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⑥] 일본군 위안소와 난징 대학살
경남에 거주하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효순 할머니의 부음을 전해 들으면서 나는 난징에서의 둘째 날, 호텔에서 지척이었던 리지샹(利済港) 2호에 있는 ‘긴스이루(樓)’를 떠올렸다. 2014년에 장수성(江蘇省)의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 유적은 굳게 잠겨 있었으므로 우리는 출입문 사이로 보이는 퇴락한 건물 앞에 세워진 표지석밖에 찍을 수 없었다.
난징 리지샹 위안소, 그리고 박영심
리지샹 위안소는 면적이 6700㎡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에 세운 위안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위안소 유적이다. 시멘트 담장과 가림막 너머 낡고 황량한 대형 건물 7동이 뉴스의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이곳이 일본군 위안소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2000년, 여기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던 조선인 위안부의 생존 사실이 확인되면서였다(관련 기사 : 부음에서도 밝히지 못한 이름, 할 말을 잃었다).
그이가 당시 북한에 생존해 있다가 이제는 고인이 된 박영심(1921~2006) 할머니다. 평남 출신의 할머니는 17살이던 1939년, 난징의 위안소에 끌려와 긴스이루에서 3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1944년 연합군이 촬영한 일본군 위안부 포로 사진에 임신한 모습으로 찍힌 이가 바로 그이다.
이 비극적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귀국 후 위안부 생활의 후유증으로 힘들게 살아온 할머니가 2000년에 일본군의 전쟁범죄 행위를 단죄하기 위한 ‘여성 국제전범 법정’에 참석하는 등 피해 실상을 알리는 데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어야 했던 할머니는 지금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그이를 비롯하여 ‘위안부’들이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의 시간은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책임과 배상의 주체인 일본은 침묵하고 있고, 아베 일본 총리는 최근 미국 방문에서 2차대전에 대한 반성을 표명하면서도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는 끝내 회피하는 기만적 태도를 보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중국 침략전쟁 기간, 위안부 제도를 실시하면서 전국의 20여 개의 성(省)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이 위안소에는 수십만의 중국 부녀자들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 여성들도 위안부로 혹사당해야 했다.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면서 바로 위안소를 설치했다. 난징 점령 후, 주둔군이 비교적 많았기 때문에 일본군 참모부 제2과에서는 난징 위안소 건립안을 제출, 군부의 심의를 거쳐 이를 확정했던 것이다. 난징대학살 기간 중에도 부후강과 철관항 등 두 군데의 위안소가 세워졌다.
일본군이 난징에서 운영한 위안소는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40여 개소에 이른다. 일본군 위안소 문제 연구의 권위자인 난징사범대 역사학과 징성훙(經盛鴻) 교수에 따르면 위안부 제도는 당시 일본 군국주의 정부의 중요한 국책이었다. 난징의 위안소는 난징 점령 후, 중지나(中支那) 방면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의 지시로 설치되기 시작했다.
마쓰이가 위안소 설치를 지시한 것은 민간인 학살과 부녀자 강간, 성병 만연 등으로 일본군의 질서가 무너지고 전투력이 저하되는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래서였던가, 난징은 일본군이 지배한 8년 동안(1937~1945) 위안소와 위안부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됐다.
일본군은 초기에는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위안부들을 대거 데려오기 어려웠으므로 예하 각 부대에 우선 자체적으로 임시 위안소를 설립하도록 했다. 이들 부대는 납치하거나 강제 연행한 중국 여성들로 위안소를 운영했다. 그 뒤에는 한국 등에서 끌려온 여성들을 위안소에 투입했다. 고 박영심 할머니가 리지샹 위안소에 끌려온 때(1939)는 대략 이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군사적 수단의 하나로 위안소를 설치했다. 군(軍)이 관리·감독하는 위안소를 설치한 것은 일반 여성에 대한 강간 방지, 병사의 성병 예방과 사기 고양, 정보 누설 방지 등 군사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위안소 설치 이후에도 일반 여성에 대한 일본군의 강간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난징의 상주제 위안소 벽 위에 씌어 있다는 일본어 낙서는 위안소를 찾은 병사들의 심리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병사들이 승자의 오만한 태도로 ‘위안부’를 능욕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게 해 주는 것이었다.
