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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돛과닻’, 혹은 ‘낮달’을 위한 변명

by 낮달2018 2019.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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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아이디(ID) ‘돛과닻’에서 ‘낮달’까지

아이디로 쓰고 있는 ‘낮달’에 대한 변명이다. 2007년에 <오마이뉴스> 블로그에서 처음 쓴 이름이 ‘돛과닻’이었다. 그보다 앞서 ‘다음’과 ‘천리안’에 잠깐 머물 때에는 ‘낮달’을 썼다. 오블에 정착하면서 쓴 ‘돛과닻’을 2년쯤 쓰다가 다시 ‘낮달’로 돌아간 얘기가 ‘변명 하나’다. 변명 둘은 그보다 2년 전인, 오블 초기에 쓴 ‘돛과닻을 위한 변명이다.

 

호적에 기록된 제 이름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웹에서 쓰는 아이디는 저마다 이런저런 뜻을 붙여서 나름의 개성적인 이름을 쓴다. 10년도 전의 일이라, 그걸 시시콜콜 설명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시 읽어보아도 무어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도, 그걸 굳이 해명해야 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그걸 다시 여기 붙이는 것은 글을 쓰고 블로그를 꾸려가는 이유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티스토리로 오니, ’낮달‘은 이미 누군가 쓰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다른 이름을 쓰기도 무엇해서 뒤에다 ’2018을 붙였다. 꽤 오래전에 찍은 낮달 사진이 공연히 애잔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이 탓일지도 모르겠다.

 

변명 하나, ‘돛과닻에서 낮달

▲ '낮달'은 말 그대로 낮에 나온 달이다.

블로그를 열고 옹근 이태가 지났다. 이름을 돛과닻으로 쓰고 그 사연(‘돛과닻을 위한 변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게 지지난해 1월 말께다. 그것은 한때 이름을 낮달로 바꾸었다가 다시 돛과닻으로 돌아온 변이기도 했다.

 

(……) 오랫동안 나는 ‘돛과닻’으로 살았다. 조직 활동을 쉬게 된 2004년께에야 나는 별칭을 <낮달>로 바꾸었다. ‘돛과닻’이 너무 무거웠던 탓이다. 낮에 나온 달은 별다른 소임이 없으니, 가볍고 유유자적하리라. 그게 별칭을 바꾼 까닭이었다. ‘낮달’로 지내온 이태 동안, 내가 얼마나 가벼웠는지, 얼마나 유유자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물이든, 이름이든 구태여 복잡한 의미를 붙일 일은 없다. 사람들은 그냥 뭇 이름 중의 하나로 ‘돛과닻’을 기억할 뿐이다. 이태 만에 다시 ‘돛과닻’으로 돌아온 데 대한 내 변명이다. 그리고 이제 더는 변명 따위를 하지 않고도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무심하게 바라고 있을 뿐이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나는 다시 이태 만에 낮달로 돌아가려고 한다. 변명하지 않고 넉넉하게 살아가겠다는, 이태 전에 뱉은 말이 민망하기는 하다. ‘복잡한 의미를 붙일 일은 없다고 했지만, 그간 나는 돛과닻이란 이름이 그려내는 의미망(意味網)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오마이뉴스> 블로그는 이미 정평이 나 있는 듯하다. 오블은 다른 포털의 블로그-무언가 좀 다른 발언을 하고 나면 뒤통수가 서늘해지거나 며칠간 대문간이 허전해지는 느낌을 피할 수 없는-에 비길 수 없다. 오블은 늘 편안하고 따뜻했다.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눈길은 저마다 다를 터이지만, 오블의 이웃들은 적어도 그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상식이고, 합리고, 사회적 의제와 민주적 가치에 대한 최소한의 동의 같은 거였다.

