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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라고?

by 낮달2018 2020.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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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열풍에 부쳐

▲ 교보문고에서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 .  ⓒ  경향신문 사진

다시 ‘하루키’다. ‘열풍’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이 나라 독서계의 드문 풍속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사기 위해 독자들은 서울의 대형서점 계산대 앞에 줄을 서고 있단다.

 

다시 이는 ‘하루키 열풍’

 

▲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

하루키의 책은 7월 1일 신작 판매 이벤트에서 10분 만에 100부가, 하루 만에 5700부가 팔렸단다. 4년 전 화제를 모았던 전작 <1Q84>에 비하며 예약판매량도 3배쯤 앞선단다. 이 책은 메이저 출판사인 민음사가 초판만 20만 부를 찍었고 추가로 5만 부를 제작 중이라고 했다. 선인세(!) 역시 16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나 어쩐다나.

 

하루키의 인기는 일본은 물론이고 구미에서도 높다고 하지만 한국 독자들의 열광도 만만찮다. <경향신문>의 정원식 기자는 기사 ‘하루키를 읽는가, 하루키 열풍을 읽는가’를 통해 그 열풍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관련 기사 : 하루키를 읽는가, 하루키 열풍을 읽는가 ]

 

하루키의 장편 <상실의 시대>(원제 : 노르웨이의 숲)가 베스트 셀러가 된 것은 10만 부가 팔린 1994년이었다. 한국에서의 하루키의 수용을 기자는 “‘남다른 취향’을 문화적 세련의 징표로 삼았던 ‘신세대’ 문화는 하루키라는 새로운 아이콘”을 찾아냈고 이 작가와 작품은 “이념이 사라진 자리에 ‘개인’과 ‘문화적 취향’이 들어섰던 1990년대 청년들에게 청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고 풀이했다.

 

내가 하루키를 처음 만난 것도 1990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서울에 갔다가 귀향하는 길에 시내의 어떤 서점에서 <노르웨이의 숲>을 샀었다.(서지 사항을 보니 책은 1993년 판이다) 나는 그 책을 기차를 타고 오면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아닌 게 아니라 하루키는 참신한 감각과 유려한 문체, 사물과 삶을 바라보는 쿨한 시선 따위에서 젊은이들을 사로잡을 만했다.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삶과 젊음, 사랑과 방황, 그리고 섹스 코드까지 그것은 한 편의 잘 짜인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루키가 한참, 이른바 서울의 지가를 올리고 있을 무렵이었으니 내가 그의 책을 산 것은 말하자면 ‘그래, 그렇게 잘 나가는 그의 소설, 어디 한번 읽어나 보자’는 심정 때문이었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나라 안에서 치솟는 그의 인기와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꽤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 나는 그의 소설에서 나쁜 점만을 골라 읽으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소설은 일단 흥미로웠다. 에세이 풍의 서술도, 일본 문학 특유의 화자의 관조적인 태도도 책 읽기를 편하게 해 주었다. 지금은 작품의 얼개조차 잘 생각나지 않지만, 유일하게 남은 기억은 주인공의 이름이 ‘와다나베’였다는 것이다.

 

내가 읽은 <상실의 시대>

 

▲ 내 서가의 유일한 하루키 소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소설을 서가에다 냅다 던져버렸다. 됐어. 하루키는 이걸로 끝이야. 다분히 흠을 잡으려는 의도가 컸지만 나는 그의 작품이 내가 즐겨 빠지곤 하는 소설적 충격으로 다가오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읽은 것은 한편의 잘 짜인 젊은이들의 방황과 사랑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대체 무엇이 어떻다는 거야?”

 

하루키가 독자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는 것과는 달리 우리 문학계에서의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우리 문학계는 ‘하루키 문학의 무국적성’을 지적하면서, 그의 작품에 드러난 ‘자본주의 시스템을 편집증적이고 물신 숭배적으로 숭상하고 즐기는 양상’(이경훈) 등을 들어 그의 문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비판은 하루키 소설의 문학성에 대한 폄훼로 이어졌다. 물론 일본에서도 그의 작품에 드러난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구미 쪽의 평가도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구별이 유별난 한국에서 하루키의 문학은 ‘사적(私的) 개인적 소설, 성적 코드를 포함하고 있는 대중문학’으로 평가되었다.

▲ 국내에서 출판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작들 ⓒ 한겨레

2006년도에는 한국의 젊은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에서 하루키는 국내외 작가를 통틀어 ‘가장 과대평가 받는 작가’ 1위에 올랐는데 이 조사의 함의는 흥미롭다. ‘과대평가’가 가리키는 것은 대중의 환호고 그것이 지나치다는 평가 속에 알게 모르게 문인들의 ‘질시’가 담겨 있지 않나 싶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하루키를 즐겨 읽고 그의 소설의 결을 흉내 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꺼리는, 복잡한 속내를 드러내곤 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하루키에 대한 호감이 자신의 수준으로 오해될 수 있을 만큼 하루키에 대한 평가가 저조했다는 뜻이었다.

