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⑫] 충칭(重慶)②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일본의 패망, 그리고…
답사의 마지막 날은 충칭의 롄화츠(연화지 蓮花池) 청사와 복원된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을 찾는 일정이었다. 롄화츠 청사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1919년 임정을 수립한 뒤 20년 넘게 이어온 항일 투쟁을 수렴하면서 광복을 맞을 때까지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간 행정과 군사의 사령탑이었다.
‘민족 대표와 독립운동 중심기구’로서의 위상 회복한 충칭 임정
상하이를 떠난 이래 8년여 동안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와 류저우, 치장을 거쳐온 임정은 전쟁으로부터 비교적 안정된 지역인 충칭에 정착하면서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임정은 충칭에 오기 전인 1940년 5월 민족주의 세력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함으로써 세력 기반을 넓히고 3당의 역량을 결집했다.
1940년 10월 임시의정원은 헌법을 개정하여 ‘국무위원제’를 단일 지도체제인 ‘주석제’로 바꾸고 국무위원회 주석에 김구를 선출했다. 이로써 국무회의 진행자에 그친 기존 주석과 달리 백범은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충칭 시기의 임정이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 중심기구로서 위상을 되찾아 본연의 역할을 수행”(한시준)했다고 평가되는 이유다.
롄화츠 청사는 충칭의 마지막 청사였다. 1940년 9월, 충칭으로 옮겨온 임정은 양리유지에(楊柳街), 스판치에(石板街), 우스예강(吳師爺巷)을 거쳐 1944년 하반기에 이곳으로 옮겼다. 청사 네 곳 가운데 유일하게 보존된 롄화츠 청사는 원래 1929년에 바위 계곡에 지은 호텔이었는데 임정이 세를 내고 쓰다가 이듬해 해방을 맞은 곳이다.
롄화츠 청사는, 1994년 우리 독립기념관과 충칭시와 청사 복원협정을 맺고 이듬해 8월 복원한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舊址) 진열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보수·복원한 건물이지만, 90살을 넘긴 3층짜리 건물은 튼튼해 보였고 국무위원 회의실과 주석실, 주석 접견실 등을 갖추고 있어서 비록 망명정부지만, 정부 청사로서 손색이 없었다.
청사는 가운데 계단을 두고 양쪽에 사무실을 배치하는 형태인데, 이 계단이 1945년 11월 3일, 백범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충칭을 떠나면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박은 곳이다. 우리도 ‘백범의 계단’으로 불리는 계단에서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었다. ‘개인’ 자격으로 조국으로 돌아가게 된 75년 전 그날, 미소조차 띠지 않은 임정 요인들의 심사는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충칭의 임시정부는 9월 17일 시내 자링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베풀고 광복군을 창설했다. 이틀 전, 광복군 창설위원장 김구의 명의로 발표한 ‘한국광복군 창군선언문’에서 광복군은 1919년 12월에 제정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따르고, 임정이 통수권을 보유하며,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창설한다는 사실을 천명했었다.
임정, 중국의 ‘예속’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광복군 창설
‘장제스의 허락’을 굳이 명시한 것은 임정이 ‘광복군은 중국 군사위원회(아래 군사위)에 예속해야 한다’는 중국 측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서다. 광복군의 예속 문제가 걸림돌이 되자, 임정과 백범은 중국 군사위의 양해와 협조 없이 독자적으로 광복군 창설을 추진하고 창설 사실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었다.
임정과 한국독립당, 임시의정원 인사들과 내외신 기자들 외에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 참석한 내빈 200여 명 가운데 중국 측 인사로는 충칭 위수사령관 유즈(劉峙) 장군과 쑨원의 아들 쑨커(孫科)가 있었다.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 둥비우(董必武)는 측근을 대신 보냈다.
임정은 이틀 뒤에 중국 측에 광복군 창설을 알리고 광복군의 훈련과 편제 등의 사항은 중국 측 지시를 따르겠다며 이의 승인을 요청했다. 또, 10월 9일 임시의정원은 주석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조직조례’를 제정 공포했다. 조례는 제1조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의 직할에 둠”이라고 규정하여, 임정 주석에게 통수권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광복군 창설 기본계획은 우선 ‘지휘부인 총사령부를 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부조직인 지대(支隊)를 편제해가며 조직을 갖춘다’라는 것이었다. 광복군은 총사령에 지청천(1962 대통령장), 참모장에 이범석(1963 대통령장), 총무처장에 최용덕(1962 독립장), 참모처장에 채원개(1968 독립장), 부관처장에 황학수(1962 독립장) 등을 임명했다.
그리고 총사령부 예하에 4개 지대를 편성하고, 제1지대장 이준식·제2지대장 김학규(이상 1962 독립장), 제3지대장 고운기(공진원)·제5지대장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장 나월환(이상 1963 독립장)을 임명하였다. 제1지대는 충칭에, 제2지대는 시안(西安), 제3지대는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본부를 두었다.
광복군은 총사령부를 시안으로 옮기면서 공식활동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이 점령한 화베이(華北) 지역과 가까운 시안은 1년 전 군사특파단을 파견한 곳이었다. 시안에는 약 20여만 명의 한인들이 살아 이들에 대한 선전 활동과 병력 모집이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1940년 11월, 임정은 중국 당국과의 협의를 위해 총사령과 참모장은 충칭에 남게 하고, 부관처장 황학수를 ‘서안 총사령부 잠정부서’ 총사령 대리로 임명, 이들을 시안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광복군의 활동은 이내 군사위의 통제와 저지에 부딪혔다. 임정은 중국의 인준을 받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중국의 태도는 단호했다. 인준은 1년을 넘긴 1941년 11월 15일, 군사위에서 한국광복군을 통할·지휘한다는 방침을 결정하면서 간신히 이루어졌고, 군사위는 시안에 있던 총사령부를 충칭으로 이전하도록 명령했다.