“개선하고 돌아온 사병이 이 방에 어찌 들어갈 수 없겠느냐. - 보병 145연대 이케다 부대”
난징에 아직 남아 있는 위안소 가운데 ‘안락(安樂)주점 위안소’는 주로 한국 여성들과 중국 여성들이, ‘동운(東雲)위안소’는 주로 한국 여성들이 끌려가 있던 곳이었다. 당시 일본군 제15사단 군의부 위생업무 기록인 난징과 전장 등 4개 지역의 위안부 검사 연인수(延人數)에 따르면 반도인(조선반도 출신자)은 159명이었다.
남은 이 52명, 회복되지 못한 시간
우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는 238명이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아갔으리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 있다. 일본군의 폭행과 학대로, 병사를 따라 각 지역을 전전하다가, 지옥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려 탈출을 시도하다가……, 그예 돌아오지 못한 이는 얼마이며, 돌아왔으나 내로라 나서지 못한 이는 또 얼마일까.
그런 뜻에서 정부에 피해 사실을 등록한 이들은 자신의 온 생애를 걸고 일제의 저 가공할 폭력과 역사왜곡에 맞선 이들이었다. 생애 한번뿐인 ‘아름다운 고백’을 통해 그들은 오욕과 야만의 역사를 바로잡으려 하고 있지만, 여전히 일본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들 할머니들은 차례로 세상을 떠나 이제 남은 이는 52명뿐이다.
난징대학살은 ‘위안부’ 문제와 함께 일본의 악을 상징하는 치명적 약점이다. 1937년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양쯔강을 피로 물들이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중국군은 투항을 거부했다.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 일본군은 12월 13일, 난징을 점령하고 성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피난을 떠나지 못한 채 성안에 남아 있던 50~60만의 시민들은 공황 상태 속에서 일본군을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1938) 2월까지 6주간에 걸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최대 30만이 희생된 아시안 홀로코스트(Holocaust), 이른바 ‘난징의 대도살’이었다.
1937년 12월 13일, 대학살의 시작
일본군이 난징에 도착할 무렵 모든 중국인 포로를 죽이라는 명령이 부대 내 하급 장교들에게까지 하달되었다. 난징을 점령한 12월 13일, 일본군 66대대가 받은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전투지침
(…)
- 모든 포로들을 처형한다.
- 처형방법 : 포로들을 12명씩 나누어 총살한다.
- 아이리스 장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The Rape of Nanking)>(미다스북스, 2014) 중에서
난징대학살의 주요 책임자로 꼽히는 중지나(中支那) 방면군 휘하 제16사단장 나카지마 게사고(中島今朝吾)는 일기에서 “포로는 남기지 않고 전부 처리한다”는 대학살 방침을 기록했다. 제6사단(사단장 타니 히사오) 사령부에서도 “여성과 어린이를 막론하고 중국인이면 모두 살해하고 집은 불사른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군들은 ‘전쟁포로의 처리’ 문제 따위를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포로들을 죽이면 식량문제도 해결될 뿐 아니라 혹시 모를 이들의 보복도 예방할 수 있다고 여겼다. 무푸산(幕府山) 근처에서는 5만 7천 명의 민간인과 중국군 포로들이 살해되었다. 이는 난징에서 벌어진 학살 행위 가운데 단일 사건으로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첫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은 자신들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 살육은 아침부터 밥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2천 명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이런 처형 방식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을 난사했다. 타 타 타! 포로들은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일본 중국 특파원 유키오 오마타의 기록(위의 책)
이 대학살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희생당한 여성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게는 2만 명에서 많게는 8만 명 정도의 난징 여성이 강간당한 것으로 추산될 뿐이다. 여성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병사들에게 잔인하게 짓밟혔다.
일본군의 잔인성은 가족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기도 했다. 일본군은 아버지에게 딸을, 오빠에게 여동생을, 아들에게 어머니를 강간하라고 협박했다. 이에 대한 거부는 죽음이었다. 난징대학살에 대한 보고서로 불리는 아이리스 장(Iris Chang, 張純如)의 책 이름이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1997)인 이유다.
군인들을 갓난아기를 총검으로 찔러 산 채로 끓는 물에 던져 버렸다. 군인들은 열두 살짜리 소녀부터 여든이 된 할머니까지 가리지 않고 윤간했고 이들이 자신의 욕구를 더 이상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그 즉시 죽여 버렸다. 내가 목을 베거나 불태워 죽이거나 산 채로 파묻은 사람이 200명이 넘는다. 나 자신이 그런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다니 정말 끔찍하다. 나는 인간이 아닌 악마였다. - 나가토미 하쿠토(위의 책)
셀 수 없을 만큼 강간이 자행되었지만 강간으로 아이를 출산했다고 증언한 중국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 아이들은 태어나는 대신 비밀리에 죽음을 당했다. 죄의식과 수치심, 자괴감에 시달린 중국여성들은 사랑할 수 없는 자식을 기르느니 차라리 영아 살해를 선택한 것이었다.
