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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경축 현수막 사회’를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19.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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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출세의 여정을 단위사회가 추인하고 격려하는 오래된 관행

 

▲ 대학, 사법시험, 행정고시 등 합격 현수막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사회'(?)의 증거물이다.

인터넷에 강원도 교육청이 학교와 학원에 홍보성 현수막 설치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하고 나섰다는 소식이 떠 있다. 학교 위계 서열화와 지나친 경쟁을 조장한다는 이유다. 상급학교 진학, 출세한 동문 등을 알리는 일도 마찬가지. 이는 공해에 가깝고 예산 낭비라는 이유도 덧붙었다.

 

곳곳에 현수막이 차고 넘친다. , 이 땅은 현수막 국가라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경축 머리말을 단 현수막은 종류도 여러 가지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역시 학교나 학원에서 내건 명문 학교 입학을 축하하는 것이다. 비슷한 종류로 행정고시나 사법시험, 기술사 시험 합격 현수막이 있고 박사 학위 취득이나 장군 진급 축하 현수막도 있다.

 

현수막 사회, ‘부친 이름을 두드러지게 하다?

 

입시 철에 학교와 학원 근처, 목 좋은 네거리 따위에 마구 내걸리는 현수막은 주로 명문 학교 입학 성적을 자랑하는 것이다. ‘명문대 합격은 기본이다. 과학고와 외국어고 합격은 학원별로 합격자의 학교 이름까지 밝힌 그야말로 족보가 걸린다. 얼마 전에 보니 한 학생의 민족사관고 합격 소식은 거의 전 시가지에 걸리는 듯했다.

 

각종 고시나 사법시험 따위의 합격은 출신 중고교를 졸업한 지 한참 후에 이루어진다. 사학이면 다소 다르지만, 공립학교일 땐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교사들 가운데도 그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누가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현수막이 걸린다.

 

학교에서 직접 하지는 못하고 동창회 이름으로 건다. 그게 아마 공교육 기관으로 지키는 마지막 품위인지 모른다. 고시 합격은 대학 입학에 비길 게 아니다. 출신 고등학교와 출신 중학교에서 걸고 심지어 출신 초등학교에서조차 거니 당사자는 초중고 단계별로 확실하게 자신의 출세를 축하받게 된다.

 

고시 합격자의 경축 현수막을 볼 때마다 나는 궁금해진다. 근속자나 예전에도 지금 학교에 근무한 교사들에게 물어봐도 정작 당사자를 아는 이는 거의 없다. 동창회에서인들 어찌 알랴. 결국, 동창회도 후배 학생들도, 모교의 교사들도 전혀 모르는 가운데 의례적 축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하나씩 모교의 역사와 전통에 보태는 빛나는 승리의 전적(戰績)이라면.

 

 요즘 들어 가끔 눈에 띄는 것은 그 부모의 이름까지 내건 현수막이다. 주로 ○○리 아무개 자() ○○고시 합격이라는 형식인데 주체는 같은 동네 사람들인 듯하다. 이런 현수막은 시골로 갈수록 더 의젓하게 붙어 있는 것 같다. 흔하디흔한 박사 학위 취득도 시골에선 축하의 물목(!)에서 빠지지 않는다.

 

 <소학(小學)>에 이르기를 몸을 세워 도리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 널리 드날리게 하여 부모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나게 함이 효도의 끝마침이라 했으니 이들은 거기서 이른 를 몸소 실천한 셈이 되었던가.

 

두어 해 전에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이 취임했을 때 나는 예천군 용궁면에 걸린 취임 축하 현수막을 보았다. 예천이 그의 고향이었던가 보았다. 나는 민주노총 위원장의 고향에서도 저런 현수막을 달까를 잠깐 궁리해 보다가 싱겁게 웃고 말았다.

▲ 밀양의 경축 현수막. 개인 성취를 축하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 <경향>

전도연 주연의 영화 <밀양>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밀양시의 한 동네에서도 축하 현수막을 달았다. 글쎄, 그 현수막은 자기 동네를 다룬 영화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고마움의 표현이었으니 여느 현수막과는 성질이 달랐다고 하겠다.

 

홍보를 위해 거는 학원이나 학교의 현수막과 달리 동네 사람들이 거는 현수막의 성질은 또 다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에 도사린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란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이웃의 행운이 자신의 불운을 확인시켜 주는 셈인데도 기꺼이 주머니를 털어 축하 현수막을 거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은 기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출세는 지역·학교공동체에 어떤 헌신과 봉사로 돌아오는가

 

그들은 공개적 축하의 인사를 건넴으로써 자신들도 덩달아 계층상승을 이루었다는 심리적 만족감을 공유하는 것일까. 자사고나 특목고에 대한 서민들의 계급 배반적인 태도가 언제나 자기 자식들도 기득권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관행으로 현수막을 걸어 축하하는 사시와 고시 합격을 출신 학교나 지역의 명예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한 일일까. 그 어렵다는 시험에 합격한 이들에게 펼쳐질 출세의 여정이 어떤 방식으로 학교나 지역의 명예로 돌아오는 것일까. 그게 그들 개인의 출세와 명예를 넘어 어떻게 지역과 학교공동체의 명예와 자랑이 되는지를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특정 학교나 지역 출신의 법조인이나 관료가 많다는 사실은 일종의 배타적 차별성이나 특권의 기초로 이해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나 희생을 기리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의 전통이 취약한 한국 사회에서 그런 차별의식은 뒤틀리고 기만적인 특권의식-, ○○ 출신이야!-을 길렀는지도 모른다.

 

이 땅의 어디서나 만나게 되는 현수막과 거기 기록된 출세와 선민이란 아무도 이등은 기억해 주지 않는승자독식 사회의 천박한 규칙이다. ‘개인 출세의 여정을 단위사회가 추인하고 격려하는 이 오래된 관행은 대다수 성실한 삶을 실패의 범주에 밀어 넣는 미필적 고의같아 보이기도 하다.

 

뜻하지 않은 격려와 축하를 받으며 출세의 여정을 시작한 이들 법조인·관료 후보들은 뒷날 자신의 첫 출발을 기려 준 학교와 지역 공동체에다 어떤 헌신과 희생을 준비할까. 계급 상승의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뛰어오른 이들은 자기 기득권의 성채를 지키는 충실한 파수꾼 노릇에 주저앉기 쉽지 않을까.

 

며칠째 진행되는 청문회에 선 공직 후보자들은 머리 좋아 일찌감치 출세의 사닥다리를 올라온 사람들이다. 국민 앞에 고스란히 드러난 위장 전입과 부동산 투기, 위장 취업 등, 이들은 온갖 위법적 처신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지켜온 성취와 안락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 헌신과 희생으로 국민에게 봉사하고자 한 것이 아님은 분명한 일이다.

 

공동체의 헌신과 봉사가 아니라 개인적 입신과 영달로 이어지는 사다리에 오르는 이들에게 보내는 이웃들의 축하와 격려는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우리 사회, 지역과 학교공동체가 진실로 이들에게 보내야 할 메시지는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의 공감 능력을 기르라는 것이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2010. 8.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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