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서
참사 264일째의 용산
지난 주말(10일) 오후, 경북 북부지역의 교사들 40여 명은 용산참사의 현장을 찾았다. 오후 두 시에 서울역에서 열릴 교육 주체 결의대회에 가던 길이었다. 용산을 찾은 것은 며칠 전에 ‘한 시간쯤 일찍 출발하면 용산을 들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던 내 제의에 따라서였다.
용산참사 문제는 한가위를 앞두고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정작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례도 치르지 못한 유족들에게 명절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뿐이었을 터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필요한 게 작은 위로와 연대의 손길이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따로 미리 연락한 방문은 아니었다. 우리는 무작정 ‘용산 살인 철거 희생자·열사 합동분향소’를 방문했다. 길을 잘못 들어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버스를 세우고 우리는 천천히 걸어서 분향소를 찾았다. 현장 부근으로 들어서자, 이미 한참 철거가 진행 중인 5층 건물이 황량하게 서 있었다.
도심 한복판에 서 있는 폐허 같은 건물의 잔해가, 새해 벽두에 들이닥쳤던 비극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철거가 진행 중인 을씨년스런 건물 사이로 사람들은 가게를 열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명품 서울’을 내걸고 재개발을 지향하는 자본의 욕망보다 비좁은 골목과 가게에다 가족의 생계를 건 서민들의 삶에 대한 생명력은 ‘소박’해서 더 강하고 끈질긴지 모른다.
우리는 합동분향소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며 분향했다. 유족들에게 정중하게 조의를 표했고 성금도 전했다. 때로 살아 있다는 것이, 불행으로부터 비켜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죄스러운가. 다섯 분의 희생자 영정 앞에 켜진 촛불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좀 비장해져 있었다.
간접적으로 이해했던 비극의 현장에서 우리는 잔뜩 긴장해 있었던 것 같다. 전철연 관계자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이해가 피상적이라는 걸 깨달았고, 보도 너머에 있는 사건의 진실 앞에서 전율했다. 그리고 감추어진 진실 앞에 심상해져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돌아보기도 했다.
주의 깊게 설명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동안 사제단 미사 때문에 ‘남일동 본당’이란 이름을 갖게 된 참사의 현장 건물을 둘러보았다. 하얀 타일을 붙인 5층 건물은 연기에 그을린 채 골조만이 엉성하게 남아 있었다. 미처 떼어내지 못한 ‘치과’와 ‘요가 명상원’, ‘바’와 ‘횟집’ 따위의 간판이 그을린 벽면과 지상에 붙박이로 주차해 있는 대형 닭장차 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붙어 있었다.
닭장차 옆에는 사제단이 미사 때마다 쓰는 사제복이 걸린 걸이가 나란히 서 있고, 차창에도 시민들이 붙인 갖가지 포스터와 스티커가 빽빽했다. 대형 합판으로 만든 게시판에는 ‘국민 법정’ 포스터와 그 법정에 넘겨진 피고인들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거기 쓰인 단문의 구호들은 마치 절규처럼 울부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용산참사 해결하라
철거민 생존권 보장하라
용산, 진실의 꽃으로 피어나라
사제단의 ‘희생자 추모 기도 천막’과 합동분향소 앞 평상에는 몇 분의 수녀들이 모여 유족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도 위로고 격려일 것이었다. 그들의 두런대는 목소리 너머 만화가들이 그린 그림 속에서 희생자들마저 평화로워 보였다. 불길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따뜻하기만 했다.
청문회로 곤욕을 치르던 총리 후보가 추석날 현장을 다녀갔지만 ‘그게 다’다. ‘범국민 대책 위윈회 측과 총리실이 직접 대화 채널을 갖기로 약속’했지만, 열흘이 지난 지금, 그것은 여전히 약속으로만 남아 있다. 사제단의 김인국 신부가 “(총리는) 대통령을 따라서 눈물을 보였지만, 그 눈물의 온도는 몇 도인지 궁금하다”라고 한 까닭도 여기 있으리라.
우리는 이웃인가, 구경꾼인가
오늘(13일)은 참사가 일어난 지 277일째. 석 달 후면 1주기다. 그런데 아직도 희생자들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다. 1987년에 발생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신군부의 5공 정권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무려 다섯 명의 무고한 인명이 희생된 용산참사는 정권의 깃털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고 한 선배 교사는 말했다.
두 사건을 단순 비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긴 하다. 그러나 정작 희생자들이 도시 테러 분자로까지 매도되고 과잉진압을 시도한 경찰은 면죄부를 받는 이 전도된 상황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사제단의 성명대로 “참사 이후 국가가 나서서 한 일은 참사 책임을 죽은 자에게 돌리고 폭도의 죄를 씌워 철거민을 감옥에 가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어제는 용산참사 재판부 현장검증이 있었다고 한다. 엿가락처럼 휜 철골과 종잇장처럼 구겨진 함석판이 ‘그날’의 참사를 증언했다고 신문은 전하고 있다. 공판에서 증인으로 나온 경찰특공대원들은 성급하고 무리한 진압이었음을 사실상 증언했다고 한다.
집회 시간에 대기 위해 서둘러 용산을 떠나려 하는데 닭장차 건너편 담장에 붙은 추모 미사 현수막이 눈길을 끌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가 제작한 그 펼침막에는 “누가 저희의 이웃입니까”(루카복음 10장 29절)라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이른바 ‘착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다.
착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
그 율법 교사가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희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에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 갚아 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겠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루카복음 10장 29절~ 37절>
이 땅에 '착한 사마리아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난해 광우병 쇠고기 문제로 촛불을 켜고 광장에 나온 시민은 수천, 수만, 수십만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등 떠밀지 않았지만, 그들은 스스로 광장으로 나아가 불을 밝히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외쳤다.
그러나 지난 1월, 용산에서 일어난 이 유례없는 비극 앞에서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다. 그들은 ‘나는 그 사건을 잘 모른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또 말한다. ‘어쨌든 그들은 법을 어겼으니까…….’ 상황과 맥락을 무시한 채 그들이 빠져 있는 것은 ‘비폭력’이라는 경직된 도덕률의 덫이다. 그들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도덕의 외피를 쓰고 구원을 외면하고 있을 때, 이들의 삶과 죽음은 실존이다. 생존의 위기, 자본의 공격 앞에서 무력한 시민의 선택은 더 이상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망루를 짓고 거기 올랐을 뿐이다.
때로 더 두려운 것은 ‘침묵’이고 ‘무관심’이다. ‘무관심한 자들을 경계하라’라는 부르노 야센스키의 일갈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들은 친구를 배신하지도 사람을 죽이지도 않지만, 세상에 살인과 배신이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무언의 동의 때문’인 것이다.
용산참사의 희생자들과 유족들, 이 나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개발의 현장에서 생존권의 위기에 쫓기고 몰린 서민들은 묻는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일까. 착한 이웃일까, 아니면 무관심한 구경꾼들일까.
2009. 10. 13. 낮달
* 10월 17일(토)은 ‘빈곤 철폐의 날’ 행사가 오후 1시부터 서울역 광장에서, 5시에는 용산참사의 현장에서 투쟁문화제가 베풀어진다. 또 10월 18일(일) 오후 1시부터는 명동성당 가톨릭회관 7층에서 용산 국민 법정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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