지옥에서 꽃핀 인간애, 국제위원회의 ‘난징안전지대’
6주에 걸친 대학살 기간 동안 난징은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고 말해도 좋았다. 그러나 이 절망적 인간성의 나락 가운데에도 인간의 이타적 선성(善性)을 확인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국제위원회를 구성하여 난징대학교, 진링(金陵)예술과학대학, 미국대사관 등이 있는 지역을 일본군이 들어올 수 없는 ‘난징 안전지대’로 설정해 이곳으로 들어온 중국인들에게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했던 것이다.
선교사, 의사, 교수, 기업인에 지나지 않던 몇 십 명의 이방인들은 5만의 일본군에 맞서 수많은 난징시민을 구해냈다. 안전지대는 20~30만 명 정도의 피난민을 수용했는데 이는 피난을 떠나지 못한 난징 전체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나머지 절반은 일제에게 희생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니 그들의 구명활동은 가히 기적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이 국제안전지대의 전설적 지도자는 ‘살아 있는 부처’, ‘중국의 오스카 쉰들러’로 불린 독일인 사업가 욘 라베(John Heinrich Detlev Rabe, 1882~1950)였다. 지멘스 차이나의 직원이기도 했던 이 나치 지지자는 자신의 소유지를 피난자들에게 내놓으며 난징 시민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또 ‘난징의 살아 있는 여신’으로 불린 선교사이자, 진링여자예술과학대학의 학장 미니 보트린(Minnie Vautrin, 1886~1941)은 대학교 안에 대피소를 제공하면서, 약 만 명의 여자와 어린이의 생명을 구해냈다.
이들은 자신의 지위는 물론이거니와 생명의 위험마저 감수하면서 일본군으로부터 난징 시민의 목숨을 구하는 데 진력했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기록과 필름 등을 통해 일본군의 학살을 증언하여 난징의 진상을 세계에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난징 국제적십자사의 대표이자 아마추어 영화 제작자였던 존 마기(John Magee, 1884~1953)는 난징 대학병원에서 중요한 장면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16밀리 네거티브 필름 8롤에 담긴 이 영상은 난징 YMCA 대표 조지 피치(George Fitch)가 목숨을 걸고 낙타털 코트 속에 숨겨 난징 밖으로 반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 안전지대 지도자들이 기록한 ‘난징의 진실’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고국으로 돌아간 욘 라베는 귀국 후 난징대학살을 고발했다가 게슈타포의 조사를 받았으며 반강제적으로 은거했다. 만년에 그는 가난에 시달렸고 1950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난징대학살에 관한 2천 쪽 이상의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그 손녀에 의해 반세기 후에 공개되었다.
미니 보트린은 1940년 본국으로 돌아간 지 1년 만에 자책감과 참상을 목격한 후유증으로 자살했다. 종전 후 중국 정부는 보트린에게 난징 대학살동안 그녀의 희생을 기리는 ‘Emblem of the Blue Jade’를 수여했다. 욘 라베도 사후, 그의 비석이 1997년 베를린에서 난징으로 옮겨졌으며, 난징 학살 기념지 안의 ‘영예로운 곳’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용기와 헌신은 그 보상 너머에 있는 고결한 것이었다.
시민 상대 생체실험, ‘Ei 1644 부대’
일본군이 난징에서 저지른 악은 이뿐이 아니다. 그들은 난징 시민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도 자행했다. 1939년 4월 일본군은 의학연구 기관을 설치하고 ‘자이모쿠(통나무)’라는 실험 대상을 모아 연구했다. 이 기관이 ‘이아이(Ei) 1644부대’다.
일본군은 중국인 죄수나 포로에게 독극물, 세균, 독가스를 주입하는 등 이들을 실험에 이용했다. 아세톤, 비소, 시안, 질산, 청산가리를 비롯해 코브라 독사에서 추출된 독도 사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매주 140여 명의 포로가 죽었고 그 주검은 소각로에서 불태워졌다.
