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2008, 총독의 소리

by 낮달2018 2020. 12. 10.
728x90

최인훈 연작 소설 ‘총독의 소리’ 오마쥬

<총독의 소리>는 작가 최인훈의 연작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가상한 신식민지 현실을 배경으로 패전 후 지하로 들어간 조선총독부의 총독이 유령 방송을 통해 반도의 재점령을 노리고 있는 상황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가상의 인물인 총독의 모습은 일련의 연설 속에 감춰져 있을 뿐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는 인물의 행위가 없는 담화 상황만으로 짜인, 서사적 규범을 뛰어넘는 형태적 파격을 통해 새로운 문학적 인식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이 글은 작가의 작품 형식과 그 일부 내용을 빌려 2008년의 한국, 그리고 한일관계 등을 다루고 있다. 글 가운데 원작을 인용한 부분의 글자는 붉은 색깔로 표시하였다.


▲ 조선총독부. 일제 강점기의 사진 엽서 '조선 명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조선총독부 지하부가 보내드리는 유령 해적방송인 총독의 소리입니다. 총독 각하의 노변담화(爐邊談話) 시간입니다.

 

▲ 최인훈 소묘. ⓒ 김천형

충용한 제국(帝國) 신민(臣民) 여러분. 제국이 재기하여 반도에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은인자중 맡은바 고난의 항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제국 군인과 경찰과 밀정과 낭인(浪人) 여러분. 제국의 불행한 패전이 있은 지 어언 63년.

 

그간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의 정세도 크게 바뀌었거니와 특히나 제국의 아시아에 있어서의 자리는 어둡고 몸서리쳐지던 패전의 그 무렵에 우려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전개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간의 우리들 은인자중의 세월이 헛되지 않았던가, 희망적 정세변화가 목전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만화방창(萬化方暢), 반도는 우리의 권토중래가 꿈이 아님을 실제로 증명하고 있는 듯합니다. 반도의 남쪽 절반을 다스리던 좌파 정권 10년이 종식되고 드디어 그간 연면히 계승되어 오던 지배 권력 집단인 보수우파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이명박은 쇼와(昭和) 16년(1941) 내지 오사카에서 출생한 스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 바로 그입니다. 그는 직전의 좌경 지도자 노무현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인물로, 그는 금년 4월의 내지 방문에서 아키히토(明仁)) 천황 폐하를 알현하고 ‘폐하의 반도 방문’을 권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비록 정치적 수사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가 ‘성숙한 한일관계를 위해 일본에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매우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일본 외무성 누리집의 독도 관련 PDF

그는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는 실용의 자세로 미래 지향적이고 성숙한 파트너 관계’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 시각에 우리 외무성이 홈페이지를 통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메이지 39년(1905), ‘동양의 평화’와 ‘조선의 안전’을 말하며 을사 5조약을 관철시킨 대일본제국의 반도 합병사가 주는 교훈은 지금도 유효한 것입니다.

 

비록 다케시마(죽도-독도)와 교과서 문제로 일한 관계가 경색되긴 했지만, 지난 10월 베이징에서 열린 일한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셔틀 외교 복원’과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를 천명하였습니다. 사소한 차이는 극복하면서 아세아 제국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제국과 반도의 관계는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보다 돈독한 관계로 발전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현재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는 6자회담에서 이명박 정부는 회담의 최대 쟁점이 된 검증 의정서 내 시료 채취 명문화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더 나아가 검증 의정서가 채택되지 않을 경우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도 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등 제국과 오차 없는 공조를 과시하고 있다는 전언입니다.

 

기왕에 이루어진, 북미 간 핵 검증 합의 및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 것은 수용하되, 제국은 대북 에너지 지원에 결코 참여하지 않을 것임은 본인은 믿고 있습니다. 반도 북쪽의 잠재적 핵 문제는 제국은 물론 반도 남쪽과 동북아에서의 미국의 이익에도 심대한 위협이 될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본인은 이 문제에 관한 반도의 정책이 제국과의 공조를 통해 활로를 찾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충용한 제국 신민 여러분, 63년 전, 제국이 피눈물을 삼키고, 개화 이래 겨레의 슬기와 힘을 모아 가꾸어 오던 대제국 건설의 빛나는 걸음을 멈추고, 영용한 신민 장병의 거룩한 피와 꿈도 땅 밑에서 흐느끼는 모든 구령(舊領)과 싸움터에서 성전의 칼을 놓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이 노병의 가슴은 폐하에 대한 죄스러움이 어제같이 되살아납니다.

