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⑪] 충칭(重慶)① 토교마을에서의 삶과 토교대(土橋隊)
넷째 날, 오후에 우리는 버스 편으로 마지막 임정 청사가 있었던 충칭 시내로 들어갔다. 해방까지 머문 충칭은 상하이를 빼면 임정이 가장 오랜 기간 주재(駐在)한 도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급박하게 전개되어 간 제2차 세계대전의 추이에 따라 충칭 임시정부도 바빠졌다. 임정은 여기서 광복군을 창군함으로써 비록 소규모지만 직속 군대를 보유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항일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토교마을에서 시작된 충칭 생활
그로부터 80여 년 뒤, 충칭을 찾은 한국인들이 엄청나게 변모한 이 거대한 도시에서 임정의 자취를 찾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요인과 가족들이 머문 토교마을과 그들이 묻힌 허상산 묘지, 조선의용대 간부 거주지 터도 모두 사라져 버린 현지를 둘러보며, 나는 닳아가는 ‘역사의 기억’을 생각하고 있었다.
임정 가족들은 충칭 난안(南岸) 투차오(토교土橋)의 둥칸(東坎) 폭포 옆의 기와집 세 동에 들었다. 백범이 중국의 전시 구호 기관인 진제(賑濟)위원회로부터 받은 6만 원의 원조로 대지 2천 평을 사서 지은 집이었다. 여기에다 길가의 2층 기와집을 사들여 모두 100여 명이 토교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임정의 안살림을 맡아온 정정화는 창강(長江, 양쯔강)이 도시를 서에서 동으로 가르며 흐르고, 북쪽에서 흘러온 지류 자링강(嘉陵江)이 시내 동쪽에서 창강과 합류하는 충칭을 ‘강의 도시’라 일컬을 만하다고 봤다. 토교는 이 충칭의 강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가족들은 일제의 패망까지 줄곧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수당(修堂) 정정화(1900~1991, 1990 애족장)는 경술국치(1910) 뒤 중국으로 망명한 김가진(1846~1922)의 장남 김의한(1990 독립장)의 부인이다. 그는 1919년 시부와 남편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임정 내무장 조완구(1989 대통령장)가, 국내를 6차례나 드나들면서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날라 온 그를 “온몸이 담(膽)덩어리”라고 경탄한 대로 그는 당차고 담대한 여인이었다.
수당은 1934년 지방행정관이 된 남편을 따라 장시성(江西省)에 잠시 머물렀을 때를 빼면 해방 때까지 줄곧 임정에서 활동하면서 항일투쟁의 현장을 지켜온 독립운동가였다. 흔히 여성 독립운동가는 남편 활동을 보조하는 '내조자' 정도로 낮잡아 보기도 하지만, 그는 독자적 활동으로 제 몫을 다한 옹골찬 항일 투사였다.
그가 펴낸 회고록 <녹두꽃>(1987, 개정판 <장강일기> 1998)은 그가 임정과 함께한 ‘만리장정’을 비롯한 임정 소식은 물론, 충칭에서의 생활 등을 매우 상세하고 사실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것 자체로 임정 역사의 일부가 된, 1940년에 갓 마흔 중년이 된 수당이 기록한 임정 활동과 가족들의 생활을 따라가 본다.
피난처에서도 삶과 사랑은 이어지고
‘만리장정’을 헤쳐온 가족들은 토교에 와서 “한층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분지인 충칭은 온화한 겨울과 무더운 여름, 그리고 연중 심하게 끼는 안개로 유명한 도시였다. 수당은 매년 11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도시 전체에 끼는 안개가 “전쟁 중에 결핵 따위의 질병을 도시 전체에 퍼뜨리는 원흉이기도 했으나 일본의 공습만은 거의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는 천연의 무기”라고 회고했다.
살림살이가 어려워 쪼들리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모두가 한집안 식구처럼 단란하게 지내게 되었다. 마을 주변에는 화시탄(花灘溪)이라는 맑은 냇물이 흘러 빨래도 하고 멱도 감을 수 있었다. 수당은 마을 언저리의 밭에 채소를 심어 가꾸었으며, 고구마와 옥수수를 심기도 했다.