 

2000년대 들어 하루키는 서구에서의 우호적 평가에 힘입어 세계적 작가로 떠올랐다. 그러나 아직도 국내에서 하루키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인색하다. 그런 평가는 물론 내 의견과 전혀 무관한 것이지만 그것이 나는 그리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과대평가된 작가, 하루키

 

어떤 이들은 한국에 하루키 같은 작가가 없다는 사실을 아쉬워한다. 그것은 물론 초판 20만 부, 선인세 16억이라는 숫자 대한 부러움이 아니라 나라 안 아닌, 나라 밖에서도 그런 엄청난 독자를 부르는 문학적 마력에 대한 아쉬움일 터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1949 ~ )

그러나 대저 문학에서 판매 부수나 그것이 가져다주는 부란 허망한 것이다. 그것은 인류 문학사의 한 장을 장식하는 것도 아니요, 인간의 삶과 세상에 관한 깊고 넓은 성찰의 시각을 열어주는 것도 아니다. 대중의 선택을 폄훼하는 게 아니라, 대중은 냉정하다. 수백만 독자의 선택보다 인류 역사가 선정한 고전의 목록에 더 깊은 신뢰를 보내는 것이 대중이다.

 

일본 문학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정서와 문체도 우리의 그것과 썩 다르지는 않다. 일본 문학의 일정한 영향을 받으며 우리 신문학이 발전해 갔다는 역사성, 한때는 우리말 사용을 금지당하면서 적지 않은 작가들이 일본어로 글을 썼다는 식민지 시대의 아픈 역사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국내에서 번역된 작품 수가 가장 많은 일본 작가는 6, 70년대 소설 <빙점(氷點)>으로 공전을 인기를 끈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다. 그의 <아사히(朝日)신문> 현상 공모소설 당선작 <빙점>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져 국내에서의 일본소설 붐을 선도했다.

 

내가 <빙점>을 읽은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마 열아홉 살 터울의 맏형님이 구매한 책이었을 것이다. 내게 <빙점>은 그 무렵에 읽었던 코미가와 준페이(五味川純平)의 <인간의 조건>에서 받은 감동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밋밋한 소설이었다. 그런 작품이 이 나라 출판시장을 달구어 놓았던 것은 당시 우리 문학 시장의 취약성을 말해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번역된 작품 수에는 미우라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판매 부수는 1990년대 이후 하루키가 독점한다. 4년 전에 출간한 소설 <1Q84>는 200만 부 가깝게 팔렸고 16억의 선인세를 지불하고 출판한 신작의 판매량은 얼마가 될지 모르는 상태다. 사람들은 다투어 서점으로 가고 그걸 읽는 것은 일종의 문화적 트렌드가 되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읽지 않을 권리’

 

진부한 표현이지만 ‘하루키 앞에 엎어진’ 독자들은 숱하다. 작가의 친필 사인본을 사기 위해서 새벽부터 책방 개점을 기다린 열혈 독자들 덕분에 당분간 국내엔 하루키의 전성시대가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나는 그의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수백만의 독자들이 있는 한 나 따위 독자의 선택은 그의 명성과 판매 부수에 털끝만 한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내 선택과 반대편에 서 있는 압도적 다수의 환호가 2013년을 다시 ‘하루키의 시간’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나의 권리다. 무명의 독자이자, 단독 비평자인 내가 내 선택을 견지하는 권리는 역설적으로 그래서 보호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013. 7. 10. 낮달


* 2013년에 이 소설이 16억의 선인세를 만회할 만큼 팔렸는지 어땠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7년이 흘렀다. 오늘 자 <한겨레> 별지 ‘책과 생각’은 하루키의 신작 단편집 <일인칭 단수>의 서평을 싣고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가 쓴 이 서평의 제목은 ‘하루키적인, 지극히 하루키적인’이다. 책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 실린 단편 8편은 모두 ‘나’의 시점으로 쓰였다고 한다. 한때 ‘사소설(私小說)’이라는 형식을 내놓은바 있는, 지극히 ‘일본적’인 문학에다 하루키 특유의 서술을 두고 기자는 ‘하루키적’이라는 표현을 쓴 듯하다.

 

출판사는 7년 전의 민음사가 아니고, 문학동네다. 이른바 메이저 출판 그룹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글쎄, 이번 출판은 어떤 조건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몰라도, 하루키에 목을 매는 열혈 독자들을 고려하여 적잖은 선인세가 지급되었을 성싶다. 생뚱맞게도 특정 작가에게 기울어진 출판시장의 불균형을 환기하면서 ‘책과 생각’을 덮는다.

 

2020.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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