외면하고 돌리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 (5월 10일)은 이 땅의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의 57주기다. 선생의 기일을 알리면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이 고문께서 보내주신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비타협·불복종의 행동주의자’ 심산 김창숙 선생을 다시 생각한다.

▲ 유도교도원 제 1 회 입학 기념 촬영 ( 성균관 명륜당 , 1949.3.8.). 앞줄 가운데 백범 오른편이 김창숙 선생이다 .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베푸는 ‘심산 역사 탐방’의 답사단이 심산 생가인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마을에 도착한 것은 지난 5월 30일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였다. 나는 이른 점심을 챙겨 먹고 정오 전에 일찌감치 사도실에 들어와 있었다.

 

심산은 경북 성주가 낳은 독립투사다. 대가에 그의 생가가, 읍내에 심산기념관이 있지만, 사람들은 무심히 그를 숱한 독립지사 가운데 한 분이라고 여기고 만다. 그러나 심산은 역사평론가 이덕일이 “그가 없었다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한 열혈 독립운동가였다.

 

“그때에 왜정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
   - 김창숙, “벽옹(躄翁) 73년 회상기” 중에서

 

경술국치(1910)를 당했을 때 매천(梅泉) 황현은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도 어렵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봉건적인 충(忠)을 지키고자 한 게 아니라 ‘글을 아는 자’, 즉 ‘선비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이 지적한 것처럼 나라가 망하고 나서도 선비로서의 양심은커녕 국망(國亡)에 무심하고 세속의 이욕만을 좇던 양반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고 그 선비들이 일생을 바쳐 천착한 성리학이 나라의 지배적 사상이었는데도 그랬다.

 

‘을사오적 참형소(斬刑疏)’로 시작된 독립투쟁의 길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받은 한국인 76명은 모두 양반 유학자들이었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이완용·송병준 등과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 순종의 장인 윤택영, 명성황후의 동생 민영린 등이 귀족 작위를 받았다. 이때 일제가 이들 지배층에 내려준 은사금(恩賜金)은 1700여만 원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이 가까워져 오는 1919년,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 등이었다. 정작 거기 유림 인사는 한 명도 없었다. 이 선언에 참여하지 못한 심산은 유교 대표가 한 명도 없음을 보고 통탄해 마지않았다.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이번 독립운동에 참여치 않았으니 세상에서 고루하고 썩은 유교라고 매도할 때에 어찌 그 부끄러움을 견디겠는가?”

▲ 동강 김우옹을 모시다가 고종 때 훼철된 후 , 1992 년 복원된 청천서원 . 현판은 백범 김구의 글씨다 .

심산의 독립운동은 일찍이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스승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이완용 등 오적을 참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그의 독립운동은 낡은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척사위정(斥邪衛正)’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1945년 8월 초순 건국동맹 결성 사실이 드러나 일경에 체포되어 수감될 때까지 그는 오직 독립투쟁 한길을 갔다.

 

심산은 영남의 문벌 사족인 의성김씨, 조선조 중엽의 명현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13대 종손으로 태어났다. 재주가 남달랐으나 성품이 얽매이기를 싫어하여, 열서너 살이 되어 비로소 사서(四書)를 읽었다. 부친이 유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대계 이승희(李承熙, 1847∼1916)에게 교육을 부탁했으나 성리학설을 싫어하여 문하에 들지 못하였을 정도였다.

 

그가 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1896년 부친상 후부터다. 당시 열여덟 심산은 이승희(성주)·곽종석(경남 산청)·장석영(경북 칠곡) 등 원근의 유학자들 문하를 두루 찾아 경서에 관해 물었는데 특히 이승희를 각별히 따랐다. 당시 명문가 출신으로 일제하에서도 안일한 삶을 누리고 있던 양반 지주들이 많았지만, 심산은 이때부터 구국 활동에 몸을 던져 간난과 형극을 길을 걷게 된다.

 

“사직은 중하고 임금은 가볍다

 

1905년 ‘을사오적 처단 상소’ 이후 심산은 매국 단체 일진회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역적을 치지 않는 사람 또한 역적이다’라는 격문을 돌리고 동지를 규합하여 중추원과 일간지에 이들에 대한 성토문을 보냈다. 이 일로 체포되어 일본 헌병 성주분견소에서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때, 분견소장과 나눈 일문일답은 그가 수구적 충군(忠君) 의식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보여준다. “황제가 합방을 허가한다면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하고 묻는 헌병에게 심산은 “황제가 역신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고 설령 허가하더라도 어지러운 명령이니 따르지 않겠다”고 답한다.