한인촌이 형성되면서 토교마을은 생활 공동체로서 규모를 갖추어갔던 듯하다. 교회와 유치원이 있었고, 한인 자녀들은 화시탄 건너편의 청화중학에 다녔다. 1944년 3월 토교를 방문한 양우조는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언덕에 있는 YWCA 회관과 민가에서는 아이들을 모아 한국말과 한국노래를 가르치고 있어 그 앞을 지날 때면 고향에 온 느낌이 들곤 했다”(제시의 일기)고 기록할 정도였다.
토교마을과 임정 주변에서는 젊은 남녀의 사랑과 혼인도 이어졌다. 베이징에 파견되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중국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계속한 오광선(1962 독립장)의 부인과 삼 남매도 토교에 살았다.
두 딸 희영·희옥(이상 1990 애족장)은 10대일 때, 류저우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가했던 올된 처녀들이었다. 충칭에서 희영은 신송식(1963 독립장)과 함께 광복군으로 활동하다가 ‘동지 결혼(임정 식솔끼리 하는 혼인)’에 이르렀다.
1944년 두 사람은, 학병을 탈출해 토교대(土橋隊)에서 일하던 한필동(1990 애족장) 목사의 주례로 혼례를 올렸다. 혼인 적령기의 남녀가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랑에 빠지고 일생을 함께하자며 부부가 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 토교마을에서 혼인한 한인 남녀는 이들만은 아니었다.
임정 재무차장 신건식(1977 독립장)의 딸인 신순호(1990 애국장)도 법무부장 박찬익(1963 독립장)의 아들 영준(1977 독립장)과 사귀다가 1943년에 혼례를 올렸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와 광복군에서 활동을 같이한 이들의 혼인은, 충칭의 임정 강당에서 백범의 주례로 임정 요인과 충칭에 사는 한인들의 축하 속에 치러졌다. 이 화촉은 붉은 비단에 쓴 결혼증서로 지금도 남아 있다.
조국에 바친 삶, ‘국가의 무한책임’이어야
타국땅 피난처에서 임정 요인과 식구들이 광복의 일념으로 살아가는 토교마을에는 사랑만이 아니라, 죽음도 이어졌다. 광복을 맞지 못하고 타국땅에서 숨을 거둔 이들은 충칭 난안(南岸) 탄쯔스(彈子石)의 허상산(和尙山)에 묻혔다. 이 기간 충칭에서 사망한 한인은 80여 명에 이르렀다.
임정 요인 송병조(1877~1942, 1963 독립장)·차리석(1881~1945, 1962 독립장)·이달(1910~1942, 1992 독립장)·손일민(1884~1940, 1990 애국장), 그리고 백범의 모친 곽낙원(1859~1939, 1992 애국장)과 장남 김인(1917~1945, 1990 애국장) 등이 이 산에 묻혔다. 김인은 4월에, 차리석은 해방 뒤인 9월에 각각 유명을 달리하였으니 그 애석함은 말로 이르기 어렵다.
곽낙원과 김인의 유해는 1948년에, 일본군과의 쿤륜산(昆崙山) 전투(1939)에서 총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숨진,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1910~1944, 1995 독립장)의 유해는 1945년에 환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분들의 유해 봉환은 중국의 공산화로 무산됐다. 이들은 물론, 허상산에 묻혔다고 하는 10~20명의 조선의용대 대원도 자취를 찾기 어렵다.
동행한 김경준 기자가 문 대통령께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기사로 이 묘지의 유해 발굴을 호소했지만, 정부의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허상산에 잠든 선열의 유해를 발굴하여 봉환해 오는 일은 섣부른 애국·충효 교육보다 훨씬 분명하게 조국의 실체를 환기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관련 기사 : 독립운동가 묘지가 공사장으로… 정부는 뭐하나)
미국의 ‘합동 전쟁포로·실종자 확인 사령부(JPAC)’는 한국전쟁에서 숨진 미군의 유해를 봉환해 가는 일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이 사령부의 모토는 ‘그들이 모두 귀환할 때까지(Until they are home)’인데, 그것은 나라에 목숨을 바친 이들에 대한 국가의 ‘무한책임’이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사라진 것은 한인 묘지만이 아니다. 한인들의 생활 공동체 토교마을도 중국철강유한공사가 들어서면서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회사 안에 2006년에 세운 ‘한인 거주 옛터’라는 표지석만 남아 있을 뿐, 80년도 전 타국땅에 깃들인 망국민의 삶과 역사는 시나브로 지워지고 있다.