 

이제 폐하 가신 지 어언 19년, 그 아드님 쓰구노미야(継宮)님께서 아키히토 덴노(천황)로 등극, 만세일계(萬歲一系)를 이으시어 바야흐로 헤이세이(平成 : 아키히토의 연호)의 태평성대를 여시니 황은이 눈물겨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제 반도의 정세가 우리가 오매불망 꿈꾸어 오던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시간이 가까워짐을 느꺼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대일본제국이 베푼, 지난 서른여섯 해 동안의 반도 통치는 드디어 반도의 보수 우익들에 의해서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이름으로 기려지고 있습니다. 두루 알다시피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당시 피폐해진 조선을 아국(我國)이 합병함으로써 반도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이론입니다.

 

이제야 지난 세월 아국의 통치가 반도 발전의 초석을 닦았음이 저들 반도인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으니 이는 오로지 폐하의 음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야스쿠니 신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야스쿠니>의 한 장면

헤이세이(平成) 17년(2005) 내지에서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선 그간의 자학 사관을 극복한 새로운 일본사를 서술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이 후소샤 교과서에선 임나일본부설의 강화, 자존과 자위를 위한 반도 강점의 불가피성,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 촉진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니 이는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확인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이들 ‘식민지 근대화론’의 뿌리는 20여 년 전 황군(皇軍) 정신대 문제 등이 등장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때 반도의 일부 보수진영은 ‘역사보다는 경제’라는 논리로 국익론을 들먹였고, 나중에는 불령(不逞) 좌파들의 과거사 청산 노력을 ‘색깔’로 덧칠함으로써 본인을 매우 흔연케 하였습니다.

 

‘정신대가 사실상 상업적인 목적을 지난 공창의 형태’라는 일본 우익 측의 주장을 대변한 이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창하는 이모(李某)라는 서울대 교수입니다. 그와 함께 ‘식민지 지배는 축복’이라고 한 한모 전 고려대 교수의 발언은 반도의 우익 보수 세력 중에서 여전히 총독부 시절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상존한다는 걸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 뉴라이트의 대안 교과서

반도에서 제기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내지에서 제국의 국익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애국 언론 <산케이신문>이 반도의 ‘자학사관’이라고 지적한 것은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었습니다. 이후 이 ‘자학사관론’이 반도의 신우익(뉴라이트)들에 의해서 공공연히 거론되기 시작한 것도 매우 희망적인 조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일부 불경한 사상을 가진 좌파 학자들은 ‘일한 우익연대 형성의 본격화’라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연대는 일찍이 쇼와 시대의 ‘대동아공영권’ 건설론의 21세기판에 다름 아닌 것이니 그것은 진작·독려해야 마땅한 역사의 필연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헤이세이 19년(2007)에 우국충정에 불타는 반도의 신우익들이 만든 ‘대안 역사 교과서’의 내용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교과서에서는 다이쇼(大政) 8년(1919) 3월에 일어난 반도의 소요사건 주역 중의 하나인 유관순을 ‘체제를 부정한 불순분자’로, 만주의 악질적 반일 무장 소요의 주범인 김좌진을 ‘악질 테러 분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상해의 조선 가정부(假政府) 주석 김구를 ‘빈 라덴’에 비기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공을 저격한 안중근을 김구의 하수인, 테러리스트로 묘사하고 있다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이 목하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반도의 신우익들은 마땅히 제국과 동맹을 맺을 자격이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충용한 제국(帝國) 신민(臣民) 여러분. 제국이 재기하여 반도에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은인자중 맡은바 고난의 항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제국 군인과 경찰과 밀정과 낭인(浪人) 여러분. 지금 내지는 이토 히로부미 초대 총리 이래 90대 아베 신조(安倍 晋三)에 이어 92대 아소 다로(麻生太郎) 총리 시대입니다.