 

헌병이 ‘황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역(逆)’이라고 하자, 심산은 “사직은 중하고 임금은 가벼운데 난명(亂命)에 따르지 않음이 충이다”라고 답한다. 이는 그의 의식이 이미 ‘국가’와 ‘정부’를 구별하고 국가 수호를 위해서는 정부의 통치도 거역할 수 있다는 데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심산이 태어난 사도실 마을 입구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답사단을 기다리는 동안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마을 어귀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생가가, 오른쪽 길섶 동강의 불천위(不遷位) 사당과 어깨를 맞댄 고가가 있다. 심산이 1910년에 연 성명학교(星明學校)다.

 

성명학교는 동향으로 배치된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집이다. 고종 때 청천서원이 훼철되자 심산의 부친 김호림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청천서당(晴川書堂)으로 중건했고, 심산이 여기에 성명학교를 연 것이다. 심산은 ‘김창숙이 나고 청천이 망하고 말았다’는 완고한 유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교를 강행했다.

▲ 성명학교는 청천서원이 훼철되자 김호림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중건한 청천서당에 연 학교다.

2칸 대청 안벽에는 ‘청천서당’ 현판이, 대청 앞 기둥에 ‘성명학교’ 현판이 걸렸다.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2칸, 오른쪽에는 1칸 온돌방을 들였다. 서당은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는 듯했지만, 마당에는 씀바귀와 고들빼기가 노랗게 피어 있었다.

 

그해 8월, 나라가 망하자 심산은 “선비로서 세상에 산다는 것은 치욕이다.”라며 음주와 미치광이 노릇으로 3년여를 보냈다. 그러다가 모친의 가르침을 받들어 4, 5년간 독서에 정진하게 된다. 이후 심산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소양이 된 학문과 문장은 모두 이 시기에 기반을 닦은 것이었다.

 

심산은 행동성이 강한 편이었지만 청년기에 스승인 이승희나 곽종석의 의병 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앞서 밝힌 대로 그의 독립운동은 낡은 존화양이(尊華攘夷)에 입각한 ‘척사위정론’을 벗어나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근대 국제관계의 현실적 상황 속에서 조선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독립주권의 회복을 기도한 것이었다.

 

파리 장서 운동을 주도하다

 

이러한 심산의 독립운동은 자연히 대외적으로 선전·섭외 활동을 중심으로 출발하게 된다. 이는 바로 그 자신이 참여하지 못한 3·1운동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1919년 심산이 파리평화회의에 조선 독립청원서를 보낸 파리장서(長書)운동은 심산의 대외적 선전·섭외 활동의 첫 출발이었다.

 

심산은 전국 유림을 규합하려 했지만, 보수적 유생들의 지역·학통·사색당파·사고의 차이 때문에 이를 이루지 못하였다. 대신 곽종석·김복한 등 영남과 충청도 유림 130여 명이 연명한 장서를 작성하여 극비리에 출국, 상하이로 갔다. 거기서 독립청원서를 영역하여 파리의 김규식에게 보내 회의에 제출하게 하는 한편, 장서를 인쇄하여 중국의 정계·언론계, 외교사절, 재외교포와 국내 지방 향교에 우송하였다.

▲ 성주 야성송씨 문중의 송준필이 1919 년 파라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 서명을 한 백세각(百世閣).
▲ 심산이 파리 장서 초안을 작성한 봉화 만회고택 . 김호림은 이 마을에서 심산의 조부에게로 출계 (出系)했다 .
▲ 봉화 송록서원 앞에 2014년에 건립된 한국 유림 독립운동 파리 장서비.

이에 당황한 일제가 국내 유림 500여 명을 체포하는 등 대규모 옥사를 벌이니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 의거(1919~1921)’다. 이 의거는 국내 민중운동을 바탕으로 민족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심산은 파리에 가는 대신 중국에 머물면서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하였고 임시의정원 4차 회의에서 경상도 의원에 선임되었다. 심산은 자신의 유학·한문학적 교양을 통하여 중국과의 대일본 공동항쟁을 위한 연대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심산이 혁신 유림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선각자로 기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하이에 임정을 수립했지만 1921년을 고비로 국내외 독립운동은 점차 약화하고 있었다. 심산은 1925년 베이징에서 이회영(李會榮)과 함께 만주와 몽골 접경에 황무지 3만 정보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고 여기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

 

‘일제 총독 하의 모든 기관 파괴’, 나석주 의거를 기획

 

그러나 모금활동은 부진했고 심산은 “친일 부호들의 머리를 베어 독립문에 달지 않고는 우리의 독립이 달성되지 않을 것”이라며 분노하였다. 심산의 국내 잠입 모금활동 사실이 드러나며 다시 6백여 명의 유림 인사들이 검거되는데 이것이 ‘2차 유림단 의거(1925~1926)’다.