광복군의 보충대인 ‘토교대’ 운영
한편, 충칭의 임정에는 일본군을 탈출하거나 중국군의 포로가 된 한인 병사들과 뜻있는 한인 청년들이 모여들었고 임정은 이들을 토교마을에 집단수용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이들을 교육 훈련한 뒤 광복군에 배치했다. 이들이 바로 광복군이 별도로 조직한 보충대 격인 ‘토교대’다.
토교대는 한인 청년들의 집결 상황에 따라 세 차례에 걸쳐 편성된 비상설 조직이었다. 처음 편성된 토교대는 1944년 3~4월경, 일본군을 탈출하거나 일본군 관계자, 현지에서 토목과 철공업 등 생업에 종사하던 이들 3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3개월간 군사와 정훈 교육을 받고 주로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다.
두 번째 토교대는 중국중앙군관학교 린촨(臨川)분교의 한국광복군 청년훈련반 교육을 받고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한 장교 등 51명이 1945년 1월 말 충칭에 집결하면서 편성되었다. 이들은 1944년 시안(西安)을 탈출한 학병으로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阳)에서 2, 3천km를 걸어 충칭으로 왔는데 이들 가운데는 장준하(1991 애국장)와 김준엽(1990 애국장)도 있었다. 이들은 일부만 임정에 남고, 대원 대부분이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로 파송되면서 해체됐다.
세 번째 토교대는 일본군으로 끌려와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중국군에게 포로가 된 한적(韓籍) 사병들로 편성됐다. 이들은 1945년 5월부터 “중국 각 포로수용소에 수용 중인 모든 한국적 포로들은 감화를 거친 뒤 한국광복군에 이관한다”라는 ‘원조한국광복군판법(辦法)’의 발효에 따라 석방되면서 32명이 토교에 집단 수용된 것이다.
다음 날 우리가 찾은 바난구(巴南區) 류자완(劉家灣) ‘남천집중영’ 일대는 과거 포로수용소의 흔적으로 보이는 퇴락한 황토 가옥과 담장 등 일부만이 남아 있었다. 임정은 1945년 3월, 이 포로수용소가 수용하고 있던 한인 포로를 면담하고 나서 이들을 광복군으로 선발했다. 1945년 5월 광복군 총사령부의 부위(副尉, 중위) 윤경빈과 선우진(이상 1990 애국장)이 이들을 인계받아 토교마을에 수용한 것이다. 두 장교는 바로 장준하와 함께 온 두 번째 토교대 출신이었다.
‘우리가 이겼다’ 아닌 ‘왜놈이 항복했다’…토교 떠나 귀국길에
정정화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곳은 1945년 8월 10일께, 초여름부터 살림하던 충칭 시내의 한국독립당 당사 2층에서였다. 수당은 그 역사적 사건을 “우리가 이겼다. 나라를 찾았다.”가 아니라 “왜놈이 항복했다!”라고 표현하게 된 상황이 개운치 않았다. 이 소식에 당혹스러워 한 것은 “착잡한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고 한 양우조도 마찬가지였다.
왜적의 항복을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라고 썼던 백범과 마찬가지로, 수당은 이 느닷없는 소식 앞에서 한인들이 이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라, ‘곁꾼’에 그쳤다는 것을 희미하게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26년간이나 망명정부를 지켜왔으나 끝내 미국·영국·소련에 승인을 거부당한 약소국의 비애이기도 했다.
수당은 9월에 토교로 돌아갔다. 11월 초에 먼저 상하이로 떠난 임정 요인들에 이어 버스 여섯 대에 나누어 탄 나머지 가족들이 토교를 떠나 상하이로 향한 것은 이듬해 1월 하순이었다. 1946년 5월 12일, 상하이에서 미군 수송선을 탄 수당과 임정 가족들은 사흘 만에 부산항에 닿았다. 수십 년, 혹은 십수 년 만에 돌아온 조국, 당시 해방정국은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2021. 3. 3. 낮달
1차 답사(2015.1.2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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