 

아베 신조 총리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를 외조부로, 사토 에이사쿠(佐藤 榮作) 전 총리를 종조부로 두었다면 아소 다로 총리는 전쟁 전에 후쿠오카에서 아소 탄광을 운영한 아소 다키치(太賀吉)를 증조부로,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전 총리를 외조부로, 스즈키 젠코(鈴木 善幸) 전 총리를 장인으로 둔 제국 명문의 후예입니다. 바야흐로 전 총리와 현 총리의 가문은 제국의 영광을 증언하는 집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헤이세이 7년(1995) 당시 집권 사회당의 무라야마 총리가 반도 지배와 침략을 사죄한 치욕의 담화 이래, 땅에 떨어진 제국의 위신을 원상태로 회복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입니다. 다께시마(竹島-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점을 교과서 해설서에 명기했고 전쟁을 금지하고 있는 평화 헌법의 개정을 추진하는 것 등은 그 영광의 재현을 위한 첫 걸음인 것입니다.

 

▲ 망언으로 해임된 다모가미 도시오 항공막료장과 아소 다로 총리

이미 미국(米國)의 도움 없이도 독자적으로 미사일 방어시스템을 사실상 구축한 제국의 군사비는 세계 5위입니다. 제국이 반도 북쪽의 위협에 대비해 MD를 서둘러 구축하며 집단 자위권의 행사를 추진해 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입니다.

 

집단 자위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종전 후 맥아더 군정 당시 만들어진 ‘전쟁 포기와 전력 비보유’ 등을 명기한 평화 헌법을 개정하여야 합니다. 아베 총리 때 이를 개정하기 위한 특별팀을 구성했으나 후쿠다 총리 시절에 신중한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공식 논의가 중단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아소 총리가 유엔총회 참석 후 ‘집단 자위권’의 보유는 중요하다며 헌법 해석을 바꿔 이를 가능하도록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만시지탄이나 환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국 항공 자위대의 다모가미 도시오 막료장이 ‘반도 침략과 통치’가 정당한 것이었다는 논문 발표로 해임된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쿄재판은 전쟁 책임을 모두 일본에 전가한 것”,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노력으로 현지 사람들이 과거의 압정에서 해방됐으며, 생활 수준도 훨씬 향상됐다”, “많은 아시아 나라들이 대동아전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라는 그의 주장의 일점일획도 사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반도의 우호적 지식인들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 야스쿠니 앞을 옛 일본군 차림으로 행진하는 일본 우익들

반도에서 종전(1945) 3년 후 단독정부가 수립된 것을 기념해 온 것은 오래된 일입니다. 그러나 올 8월 15일에는 이를 ‘정부수립’이 아닌 ‘건국’ 60년으로 기리는 과정에서 적잖은 마찰이 있었습니다. 이 ‘건국절’ 논란은 나라의 기점을 제국 통치기인 상해 가정부가 아닌, 종전 3년 후의 정부수립부터 잡아 이를 기려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논의의 핵심은 민족의 고통과 수난이 아니라 영광과 승리를 중심으로 역사와 나라의 정체성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이승만 국부론’과 ‘박정희 근대화론’이라는 쌍둥이 이론에 기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말한 ‘식민지 근대화론’과 그 궤를 같이하는 바람직한 역사 인식의 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도 일각의 좌파들에 의해 제기되어 온 민족주의적 입장과 관점이 아니라, 제국의 반도 통치기를 근대화 과정의 연속선으로 파악하면서도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지칭하는 이 일련의 움직임 앞에, 본 총독은 흔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새삼 돌이켜보건대, 패전 이후 어언 한 갑자가 돌았으나, 우리가 서른여섯 해 동안, 반도에 뿌린 제국의 유덕(遺德)과 치적은 맥맥히 이 산하와 인심 속에 살아 있어서 이 노병의 지난한 임무를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반도의 전운(戰雲)이여. 때맞춰 일어나고, 때맞춰 스러지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산하 생령을 맡고 있는 본인의 뜻을 어기지 말라. 나의 휘하 장병이여. 관민 여러분. 식민지의 모든 밀정, 낭인 여러분. 불발(不拔)의 믿음으로 매진하라. 제국(帝國)의 반도(半島) 만세.

 

이상으로 총독 각하의 노변담화를 마치겠습니다. 제국의 반도 만세. 여기는 조선총독부 지하부가 보내드리는 총독의 소리입니다.

 

 

 

2008. 12. 10.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