 

심산은 모금의 실패가 민심이 죽어 있고, 그것은 일제의 위장된 ‘문화정치’에 매수된 지식층과 주구(走狗)화한 식민지 관리와 일부 부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독립운동에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먼저 일제 총독 하의 모든 기관을 파괴하고, 다음 친일 부호들을 박멸하고, 그리하여 민심을 고무시켜 일제에 대한 저항을 다시 불붙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 나석주 의사 의거 기념터 표석 .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왼쪽 화단에 있다 .

상하이로 돌아온 심산은 이동녕과 김구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모금한 돈으로 청년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기로 한다. 1926년 국내로 잠입하여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동척(東拓) 사원과 경찰 간부 등 여럿을 죽이고 일경과 교전 중 자결한 나석주(1892~1926) 열사는 바로 심산이 파견한 청년이었다.

 

이듬해(1927) 심산은 국내에 보냈던 맏아들 환기의 부음을 들어야 했다. 환기는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출옥 후 바로 사망한 것이었다. 아들의 주검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심산은 지병이 악화하여 상하이 조계(租界)의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가 이를 탐지한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되었다.

 

1928년, 심산은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병세가 깊어지면서 혼절하여 사경을 헤매기도 했지만, 그는 일제의 고문에 굴하지 않았고 한국인 변호사들의 무료변론도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을 ‘포로’로 자처하면서 구차히 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의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의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된 일인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히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1934년 병이 위중하여 형집행정지로 석방될 무렵, 이미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해 사람들이 ‘벽옹(躄翁-앉은뱅이)’이라고 부르자 자신도 이를 별호로 썼다. 그러나 그의 저항정신은 전혀 위축되지 않아, 일제의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하는 등 투쟁을 계속하였다.

 

1940년, 일제의 감시가 다소 느슨해지자, 그는 고향 집을 찾아 어머님 묘소에서 2년간 시묘(侍墓)했다. 1920년 정월, 망명지 상하이에서 모친의 부음을 들었지만, 그는 어머니와 영결(永訣)하지 못했었다. 그러니 그 시묘는 실로 20년 만의 뒤늦은 자식 노릇이었던 셈이다.

 

심산은 1944년 8월에 서울에서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에 남한 책임자로 참여하였다. 비록 실질적 활동은 못 했지만, 일제의 패망과 민족 해방에 대비하고 있었던 이 지하조직에 심산이 참여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민족적 양심을 대표하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충분한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심산이 해방 소식을 접한 것은 1945년 8월초, 건국동맹을 결성한 사실이 드러나 일경에 체포되어 왜관경찰서에 수감되어 있을 때였다. 을사늑약 체결 후에 스승과 함께 상경하여 ‘오적 참형소’를 올린 때부터 40년이 흘러 스물여섯 청년은 예순여섯의 노년이 되어 있었다.

▲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의 심산 김창숙 선생의 생가 안채 .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1 년 중수했다 .
▲ 심산의 둘째 며느리 손응교 여사 . 심산의 차남 찬기에게 출가하여 27세에 청상(靑孀)이 된 이다 . 옆은 아들 김위 씨 .

임시정부로 보낸 차남, 유해로 돌아오다

 

그해 10월에 심산이 1943년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로 보냈던 차남 찬기가 유해로 돌아왔다. 1927년 맏이 환기를 떠나보낸 지 꼭 18년 만이었다. 아들 셋 가운데 둘을 조국 해방 투쟁에 바친 심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는 스물일곱에 청상이 된 둘째 며느리에게 담뱃대에 불을 붙여달라고 하면서까지 담배를 가르쳤다.

 

그것은 남편을 잃고 걸음조차 어려운 시아버지의 손발이 되어 삯바느질로 힘겹게 생계를 꾸린 젊은 며느리에게 베푼 시부의 사랑이고 위로였다. 일찍이 그이는 만주와 중국에 세 번, 국내는 30여 차례나 오가며 심산이 국내외 독립운동가에게 보내는 ‘비밀편지’를 전했던 숨은 독립유공자였다.

 

며느리와 함께 담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른바 ‘맞담배’를 한 독립투사를 상상해 보라. 불의엔 굽힐 줄 모르는 성정이었지만, 구태의연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던 개방적이며 진취적인 사고를 지녔던 이가 심산이었다.