 

나는 좀 편하고 무심하게 삶을 바라보고 그걸 되뇌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은 그 거칠어 뵈는 어감에서 드러나는 딱딱하게 굳은 모습을 쉽사리 지울 수 없었던 것 같다. 좀 더 느슨하게, 좀 더 넉넉하게……. 여전히 날이 서 있는 자신의 마음 한자리를 넉넉하게 비워두고 싶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마음속에서 나날이 자라는 분노와 통한의 느낌들 앞에서 망연자실하곤 했다. 나이도 적지 않게 먹었는데도 강파른 성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이 여긴다.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끊임없이 노려보고 미워하고 구름처럼 피어나는 적개심을 가누지 못함을 다만 숨기려 할 뿐이다.

 

▲ 고흐,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

새해를 맞고, 새로 만날 아이들을 생각하며 나는 경계해야 할 것은 외부에 있지 않고 자신이라는 걸 뒤늦게 깨우치고 있는 중이다. 세계에 대한 가슴속 가득한 분노와 미움은 오히려 자신을 겨누는 칼끝 같은 것은 아닐까. ‘사랑하기 위하여 분노한다고 강변하면서도 정작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모르는 건 아닌가…….

 

물론 나는 어쭙잖은 타협이나 어정쩡한 현실 추수(追隨)’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이름자를 바꾼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러나 새봄을 기다리며 나는 그러기로 했다. 다행히 오블에서 자기 이름을 바꾸는 것은 간단한 일이니.

 

한글 아이디 낮달2005년 포털 다음의 블로그(<길위에서>)에서 반년쯤 썼다. ‘낮달은 그 전해 10월의 어느 주말에 내가 봉화 각화사(覺華寺) 뒤편의 태백산 사고(史庫) 터로 오르다 만난 반달이다. 그것은 허물어진 사고 터로 오르는 길 아닌 길의 화사한 단풍나무 숲 저 너머로 해사한 얼굴을 삐죽이 내밀고 있었다.

 

완만한 능선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안고 낮에 나온 반달을 바라보다 문득, 낮달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낮에 뜬 달은 마실 간 촌로처럼 느긋하고 넉넉할 터. 뒷짐이라도 지고 무던하게 세상을 기웃거릴 수 있지는 않을까…….

 

글쎄, 이태 동안 써 온 돛과닻을 버리려니 마음이 자못 서운하다. 다음과 천리안의 블로그를 닫을 때는 오히려 담담하고 허허로웠건만……. 이름자가 바뀐다고 해서 이웃들이 날 알아보지 못할 일도 없겠다. <이 풍진 세상에>라는 내 문패는 그대로이니.

 

그냥 어, 그랬던가 하고 무심히 흘려주시기 바란다. 바라건대, 올해는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내 눈길이 좀 부드러워지고 깊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분노를 뛰어넘는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 더더욱 좋겠다.

 

 

2009. 2. 25. 낮달

 

 

변명 둘, ‘돛과 닻을 위한 변명 

 

 

돛과닻이라는 이름을 쓰면서도 좀 생뚱맞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다. 팔팔한 이삼십대, 피 끓는 청춘도 아니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섰어도 한참 지난, 이 우울한 중년에 그 이름이 환기하는 명징한 의미는 다소 거북하기조차 하다.

 

초임 교에서 내게 국어와 문학을 배운, 지금은 불혹의 고개를 갓 넘긴 큰애기들은 그 시절의 내가 도저(到底)로맨티스트였다고 회고하는데, 나는 지금도 그게 긴가민가 싶기만 하다. 일전에 오블의 들꽃푸른님께서 내 글을 일러 화려한 로맨티시즘이라고 매겨 주셨는데,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나는 그럴 수 있겠다고 머리를 주억거리고 말았다.

 

돛과닻은 천리안 폐쇄사용자그룹(CUG) 시절부터 써 온 내 한글 아이디(ID)이다. 인터넷으로 발전하면서 이 아이디는 이른바 닉네임이란 형식으로 바뀌면서 목숨을 이어왔다. 스무 해 넘게 모국어를 가르쳐 왔고, 다소 완고한 한글전용주의자지만, 나는 한글(순수한 우리말이라는 의미의) 이름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던 편이다.

