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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식민지 시대 - 항일과 친일

77년 만의 귀환 - 석주(石洲) 이상룡의 국적 회복

by 낮달2018 2019.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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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국적 독립운동가들의 국적 회복

▲ 경북 안동시에 있는 임청각(臨淸閣). 석주 이상룡 선생의 가족관계등록부는 이 집에 적을 두었다.

무국적 독립운동가들이 국적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 분들이니 이들의 국적 회복은 가족관계등록부를 창설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대상은 단재 신채호(1880~1936),  석주(石洲이상룡(1858~1932) 선생 등 독립운동가 예순두 분임시정부 수립(1919) 90년 만이다.

 

▲ 석주 이상룡(1858~1932). 임정 초대 국무령을 지냈다.

이번에 가족관계등록부가 창설되는 독립지사는 이상룡, 이봉희, 김대락 선생 등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는데, 이봉희1868~1937)는 선생의 아우이고, 백하(白下) 김대락(18451915)은 선생의 처남이다.

 

석주가 류인식·김동삼 등과 함께 안동에 협동학교(1907)를 세웠을 때, 백하는 문중 원로들과는 달리 이를 적극 후원하였다.

 

경술년에 나라를 잃자 그 이듬해 석주는 "공자·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서간도 망명을 감행한다. 사당에 나아가 망명의 사유를 아뢴 석주는 친척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그 신주를 땅에 묻고 길을 떠난 것이다.

 

석주는 1914년에는 서로군정서를 설립, 독판으로 취임하고 부설 신흥무관학교를 열었다. 백하도 나라를 잃은 경술년 겨울에 66세의 노구로 만삭의 손부, 손녀를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그는 매부인 석주를 도와 신흥강습소를 설치하고 경학사(耕學社공리회(共理會) 등을 조직했다.

 

1911년 망명부터 98년, 1932년 순국부터는 77년 만의 귀환

 

50여 년에 걸친 석주의 구국 운동은 무력항일투쟁, 여러 독립운동 조직의 통합과 대동단결을 위한 노력으로 압축된다. 간도 망명 이래, 석주는 독립운동 계열의 의견조정과 단합을 위해 힘쓰고 독립운동계의 분열을 막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완고한 유림의 본고장 안동에서 성장하였으나 석주는 고루한 관념적 항일에 머물지 않았다. 석주는 조국독립의 방안으로 외교론·준비론·실력양성론 등을 물리치고 무력항일투쟁을 일관되게 주장한 독립운동가다. 그가 임정 국무령에 취임한 것은 임정을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석주의 노력은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석주는 19326월 중국 서란현 소고전자에서 간난의 삶을 마감했다. 향년 75. 그는 유언을 통해 일제 치하의 조국에는 시신으로라도 돌아가지 않기를 원했다.

 

조선 땅이 해방되기 전에는 데려갈 생각을 마라. 조선이 독립되면 내 유골을 유지에 싸서 조상 발치에 묻어 달라.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

 

석주 이상룡 선생의 등록부는 안동시 법흥동 20번지로 보물 182호인 임청각에 두었다. 임청각은 99칸 규모로 안동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양반 가옥인데, 이 고택에서 석주를 비롯해 무려 아홉 분의 독립운동가가 태어났다.

 

석주와 함께 간도 망명을 떠났던 당숙 이승화(애족장), 아우인 상동(애족장), 봉희(독립장), 조카로 상동의 아들인 운형(애족장), 형국(애국장), 봉희의 아들인 광민(독립장), 친아들 준형(애국장), 친손자 병화(독립장)가 그들이다. 처남인 백하 김대락(애족장)까지 치면 꼭 열 분이다.[관련 글 : 광복 73돌, 허은·이은숙 여사도 마침내 서훈받다]

 

그 죽음으로부터 치면 석주는 77년 만(중국으로 망명한 1911년을 기준으로 하면 97년이다)에 자신의 이름으로 그의 생가에 귀환한 것이다. 임시정부 수립에서 기산하면 90년 만이다. 거의 한 세기만에 이루어진 이 국적회복은, 그러나 덧없다기보다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이들 독립지사들이 무국적자가 된 사연도 망국의 설움과 겹친다. 이들은 일제가 1912년 호적제도를 도입하기 이전에 망명했거나 일제의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등록을 거부했던 인사들이다. 광복 후 정부가 호적에 올라 있던 사람들에게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함으로써 이들은 법적으로 무국적자신분이 된 것이다.

