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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항저우 서호(西湖)와 ‘공산주의’

by 낮달2018 2021.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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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답사 길에 들른 항저우의 담수호 ‘서호(西湖)’

▲ 서호는 항주에 서호가 없다면 항주를 갈 이유가 없다라고 할 만큼 유명한 항주의 대표 관광지다.

항저우(杭州)에 들른 것은 지난 1월 임시정부 노정 답사단 여정의 둘째 날이었다. 우리는 임시정부 항주 시기의 첫 청사였던 군영반점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에는 임시정부 항주 옛터 기념관을 거쳐서 전장(鎭江)으로 떠나기 전에 짬을 내 서호(西湖)에 들른 것이다.

 

항저우(杭州)는 장강(長江) 델타 지역에 자리 잡은 저장성(浙江省)의 성도(省都)다. 중국의 7개 고도(古都)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이 도시는 수나라 때 건설된 대운하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어 일찍부터 대운하를 이용한 상업이 발달하였다.

 

10세기에 항저우는 난징(南京)과 청두(成都)와 함께 남송(南宋) 문화의 중심지였다. 12세기 초부터 1276년 몽골이 침입하기까지 남송의 수도였는데, 이때는 임안(臨安)으로 불리었다. 당시 북쪽엔 여진이 세운 금나라가 있었으므로 항저우는 자연스레 중국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항주, 중국이 보여주는 ‘초현대’의 일부

 

원에 의해 남송이 멸망하면서 몽골 제국이 구축한 육상 네트워크와 해상 세계가 비로소 통합될 수 있었고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항저우의 번영은 원대(元代)에 중국을 여행한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항저우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귀한 도시”라고 격찬했다.

 

항저우를 칭송하는 데는 중국인도 빠지지 않는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저우와 쑤저우(蘇州)가 있다.(上有天堂,下有苏杭)”거나 “소주에서 태어나, 항주에 살고, 광주(廣州)의 음식을 먹고, 황산(黄山)에 가서 일하고 유주(柳州)에서 죽으라!”는 속담이 생길 정도이니 말이다.

 

항저우는 인구 870만의 거대 도시다. 일찍이 ‘중공’으로 부르면서 흔히 중국산 공산품이 환기하는 ‘값싼 짝퉁’이라는 인상으로 중국을 바라보던 사람들도 중국이 보여주는 ‘초현대’ 앞에서는 말을 아낄 수밖에 없다.

 

조선족 관광안내원에 따르면 중국에는 인구 백만 이상의 도시가 200여 개고, 상하이에는 3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이 2천 개가 넘는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한적한 교외 도로를 달리다가 도시로 들어서면 거짓말처럼 펼쳐지는 마천루와 스카이라인은 낯설고 생경하다. 지방 소도시에 사는 시골뜨기에 눈에도 그게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실질적 삶의 풍경이라는 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시골을 찾은 서울 양반처럼 뻐기는 기색을 은연중 풍기던 관광객들도 그런 풍경들 앞에선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더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현대 중국의 풍경이 곧 우리의 미래와 긴밀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아열대 기후로 연중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는 항저우는 역사 유물과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널리 알려진 도시다. 관광이 항저우의 중요한 자원 가운데 하나인데, 항저우를 대표하는 인기 관광지가 바로 서호(西湖, 시후)다.

 

서호는 중국 국가 단위 풍경구 명승구와 세계에 널리 알려진 담수호다. 서호는 2천 년 전에는 전당강(錢塘江)의 일부였다가, 진흙 모래가 쌓여 남쪽과 북쪽의 산을 막아서 형성된 호수다. 중국에는 ‘서호’라는 이름의 호수가 800개 정도인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항저우의 서호다.

 

서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호수

 

▲ 백거이 (772~846)

서호는 도시 서쪽에 있어서 붙인 이름인데 ‘항주에 서호가 없다면 항주를 갈 이유가 없다.’라고 할 만큼 항주를 대표하는 명승지다. 항주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호수는 2011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호의 넓이는 6.38㎢, 둘레의 길이는 15km에 이른다. 서호는 소제(蘇堤), 백제(白堤), 양공제(陽公堤) 등 모두 세 개의 제방으로 나뉘어 있다. 이 가운데 소제와 백제는 각각 중국이 자랑하는 문인 소식(蘇軾, 1037~1101)과 백거이(白居易, 772~846)와 관련된 이름이다.

 

당나라 중반 항저우 태수로 임명된 백거이는 무너진 제방이 농사를 망치는 것을 보고 더 길고 튼튼한 둑을 쌓게 했다. 백거이는 둑 옆에 수양버들을 심고 매일 산책하면서 공사를 감독하였다. 제방이 완성되자 물이 풍부해져 가뭄에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제방이 그의 성을 딴 ‘백제’다.

 

▲ 소동파 (1037~1101)

2백 년 뒤 송나라 때 소동파(蘇東坡)가 항저우 태수로 부임했다. 이때에도 농민들은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웃자란 수초들 때문에 물 대기가 어려웠다. 그는 호수 바닥에 쌓인 진흙을 파내게 하여 제방을 쌓았다. 이 제방이 백제보다 세 배는 더 길고 넓은 제방, 소제다.