군사위는 이어서 광복군을 “군사위에 직속시키고 참모총장이 운용을 장악한다”면서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을 규정하여 이를 따를 것을 요구했다. 이 준승의 제2항은 한반도 진공(進攻)도 장제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등, 광복군에 대한 임정의 통수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었다.
이에 임정은 9개 준승 취소를 위한 대중국 교섭을 끈질기게 벌였으나 준승이 취소된 것은 2년이나 지난 1944년 9월 8일이었다. 임정은 준승을 대체하고, 광복군에 대한 중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새로운 군사협정 체결을 중국 측에 요구하여 이 협정은 1945년 4월에야 체결되었다.
1941년 일본에 선전포고, 광복군 조선의용대와 통합
1941년 12월,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김구 주석과 외무부장 조소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비록 소규모긴 해도 군대를 보유한 정부로서 최초의 선전 포고였다. 임정은 이듬해 1월, 중국국민당 정부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했고 3월 1일에는 ‘3·1선언’을 발표하며 중, 미, 영, 소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했다.
같은 해 4월 20일, 임정 국무회의는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합편하기로 했다. 1938년 10월 김원봉이 결성한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최초로 창설된 군사 조직이었다. 100여 명 규모였지만, 의열단과 황푸군관학교 등 군사학교 출신의 군사 간부들로 구성된 의용대는 중국 전선에 배속되어 중국군과 함께 전투를 수행했다.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던 대원들은 선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면서 의용대에 지원한 한인들과 한적 포로를 받아들여 병력이 3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들은 조선의용대의 활동을 성찰하고 새 진로를 모색하다가 충칭의 본부 등을 제외한 대원 80%가 1941년 화베이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타이항산(太行山)의 중국공산당으로 구성된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하여 활동하다가 1942년 조선의용군으로 재편되었다.
조선의용대를 지원해 온 중국 군사위에서는 이에 큰 충격을 받았고, 한국 독립운동 무장세력을 분명히 장악하고자 했다. 군사위가 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을 요구한 게 이때였다. 군사위는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군사적 통일을 요구했다.
결국,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으로 파견한다는 것과 조선의용대는 광복군의 제1지대로 개편한다”는 군사위의 명령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1942년 7월 광복군 편입을 공식 천명하는 ‘조선의용대 개편선언’을 발표했다. 12월 김원봉이 광복군 총사령부 부사령 겸 제1 지대장으로 취임함으로써 중국 관내에서 활약하던 무장 독립운동 세력은 모두 광복군으로 통합되었다.
일본의 항복과 광복군의 ‘연대와 연합 패배’
광복군은 창설 초기부터 초모 활동에 주력했고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훈련반 등으로 한인 청년을 일정한 기간 군사 훈련을 시켜 광복군으로 편입했다. 1945년에는 안후이성 푸양에서 모집된 병력으로 제3지대(지대장 김학규)로 편제하면서 1·2지대(지대장 김원봉·이범석)와 함께 3개 지대를 갖추었다.
이후 광복군은 소수 병력임에도 1943년 8월 주(駐)인도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인면(印緬 인도·미얀마) 전구공작대를 파견하여 임팔 전선과 버마 탈환 작전에 참여하였고, 중국에 파견된 미국전략사무국(OSS)과 협약을 맺고 특무 공작훈련을 시행하였다.
일제가 조선에서 징병을 시행하면서 4천 명이 넘는 한인 청년이 일본군에 편입되었는데 이들이 탈출하여 훈련을 받고 광복군으로 거듭난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토교마을을 거친 2차 토교대의 장준하 등은 광복군 제2·3지대를 중심으로 OSS의 훈련을 받고 국내에 침투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3개월 훈련을 마친 이들 1기생이 배출된 지 11일 후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이 작전은 무산되었다.
국내진공작전의 무산은 단순히 1개 작전의 취소로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 남쪽에 진주한 미군은 임정을 인정하지 않고 광복군에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다.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물론, 광복군은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국력의 격차나 망명정부로서의 한계 때문이긴 했지만,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싸움에서 적에게 패배한 게 아니라, 우군으로부터 전우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연대와 연합의 패배’였다.
임정의 조국 광복 실천 3단계 가운데 한국광복군은 1기 ‘대적혈전기(對敵血戰期)’를 넘겼으나, 2기인 ‘임정의 국내 이전’ 앞에서 좌초한 상태로 어정쩡하게 3기인 ‘복국(復國) 완성’과 맞닥뜨린 것이었다. 오매불망 바랐던 일본의 패망 앞에 임정과 광복군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개인’으로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2019년에 충칭시 쩌우룽(鄒容)로 37호에 복원·개관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대(竹)로 만든 2층 건물’(김준엽, 회고록 <장정(長征)>)에서 날아갈 듯한 3층 슬래브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전시실에는 확대한 광복군 관련 사진 자료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80여 년 전의 역사를 환기하고 있었다.
찍어온 사진 자료를 돌려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자신이 당한 듯한 일종의 열패감과 모욕감이다. 이국땅에 와서 수십 년간 설움을 겪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킨 ‘망국의 군대’는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이 역사 앞에 당당히 맞선 이들에게 역사는 모든 것을 내려두고 몸만 돌아가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게 역사라면 최악의 조건 에서 거기 응전(應戰)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인가.
뒷사람의 한갓진 상상으로 그들의 통분과 눈물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조국이 그들의 희생과 통분을 딛고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독립군이든 광복군이든, 일제와 싸우다 이국땅에서 스러지거나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온 모든 대원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2021. 3.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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