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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임정답사]허리 숙여 절하는 광복군… ‘그 가뭇없는 꿈의 안부’

by 낮달2018 2021. 3. 14.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⑬] 충칭(重慶)③ 광복군의 국내 진공 계획 '독수리 작전'과 임정의 귀국

 

▲ 충칭에 복원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전시물은 사진 자료가 중심이었다. 

충칭에 복원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전시물은 대부분 사진 자료다. 1940년대 사진이라 해상도가 매우 낮아 사람의 얼굴이나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진도 적잖다. 이는 80여 년 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게 쉽지 않았던 탓이다.

 

망명한 민족 지도자들이 임시정부를 세운 지 21년 만에 ‘광복군’이라는 이름의 직속 군대를 창설한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긴 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 조직한 군대라는 점 외에도 광복군의 열악한 존재 조건은 일일이 셀 수 없었다. 임정은 창군(創軍)은 했지만, 실질적 무장력이 될 병사도 없었고, 그 군대를 운영·유지할 돈도 없었다.

 

‘병사’를 모으는 광복군의 활동

 

임정은 ‘통수권’ 문제로 중국 측의 양해와 협조 없이 독자적으로 광복군을 창설한 뒤, 이를 인준(1941.11.15.)받는 데 1년을 보냈고 다시 중국이 요구한 ‘광복군 9개 행동준승’ 문제를 해결(1944.9.8.)하는 데 무려 3년이나 허비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광복군 운영은 중국의 재정 지원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러나 인준까지 중국 측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임정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초모(招募) 활동 등을 이어갔다. 총사령부를 시안으로 이전한 뒤, 각 지대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1년 2월부터였다. 제1지대는 산시성(山西省), 제2지대는 쑤이위안성(綏遠省), 제3지대는 안후이성(安徽省)으로 갔고, 제5지대는 산시성(陕西省) 시안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 선서 중인 광복군 대원들. 정렬한 대원 중 맨 왼쪽에 작은 키의 여자 대원도 보인다.  ⓒ 광복군 총사령부 전시 사진

윈난(雲南) 육군 강무당 출신인 제1지대장 이준식은 1929년 국민부군(國民府軍) 총사령으로 무장 항일 투쟁을 계속해 오다 한때 중국군에도 몸을 담았던 이다. 군사특파단원으로도 활동한 그는 지대 간부 안춘생(1963 독립장) 등과 함께 산시성으로 가서 초모 선전과 첩보 공작을 전개했다. 1지대는 당시 일본군 점령지역인 타이위안(太原)과 린펀(臨汾) 등지로 침투하여 현지의 교포들을 만나 초모 활동과 함께 일본군 적정탐지와 적진 파괴, 유격전 가담 등을 수행했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장 출신인 제2지대장 고운기는 한국독립군 지청천 장군 휘하에서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둔 이다. 그는 나태섭(1977 독립장) 등과 함께 쑤이위안성 바오터우(包头)로 잠입하여 초모 공작을 전개한 이래 활동 지역을 허베이성(河北省)과 차하얼성(察哈爾省)까지 넓혀 갔다. 2지대는 적진 가운데서 초모와 적정탐지 활동을 전개했으나 포섭된 한인 청년의 배신으로 유해준(1977 독립장)이 체포되자,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만 했다.

 

제3지대장 김학규는 신흥무관학교와 서로군정서 간부 그리고 조선혁명군의 양세봉(1962 독립장) 장군의 참모장을 역임한 이다. 그는 부인 오광심(1977 독립장)과 신송식·오희영 부부 등과 함께 안후이성 푸양으로 들어갔다. 이들의 초모 공작은 한인 청년 초모, 지하 공작 확보, 조직망 확충, 게릴라전 감행 등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특히 쉬저우(徐州)로 잠입하여 일본군 내 한인 사병들에게 광복군으로 와서 싸우자고 권유하는 공작을 성공적으로 전개했다.

 

중국 중앙군관학교 출신의 제5지대장 나월환은 시안에 파견됐던 청년전지공작대장을 지낸 무정부주의자였다. 그는 시안을 중심으로 청년전지공작대를 활용해 초모 활동을 펴서 50여 명을 광복군에 입대하게 했다. 그는 중화민국 1전구 사령관 후쭝난(胡宗南, 1999 독립장)에게 요청해 중앙 전시 간부 훈련단 제4단 안에 한청반(韓靑班)을 설치해 이들을 훈련하기도 했다.

 

이들은 선전공작의 하나로 극단을 조직, 항일의식 짙은 연극공연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지대장 나월환은 1942년 3월 1일, 전지공작대의 광복군 편입 과정에서 생긴 대원들과의 갈등과 불화로 말미암아 지대 간부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 전시 중인 광복군이 쓰던 녹슨 전화기와 먼지와 그을음 낀 남포등  ⓒ 광복군 총사령부 전시물

1942년 12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지대장 김원봉)로 편입되면서 광복군은 기존의 2·3·5지대를 2지대(지대장 이범석)로 통합, 2개 지대로 운영됐다. 1945년 6월에는 안후이성 푸양에서 초모 활동을 전개하던 징모(徵募) 제6분처가 제3지대(지대장 김학규)로 편제되면서 모두 3개 지대를 갖추게 됐다.