 

소동파는 벗 술고(述古)와 함께 항주 서호에서 봄맞이할 때의 정경과 술고에 대한 그리움을 ‘단양에서 술고에게’에 담았다. 이 시에서 그는 자신의 그리움을 아는 이는 ‘호수 속의 달 / 강가의 버드나무 / 언덕 위의 구름’이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단양(丹陽)에서 술고(述古)에게

 

강마을에서 손을 마주 잡을 때

바지에는 매화처럼 눈발이 나부꼈지.

정이란 끝이 없는 것

가는 곳마다 혼을 녹이네.

옛 친구는 보이지 않고

옛날 그 곡조는 또다시 들리는데

망호루(望湖樓)

고산사(孤山寺)

용금문(湧金門)을 바라보고 섰겠군요.

늘 가던 곳에

써 놓은 시 일천 수는

비단 적삼으로 덮어놓기도 했고

붉은 먼지를 털기도 했겠지요.

헤어진 뒤 이처럼 그리워하는 줄을

아는 이 그 누구일까.

호수 속의 달

강가의 버드나무

언덕 위의 구름이라오.

 

서호는 유명한 미인 ‘서시(西施)’를 기념하는 의미로 ‘서자호(西子湖)’라고도 불린다. 서시는 실존 여부를 다투는 인물이긴 하지만 여러 이야기에 등장한다. 월나라 왕 구천(勾踐)은 오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서시를 바친다. 구천이 바랐던 대로 부차는 이 미인에게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게 되면서 오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호의 아름다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으로 단교잔설, 소제춘요, 화항관어 등의 서호십경(西湖十景)이 있다. 그러나 서호십경은 비단 장소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계절이나 하루의 특정한 시간, 주변의 풍치와 조화를 이루었을 때를 말하는 것이므로 뜨내기 여행객이 만날 수 있는 풍광은 아닌 셈이다.

 

‘임시정부 노정’을 따르는 답사단이 항저우를 돌아보면서 서호에 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도 많지 않았고 ‘서호가 없어도 항주에 갈 이유’야 충분했지만 말이다. 흐린 날씨 탓이었을까, 오전 11시께 만난 겨울의 호수는 약간 어둡고 칙칙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선착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유람선은 모서리 처마가 날카롭게 하늘로 치솟은 중국식 기와집 모양이었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이 중국식 기와집을 볼 때마다 새삼 우리나라의 전통 와가(瓦家)가 얼마나 아름다운 건축인가를 확인하게 된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호수래야 충주호를 가 본 게 고작인 내게 서호는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수심 탓인지 물은 검푸른 빛이었고, 멀리 가까이 번득이는 물빛도 무거웠다. 배는 천천히 호수 가운데로 나아갔다.

 

서호를 지키는 건 공산주의 체제?

 

유람선은 전기로 움직이는 배다. 항저우시는 호수의 환경 보호를 위해 화석연료 대신 충전지를 이용해 배를 운행하게 했다. 호수 주변의 개발을 억제하고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조치가 매우 강력하게 시행됨으로써 유지되는 서호의 자연은 중국이 견지하고 있는 공산주의 체제에 힘입은 것이라 했다.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보면 호수 주변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이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걸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호수 안에서 선상 유람을 즐기고 호수 둘레의 산책길과 제방에는 한가롭게 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이 나라의 체제를 이 호수에서 환기하게 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호수를 누비고 있는 유람선들은 저마다 다른 가옥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소수의 관광객을 싣고 노를 저어가는 나룻배가 흥미로웠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그걸 타고 호수를 도는 게 훨씬 좋을 듯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광객들은 관광도 마치 전투처럼 수행한다. 바쁘게 한 곳을 돌아보고 또 다른 곳을 향해 부리나케 떠나는 것이다.

 

장예모의 실경 산수극 ‘인상서호’

 

호수를 떠나면서 답사단 길라잡이 홍 선생은 내게 뒷날 서호를 찾거든 장예모 감독의 실경산수(實景山水) 공연을 꼭 보라고 권했다. 호수의 끝부분에 영화 <붉은 수수밭>의 장예모 감독이 성공시킨 ‘인상서호(印象西湖)’(2007)의 무대가 숨어 있다고 했다.

 

인상서호는 항저우의 전설인 ‘백사(白蛇)전’을 주제로 만남, 사랑, 이별, 추억 등을 노래한 공연이다. 드넓은 호수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 대형 예술극은 출연진이 400여 명, 객석 수 1,360개로 1회 평균 입장 수입이 1억 원이 넘는다고 했다.

▲ 장예모 감독이 만든 실경 산수극 <인상서호> 포스터

캄캄한 호수에 휘황찬란하게 비치는 조명과 아름답게 흐르는 선율, 물 위를 걷고 나는 수백 명의 배우들이 연출하는 이 공연 앞에서 관객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고. 글쎄, 그러마고 대답은 했지만 언제 다시 항저우를 찾을 수 있을까. 이웃 나라이긴 하지만, 이웃 마을 나들이하듯 오가는 곳은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적당한 미련을 남기고 떠나는 것도 괜찮다. 미련은 미련으로 남아도 좋고, 뒷날 그걸 해소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인생은 짧고 우리의 발길이 미칠 수 있는 날은 유한하지 않은가. 나는 무심한 눈길로 연변 풍경을 바라보면서 항저우를 떠났다.

 

 

2015. 4.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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