 

도착한 답사단과 함께 어느덧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둘째 며느리 손응교 여사가 홀로 지키고 있는 심산 생가를 찾아 인사를 드렸다. 기력이 떨어진 노인을 뵈면서 답사단은 옷깃을 여며야 했다. 그이가 감내한 세월이 바로 이 땅의 고단한 현대사였음을 새삼 떠올리면서.

 

그이가 갓 결혼해 남편과 처음으로 시아버지를 뵈러 간 데가 대전형무소였다. 심산은 그때 이미 고문으로 다리를 쓰지 못하는 상태여서 간수에게 업혀 나왔다. 며느리는 시집와서 시아버지가 걷는 모습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 반독재 호헌 구국 선언을 발표한 국제구락부 사건 당시 연행되고 있는 심산 .
▲ 심산은 해방공간에서 성균관 초대 관장과 성균관대학 초대 총장을 역임했다. 성균관대학에서 .

비록 몸은 불편했지만 ‘진정한 해방’을 위한 심산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해방공간에서 유도회를 조직하고 성균관 초대 관장과 성균관대학 초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유도(儒道)의 재건과 개혁에 앞장섰다. 그는 유도의 현대적 재건을 좌우 대립의 이념적 혼란을 극복하고 민족 통일을 추구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로 파악한 것이었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반독재 투쟁

 

특히 무엇보다도 민족의 분열을 경계했던 심산은 일찍이 임시정부의 노선에 비판적이었지만 해방공간에선 임정을 중심으로 뭉치자는 이른바 ‘동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또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조성환·조완구 등과 더불어 ‘7인 지도자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북 분단을 고착화하는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반대하였다.

 

김구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가 암살되는 정국의 혼란을 거치면서 친일파가 정권과 유착하여 다시 실세로 떠오르자 심산은 이제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에 단신으로 맞섰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심산은 여전히 탄압받고 거듭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 대통령 하야 경고문,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반대하여 반독재 호헌 구국 선언을 발표한 국제구락부 사건, 이승만 삼선 취임 반대, 보안법 개악 반대, 민권쟁취 구국운동 등 독재와 맞서는 외로운 싸움에서 그는 늘 전면에 있었다.

 

1955년 무렵부터 독재 권력과 주변 세력들에 의해 성균관과 성균관대학의 분규가 확산하자 심산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심산은 집 한 칸 없이 곤궁한 생활 속에 여관과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일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는 그의 선비정신이 대학을 세우고 총장을 지내고서도 셋집에서 여생을 보내게 한 것이었다.

 

1957년 겨울, 병으로 가마에 실려 고향에 돌아온 심산은 ‘쇠약한 몸으로 병상에 누우니 온갖 감회가 층층으로 나와, 고시(古詩) 한 편을 지어 여러 일가에게 보’였다(심산 자주(自註))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던가. 시에는 이루지 못한 평화와 통일을 절절하게 그리는 노 독립운동가의 회한이 짙게 배어 있다.

 

천하는 지금 /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 하늘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 한 사람 손아귀에,
아아, 겨레의 슬픈 운명이여.
전부가 돌아갔네.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 빨리 오려무나.

   - “통일은 어느 때에” 중에서

 

1962년 5월 10일, 불요불굴의 저항정신과 실천적 행동주의의 표상이었던 심산은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그 열혈의 삶을 마감했다. 향년 84세. 온 국민의 애도 속에 사회장이 엄수되었고, 그의 유해는 수유리에 안장되었다.

▲ 심산은 1962 년  5월 10 일 세상을 떠났다 . 5 월 18 일 , 서울운동장에서 엄수된 선생의 사회장.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전통과 원칙을 지켜나갈 때 비로소 대의명분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 비타협·불복종의 행동주의자. 한평생 격동의 근대사를 고스란히 겪으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갈무리해 온 심산은 지나간 시대의 ‘마지막 선비’였다.

 

역사와 역사적 인물은 곧잘 그 당대의 삶과 자취를 통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환기해 주곤 한다. 비록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일이지만 그 성찰의 시간으로 우리의 비루하고 속된 삶의 민낯을 되돌아볼 수 있다면 1박 2일은 얼마나 값진 시간이 될까.

 

과거를 통해 오늘을 돌아보는 역사 탐방, 심산 기행은 이튿날 오전, 1919년 심산이 파리 장서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봉화군 해저리 만회고택(晩悔古宅)에서 그 공식 일정을 마쳤다.

 

 

2015. 6. 22. 낮달

 

 

 

혼자 된 며느리에게 담배 가르친 시아버지

[답사] 경북 성주와 봉화로 떠난 '심산(心山) 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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