 

연합국과의 공동작전, 임정의 전략

 

1941년 12월 10일 일본에 선전포고한 뒤, 임정의 군사 활동 방향은 ‘연합군과의 공동작전’으로 설정됐다. “한국과 일본 본토에 지하 공작을 진행하며 미국과 배합 작전하여 해상으로 조선 반도에 진입한다”라는 등의 군사 계획의 핵심은 연합군과 함께 대일전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후 ‘연합국 지위 획득’을 노린 임정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다.

 

▲ 1943년 인도 뉴델리에서 교육 받고 있는 광복군 인면공작대원과 영국군 교관. ⓒ 광복군 총사령부 전시 사진

영국군과의 공동작전은 1943년 8월, 광복군에서 한지성·문응국(1990 애국장) 등 공작대원 9명을 선발, 인도 캘커타로 파견함으로써 시작됐다. 일본군이 연합군의 대중국 전쟁물자 수송 통로인 버마를 점령하자, 이를 타개하고자 일본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영국이 광복군 측에 영어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대원을 요청한 것이다.

 

광복군 공작대원들은 인도 주둔 영국군 총사령부에서 교육을 받고 인도·버마(印緬)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대적 방송과 포로심문, 적군 문서 번역 등 주로 정보활동을 담당하면서 버마 수도 양곤을 탈환하는 1945년 7월까지, 2년여에 걸쳐 영국군과 공동작전을 수행했다. 이들은 흔히 ‘인면전구공작대’라 불린다.

 

공동작전의 백미 OSS와 합작한 국내진공작전

 

연합군과 공동작전의 백미는 미국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전략사무국)와 합작해 추진한 국내진공작전이었다. 이는 연합군을 주도하는 미국과 함께 한국과 일본 본토에서 지하 공작을 진행한 뒤 한국으로 진입한다는 임정의 ‘한국광복군 건군 반(反)작전 계획’과 한인들을 전쟁 첩보활동에 이용하려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 계획은 광복군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적 후방 공작을 전개하는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으로 구체화됐다.

 

미국과의 교섭을 처음 시작한 이는 제2지대장 이범석이었다. 그는 미 제14항공군 사령관 셴놀트(Claire L. Chennault) 소장에게 광복군 대원의 미국 작전 지원을 제안했다. 미국은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해 우선 한국인 공작반을 설치해 일본 문서 번역 등의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 광복군 제3지대 대원들과 미국 전략사무국(OSS) 웜스 대위(뒷쪽 맨 오른쪽). 1945년 7월 쿤밍. ⓒ 광복군 총사령부 전시 사진
▲ 8월 7일, 김구는 OSS의 도노반과 '항적공작'을 협의했다. 그리고 사흘 후 일본의 항복을 알았다.

한편, 제3지대장 김학규도 셴놀트 소장과 OSS 실무진과 교섭해 1945년 3월 15일 ‘한미 군사 합작에 관한 6개 항의 원칙’에 합의했다. 이 원칙은 미국이 광복군에 훈련과 장비를 제공하는 대신 광복군은 대일전(對日戰)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미국에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김구는 다음 날 이 이 원칙을 승인했다.

 

이어 김구와 OSS의 써전트(Clyde B. Sargent) 대위가 양국 합작 문제를 최종적으로 합의(4월 3일)한 뒤 4월 17일에는 정식 협정을 체결했다. OSS의 훈련은 5월부터 시안 외곽의 두취(杜曲)와 안후이성 리황(立煌)에서 3개월 과정으로 시작됐다.

 

시안에서의 훈련은 제2지대 대원들을 대상으로 써전트(Clyde B. Sargent) 대위 주관하에 이루어졌다. 제1기생에는 그해 1월 말,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충칭 임정을 찾아온 학병, 장준하와 김준엽 등 50여 명이 참여했다. 또 안후이성 리황에서는 윔쓰(Clarence N. Weems) 대위가 20여 명의 제3지대 대원들을 훈련했다.

 

정보수집을 위한 첩보 교육을 중점으로 매일 8시간씩 시행된 OSS 훈련은 8월 4일에 완료됐고, 38명이 교육과정을 통과했다. 8월 7일, 김구는 광복군의 지청천, 이범석과 함께 미군 비행기로 두취를 방문해 OSS 책임자 도노반(William J. Donovan) 장군과 ‘항적공작(抗敵工作)’(백범일지)을 협의했다.

