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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이야기(2) - 청도 반시(盤枾)

by 낮달2018 2020.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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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친구 집에서 반시를 얻어오다

▲ 청도는 상주의 '곶감'과 함께, 전국 제일의 홍시라는 '청도 반시(盤枾)'로 명성이 높다.

올해엔 4월에 이어 지난 목요일(15일), 다시 청도를 다녀왔다. 코로나19 때문에 두문불출, 가히 유폐 상태에 있다 하여도 지나치지 않은 시절이라, 90km가 넘는 길을 나서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도 두 차례나 청도를 찾은 것은 거기 귀농한 아내의 오랜 친구가 자신이 지은 채소 등속을 좀 가져가라는 거듭된 권유를 내치기 어려워서다.

 

그녀는 스무 살 무렵에 아내와 함께 여러 차례 만나면서 편한 사이가 된 이다. 아주 유려한 필적으로 긴 편지를 쓰던 여고생은 예순을 넘긴 뒤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청도에선 누구나 짓는 감 농사 말고도 부지런히 푸성귀를 가꾸며 사는 그의 집 주변은 익어가고 있는 감과 채소 따위로 넉넉했다.

 

4월에 왔을 때, 부드러운 연록 빛으로 벋어 나던 가지와 잎사귀는 굵고 실한 감을 매달고 시나브로 단풍이 들고 있었다. 글쎄, 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일까, 나는 텃밭 옆에 심은 감나무도 심상히 바라보고 아내가 한 쟁반씩 챙겨오는 홍시(紅柿)에도 무심하다. 어쩌다 사 오는 단감이 있으면 그걸 우적우적 씹어 먹을 뿐이다.

▲ 올 4월 초순에 들렀을 때, 막 감나무마다 돋아난 연록 빛 잎사귀가 고왔다.

어릴 적에 감은 가을철 시골 아이들에겐 꽤 풍성한 먹을거리였다. 집집이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고, 그게 돈이 되던 시절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우리 집 대문을 나서 작은 개울을 건너면 감밭이었다. 임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은 거기 흔전만전 떨어진 감을 떫으면 떫은 대로, 홍시는 홍시대로 주워서 먹어 치우곤 했다.

 

나는 아직 익지 않은 땡감은 말할 것도 없고, 떨어져 속살이 껍질 밖으로 삐져나온 홍시도 어쩐지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 늦가을에 감밭을 지나노라면 떨어져 삭아서 초가 되어가고 있는 시큼한 감 내음이 코를 찔렀다. 아마 감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까닭이 그런 유년의 기억 탓인지도 모른다. 떫은 땡감을 먹어 변비에 걸린 이웃 아이를 제 어머니가 꼬챙이로 뒤를 후비며 볼기를 때리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받은 충격도 적지 않았다.

 

나는 홍시는 즐기지 않은 대신, 삭힌 감은 잘 먹었다. 요즘처럼 단감이 흔하지 않았던 때라, 우리는 땡감을 주워 와서 돌확에 넣고 소금 간을 한 미지근한 물을 부어 두었다. 며칠쯤 지나면 표면에 마치 멍이 든 것 같은 색소 침착이 일어난 감은 떫은맛이 없어지고, 달싹한 감으로 바뀌었다.

 

그것도 잠깐,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신작로가 난 동네로 이사하면서 나는 감과 멀어졌다. 어쩌다 제수로 쓰려고 사 온, 짚으로 엮은, 뽀얗게 분이 난 곶감을 하나씩 얻어먹을 때의 그 황홀한 식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것은 설탕이 귀하던 시절, 우리가 섭렵한 유일한 감미였다. 오죽하면 아이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게 곶감이겠는가. [관련 글 : 감 이야기- 땡감에서 홍시, 곶감까지]

 

지난해까지는 우리 집에선 시골에서 딴 감을 깎아 베란다에 걸어서 말리곤 했다. 저층에 살 때는 바람이 시원찮아 잘 건조되지 않았지만, 요즘은 고층이라 조금만 신경을 쓰면 감은 조금씩 마르면서 그 단맛을 과육 가득 저장하기 시작한다. 적당히 말려서 ‘반 건시(乾柿)’가 된 감은 김치 냉장고에 넣어두고 겨우내 하나씩 꺼내먹곤 했다.

 

그러나 올핸 그것도 없다. 수십 년 묵은 감나무는 감이 떨어져 길을 더럽힌다는 이웃 민원에 베어냈고, 텃밭에 새로 심은 나무는 올해 영 과실이 시원찮은 데다가 병충해로 표면이 흉해서 우리는 감 따기를 포기했다. 덕분에 인터넷에서 구매한 감 따는 도구는 창고에서 쉬고 있다. [관련 글 : 감 따기와 ‘곶감’ 만들기]

 

어떤 기록에도 없지만, 감은 추석 차례상에 반드시 올려야 하는 제수가 된 ‘조율시이(棗栗枾梨)’ 중 하나다. 조율시이가 아니라 조율이시라는 논란이 있지만 이 역시 아무 근거 없는 이야기다. 대추와 밤, 배와 함께 감이 이 추석 상 실과(實果)로 오른 것은 예사롭지 않은 심오한 뜻이 있다고 속설은 전한다.