난징대학살의 사상자수는 여러 갈래로 엇갈린다. 중국의 군사 전문가 류 팡 추는 43만 명, 극동 군사재판소의 재판관들은 26만 명 이상, 일본의 역사학자 후지와라 아키라는 20만 명을 주장한다. 일본의 극우 세력들은 ‘날조’와 ‘허구’라며 난징대학살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난징의 진실은 숫자에 있지 않다. 희생자의 수가 적다고 해서 그것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야만과 반문명의 잔혹한 범죄행위라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 대학살의 주범들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졌다. 악명 높은 ‘100인 목 베기 시합’을 벌인 노다 다케시·무카이 토시아키 중위는 비겁하게 범행을 부인했지만 총살형에 처해졌다. 중지나 방면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와 6사단장 타니 히사오는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16사단장 나카지마 게사고는 지병으로 죽고 없어 단죄를 면했다.
답사단의 마지막 여정인 난징대학살 참사 동포기념관은 난징에서 자행된 이 끔찍한 인류적 범죄를 완벽하게 기록, 전시하고 있었다. 1937년 12월 16일, 일본군이 무장을 해제한 중국군과 평민 1만여 명을 학살한 강동문(江東門)의 ‘만인갱(萬人坑, 만인의 주검을 묻은 구덩이)’ 유적지 위에 세워진 거대한 기념관을 한 바퀴 돌아 나오자 난징대학살의 전모가 어렴풋하게 손에 잡힐 듯했다.
기념관 전시 포맷은 난징 시민을 비롯한 중국인들이 겪어야 했던 중일전쟁과 학살 참상의 사실적 재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날의 원한을 환기하기보다는 미래의 희망과 평화를 이야기한다. 기념관 입구에서 만나는 것은 죽은 자식을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를 조각한 ‘가파인망(家破人亡)’이다. 그러나 기념관 관람의 끝은 학살당한 이들의 유골 진열실을 거쳐 제사장과 추모청을 지나 이르게 되는 평화공원이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 비둘기를 받쳐 든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거대한 조각 입상 ‘화평(和平)’은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를 갈망하는 중국인민의 염원을 표현했다고 한다. 결국 이 기념관이 웅변으로 전하고 있는 것은 ‘전사불망(前事不忘) 후사지사(後事之師)’, ‘지난 일을 잊지 말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자’는 중국과 중국인의 다짐이다.
전후 70년, 배상도 사과도 없는 일본의 전쟁범죄
전쟁이 끝나고 70년이 지났다. 그러나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일본은 아직도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국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어떠한 배상도 하지 않았고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위안부였거나 일본군에게 능욕당한 여성들은 ‘강압에 의한 성적 노예’가 아니라 ‘자발적 매춘부’였다고 강변하는 등 일본의 역사왜곡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역사 시간에 홀로코스트(Holocaust)를 가르치지 않으면 불법으로 간주되는 독일과 달리 일본에서 난징대학살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교과서에 언급되지 않고 누락되어 왔다.
난징대학살의 진상을 새롭게 알린 작가 아이리스 장(1968∼2004)은 난징이 남긴 마지막 교훈은 “사람들은 이런 대량 학살을 받아들였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사건에 대해 수동적인 방관자가 되었다”는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비참한 교훈’이라는 것이다.
난징은 수만의 여성이 미친 병사들에게 강간당한 곳, 30만에 이르는 사람들, 아이·어른·노인·여자가 도륙당한 도시다. 식민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마흔 개가 넘는 위안소에서 수십, 수백의 병사에게 학대당했던 도시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서와 마찬가지로 난징에서의 강간과 학살을 방관자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이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삶과 죽음에 대한 아픔과 슬픔을 공감할 줄 아는 한, 우리가 스스로를 ‘인간’으로 매기는 이상은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난징대학살의 진상에 관해서는 아이리스 장의 저작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The Rape of Nanking)>(미다스북스, 2014)>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중국계 미국인인 아이리스는 취재과정에서 얻은 우울증과 일본 극우세력의 협박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명복을 빈다.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온 ‘청년백범’의 답사는 난징에서 그 첫 여정을 접는다. 80년 전, 19세기로 거슬러 오른 이 여정을, 한갓진 호사 취미가 아니라 역사와 그 진전을 확인하는 시간으로 갈무리하기 위해 우리는 꽤 열심히 공부했다.
역사의 순간들, 그 갈피마다 밴 땀과 피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지나간 역사지만 그 당대성에 담긴 시간의 무거움을 깨치는 것은 적지 않은 감동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제 못다한 여정, 창사에서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충칭에 이르게 될 두 번째 여정을 설렘으로 기다리기로 한다.
2015. 6.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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