 

이번 조치도 국가보훈처가 석주 이상룡 등 독립운동가 62명의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을 허가해 달라고 낸 신청을 서울 가정법원은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뿐 아니라, 단재 신채호·이상설·홍범도·김규식 선생 등 국내에 호적이 없어 무국적자로 남아 있었던 독립유공자 300여 명에게도 가족관계 등록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들의 가족관계등록부(옛 호적부)를 만드는 것이 뼈대인 독립유공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다. 남은 것은 국회의 입법심사 절차, 대법원 규칙 제정 등인데 이 절차를 모두 거치면 무국적 독립운동가들은 내년 하반기부터는 가족관계등록부에 올라갈 수 있으리라고 한다.

▲ 안동시 내앞마을의 백하구려(白下舊閭). 백하 김대락의 집으로 협동학교가 여기서 열렸다.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독립국가로 새롭게 출범한 지 60년이 훌쩍 지났고, 이 가난한 신생 독립국은 세계 십몇 위의 경제규모로 자랑하는 나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 세월 동안 조국은 무심하기만 했다.기존 법률 조항을 개정하는 것만으로도 우국지사들을 기릴 수 있었지만 정작 조국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발전 조국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풍찬노숙이 오늘 독립된 나라를 만든 밑거름이었다면 마땅히 그 삶과 죽음은 뜨겁게 기려져야 한다. 그러나 나라는 한낱 쇳조각으로 그들의 희생을 기렸을 뿐이다. 먹고 살기 바빴다고 변명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어쩌면 그게 이 나라의 수준일지도 모르겠다.

 

한 나라의 건국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그 나라의 국가 정체성(Identity)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독립지사들이 무국적으로 살아온 지난 60여 년은 그것을 부정하는 세월이었던 셈인가. 그런 뜻에서 국가 정체성에 관한 이 나라의 무신경은 끔찍한 수준이 아닌가 싶다.

 

하긴 일제 때 일왕의 교육칙어에 따라 바뀐 소학교 명칭이 일제 식민지의 찌꺼기인 국민학교를 버리고 초등학교가 되기까지 걸린 세월이 41년이다. 정작 식민지 종주국이던 일본은 1947년에 국민학교를 버리고 다시 소학교로 되돌아갔는데 해방된 자주독립국가 대한민국이 만든 유구한 역사40년이 넘은 것이다.

 

결국 지난해 논란을 벌였던 건국 60소동도 우리 내부에 정리되지 못한 일제 식민지 시기(국권 피탈기)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나라에서 생뚱맞게 건국 60주년논란이 번지는 것은 우리 현대사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몰역사의식탓이라고 보는 게 마땅할 듯하다.

 

지난 413, 임시정부 수립 90주년 기념식장에서 무호적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가족관계등록부가 전달되었다고 한다. 등록부야 한낱 민원서류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후손들에게 그 종이 조각은 우국지사를 선조로 둔 덕분에 감내해야 했던 그들의 신산한 삶에 대한 나라의 격려와 위로가 되었을 것인가.

 

며칠 후에 우리 분회에서는 신세동 전탑 답사를 떠난다. 바로 옆에 있는 임청각도 들르리라고 한다. 이름도 낯선 가족관계등록부로 되살아온 석주의 넋은 얼마나 편안히 거기 임하고 있을까. 조국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우국의 삶과 기억도 까마득한 그 시대를 생각해 본다.

 

 

2009. 4. 23. 낮달

 

 

 

*석주 관련 기사 (공맹은 나라 되찾은 뒤 읽어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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