 

여느 나무와 달리, 감은 씨앗을 심으면 감나무가 아니라 고욤나무가 난다. 이 나무가 3~5년쯤 자라면 다른 감나무에서 작은 순을 잘라 와 여기 접을 붙이면 그 순이 자라 감이 열린다. 이 감나무가 주는 교훈은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배워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뜻이란다.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데는 생가지를 칼로 째서 접을 붙일 때처럼 아픔이 따른다. 그 아픔을 겪으며 선인의 지혜를 이을 때 비로소 성숙한 인격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감의 씨가 8개로 팔 방백(八方伯, 8도 관찰사·8도 감사)을 뜻하는데, 후손 가운데 8도 관찰사가 나오라는 의미라고 한다. 글쎄,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경우가 어디 한둘인가. 

 

‘조율시이’는 차례가 관습으로 굳어지면서 만들어진, 문헌 근거가 따로 없는 의례 규범이다. 딱히 네 가지 과실이 차례상에 올라야 하는 이유는 없는 거지만, 이 이야기에는 그 과실마다 가문의 번성과 양명(揚名)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소망과 교훈적 의미가 투영되어 있다.

▲ 육질이 연하고 당도가 높은 청도 반시는 전국에서 유일한 ‘씨 없는 감’으로서 떫은 감 중에서는 차별성과 경쟁력이 가장 높다.
▲ 감을 다 따낸 작은 감나무의 잎사귀가 빨갛게 물들고 있다. 감나무 잎의 단풍도 무척 아름답다.
▲ 감나무 단풍. 구미 북봉산 어귀의 감나무밭에서 찍었다.
▲ 청도 반시 로고. 청도반시축제 누리집에서 가져왔다.

청도는 상주의 ‘곶감’과 함께, 전국 제일의 홍시라는 ‘청도 반시(盤枾)’로 명성이 높다. 청도 반시는 우리나라 떫은 감을 대표하는 품종으로 상주, 영동 등에서 나는 길쭉한 모양의 곶감용 ‘둥시’와 달리 그 생긴 모양이 납작하다고 하여 반시(盤枾)다.

 

육질이 연하고 당도가 높은 청도 반시는 전국에서 유일한 ‘씨 없는 감’으로서 떫은 감 중에서는 차별성과 경쟁력이 가장 높다. 청도 반시가 씨가 없는 것은 지리적으로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청도에는 다른 지역 감의 수 꽃가루가 자연 유입되기 어렵고 5월 하순 개화기에 안개가 많아 꽃가루를 옮기는 방화(訪花)곤충의 활동이 제한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청도 반시를 청도 바로 옆 지역인 경산에 심으면 씨 있는 감이 난다고 하니, 청도가 씨 없는 감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의 혜택 덕분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청도에서는 홍시만으로는 부족한 상품성이 보충하고자, 감을 적절한 크기로 잘라서 반쯤 말린 ‘감말랭이’도 생산하여 호응을 받고 있다.

▲ 감나무 밭 한쪽에는 석류가 여러 그루 심어져 있었다.
▲ 감나무를 타고 오르던 호박이 굵어지자, 떨어지지 않게 끈으로 동여 나무에 매어 놓았다.
▲ 단감은 아직 수확 전이었다.

주인이 내온 더덕주를 마시면서 우리는 저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스무 살 때 만났으니, 맙소사 45년이 넘었네, 라고 하여 모두 한바탕 웃었는데, 불현듯 까마득한 옛날이 아프게 환기되었다. 연애를 떠나서 스무 살이란 누구에게나 비슷한 아픔이 있음 직하지 않은가.

 

나는 감나무를 심은 밭은 여러 차례 돌면서 사진을 찍었고, 평상에 앉아 점심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아내는 배추와 무, 감말랭이, 홍시 따위를 한가득 얻어 트렁크에 실었다. 아흔이 가깝지만, 아직 정정한 모친은 자주 봐야 정이 나는 법이라며, 또 오라고 당부했고, 나는 새봄에 오겠다, 건강하시기 바란다고 인사했다.

 

1시가 되기 전에 우리는 청도군 화양읍을 떠났다. 부근은 용암온천이 있는 곳, 언제 다시 오면 온천을 즐길 수 있으려나, 하고 생각하면서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찾아 귀갓길에 올랐다.

 

 

2020. 10. 18. 낮달

 

감 이야기(1) - 땡감에서 홍시, 곶감까지

감 이야기(3) - 이른 곶감을 깎아 베란다에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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