 

이미 성년이 된 두 아이의 이름도 고심 끝에 평범한 한자 이름을 붙여서인지 내겐 오히려 한글 이름에 대한 갈증 같은 게 있다. 쉽게 기억될 뿐만 아니라, 발음하기 좋은 한글 이름을 찾아서 머리를 싸맨 끝에 만난 이름이 돛과닻이다

 

이름은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새기고 여밀 자기 정체성(identity)의 대중적 표지이기 때문에 그것의 함의(含意)는 지나치게 평범하지도, 지나치게 튀거나 크지 않아야 한다고 보면 그리 합당한 이름은 아니었다.

 

아내를 비롯하여 주변 동료들도 좋다고 동의해 준 이름이었다. 단지 그 어감이 지나치게 각지고 낯설다는 아쉬움은 남았지만, 어정쩡한 한자 이름이 아닐뿐더러 그 우리말 이름이 갖는 이미지와 함의(含意)들이 오래 가슴에 와 닿아오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아래는 그때, 천리안에 쓴 글 일부다.

 

은 희망입니다. 돛은 미래입니다. 진부한 비유이긴 하지만 가없는 삶의 항해에서 가 의지할 단 하나의 수단이고 더러 순풍을 안고 가기도 하지만, 역풍에 찢기고 상처 입는 우리들 삶의 고단하고 아름다운 얼굴이기도 합니다.

 

다시 은 꿈입니다. 돛은 상승(上昇)이고 열정입니다. 미지의 항로를 향하여, 더러는 설렘으로 찾는 새로운 대륙을 꿈꾸는 노스탤지어의 표지(標識)입니다. 삶의 무게를 딛고 가벼이 날아오르는 의지이고, 또한 현실의 모순에 대한 부정이고, 그 분노입니다. 노고지리처럼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자유의 의지입니다. 그래서 은 불입니다.

 

은 현실이고 현재입니다. 닻은 휴식과 안식이며 더러는 좌절이고 정체이기도 합니다.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나는저 김수영 시인의 이고, 망망한 바다, 쉼 없는 거센 물결과 바람 앞에서 단단히 뿌리내리는 균형과 절제와 안정의 추입니다.

 

은 심해 깊숙이 자리 잡는 하강(下降)입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자기 긍정이고, 늘 안으로 갈무리하는 자기 성찰이며, 그릇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는 유연한 관용성, 그것은 물입니다.

 

새로 이 10여 년 전의 이 묵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다. 로맨티스트 정도가 아니라 센티멘탈리스트가 아닌가 싶어서다. 사물과 삶을 바라보는 내 눈높이나 그 준거점에 드리운 만만찮은 순정, 그건 어쩌면 이제는 말라 바스러져 가는 내 마음의 한쪽에 오롯이 살아 있는 등불일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나는 돛과닻으로 살았다. 조직 활동을 쉬게 된 2004년께에야 나는 별칭을 낮달로 바꾸었다. ‘돛과닻이 너무 무거웠던 탓이다. 낮에 나온 달은 별다른 소임이 없으니, 가볍고, 유유자적하리라. 그게 별칭을 바꾼 까닭이었다. ‘낮달로 지내온 이태 동안, 내가 얼마나 가벼웠는지, 얼마나 유유자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물이든, 이름이든 구태여 복잡한 의미를 붙일 일은 없다. 사람들은 그냥 뭇 이름 중의 하나로 돛과닻을 기억할 뿐이다. 이태 만에 다시 돛과 닻으로 돌아온 데 대한 내 변명이다. 그리고 이제 더는 변명 따위를 하지 않고도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무심하게 바라고 있을 뿐이다.

 

 

2007. 1. 29. 돛과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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