 

제2지대 본부 사무실에서 도노반은 “금일 금시로부터 아메리카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은 시작됐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틀 뒤에 백범은 산시성(陝西省) 추샤오저우(祝紹周) 주석이 베푼 연회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일본으로부터 포츠담 선언 수락 의사를 접수한 국제연맹 본부에서 이를 연합국 측에 알려온 것이다. 1945년 8월 10일이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작전 무산

 

김구는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백범일지)고 통탄했다. OSS와 훈련받은 대원들이 미국 잠수함을 타고 가서 한반도에 상륙한다는 야심 차고 원대한 계획이 수포가 된 것이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국내 진입 작전이 좌절되자, 광복군에서는 곧바로 지대장 이범석과 대원 장준하 등으로 정진대(挺進隊)를 구성했다. 광복군 정진대는 8월 18일, OSS 측과 함께 미군 C-47 수송기로 국내에 진입,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들은 국외 독립운동 세력 가운데 해방된 조국에 가장 먼저 돌아온 이들이었다. 그러나, 정진대와 OSS는 전차와 기관포까지 동원한 일본군에 포위되어 대치하다가 다음 날 오후 28시간 만에 시안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충칭으로 돌아온 김구는 ‘국무원 총사직’ ‘임정 해산하고 귀국’ 등의 논의가 분분했던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정부 해산 운운은 천만부당하고 총사직도 불가하다. 우리가 장래에 서울에 들어가 전체 국민에게 정부를 도로 바치고 난 뒤 국무위원이 총사직하는 것이 옳다”라고 정리했다.

 

시급히 귀국하기를 바랐지만, 임정 요인들의 발은 두 달이 넘게 상하이에 묶여 있었다. 비행기를 내줄 미군의 승인을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것은 미군이 ‘임시정부’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기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김구가 개인 자격 입국에 동의하고, “입국하여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행정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로 기능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는 편지를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웨더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에게 보내고 나서야 미군은 수송기를 제공했다. 편지의 형식을 빌렸지만, 그것은 사실상 ‘임시정부’ 자격을 포기하는 서약서였다. ‘한반도를 신탁통치 한다’는 전후 대한(對韓) 정책을 견지해 온 미국은 임정을 망명정부로 인정할 뜻이 전혀 없었다.

 

임정 요인들의 외로운 귀국... 주한미군의 뒤늦은 발표

 

김구와 임정 요인 15명이 미군 수송기로 김포 비행장에 닿은 것은 1945년 11월 23일이었다. 비행장에는 환영 인파는커녕 마중 나온 사람조차 없었다. 요인들이 숙소에 들어간 뒤에야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는 이들의 귀국 사실을 발표했다.

 

“나와 나의 각원(閣員) 일동은 한갓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완성을 위하여 진력하겠습니다.”

다음날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경성방송국에서 방송으로 동포들에게 귀국 인사를 전했다. ‘평민 자격’을 확인해야만 하는 이 상황은 1919년 상하이에서 출범한 임시정부의 항일 투쟁, 그 간난의 역사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러나 해방정국이 임정의 뜻과 무관하게 강대국들의 의도가 관철되는 ‘배반의 시간’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임정의 ‘26년 투쟁’이 부정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개천절, 고국을 향하여 허리 숙여 절하는 광복군 대원들. 가뭇없는 광복을 그리며 싸우면서도 이들은 고향의 가족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광복군 총사령부 전시물 가운데, 유난히 눈을 끈 것은 희미하게 바랜 사진 두 장과 광복군이 쓴 녹슨 전화기 그리고 먼지와 그을음이 낀 남포등이었다. 정렬한 광복군 앞, 다섯 명의 병사가 팔을 치켜들고 선서하는 사진과 개천절 날 고국을 향해 깊숙이 허리 숙여 절하는 병사들의 모습이다.

 

가뭇없는 광복의 날을 그리며 청춘을 내던진 이 젊은이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리고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USS 미주리에서 서명한 항복문서 곳곳에 그들의 피가 보일 듯 말 듯 배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 아프게, 그러나 자랑스럽게 깨우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거칠고 성글게 구성한, 임정 노정을 따라간 임시정부 2차 답사기를 마감합니다. 임정의 독립투쟁을 일화 중심이 아니라, 태평양전쟁의 전개 등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펴보려 했지만, 짧은 시각에 부족한 공부 등으로 거칠고 성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글쓴이의 역량 탓임을 거듭 확인하면서 귀국한 임정이 1948년 8월 15일 단독정부의 수립으로 해산할 때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는 기사로 다시 뵙기를 희망합니다.

 

 

2021. 3. 13. 낮달

 

1차 답사(2015.1.2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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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②] 두 아들에게 남긴 윤봉길의 편지…북받침을 어찌하랴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③] 37살의 나이 차… 백범과 중국 여인의 ‘특별한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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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⑥] ‘난징의 능욕’,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2차 답사(2020.1.9.~1.14.)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⑦] 황푸군관학교, 한인 청년을 조련한 ‘혁명의 요람’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⑧] 혁명 열기 속 국경 넘은 사랑도 익어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⑨] 광복군 전신 청년공작대, 34명 청년들이 이뤄낸 반향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⑩] 임정, 초모 공작으로 광복군 창설작업에 본격 나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⑪] 충칭의 5년, 화시탄 물결 따라 사랑과 죽음도 흘러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⑫] ‘홀로서기’ 끝 광복군, 일본의 항복으로 길을 잃다

 

허리 숙여 절하는 광복군... 잊을 수 없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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