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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조문국(召文國) - 잃어버린 고대 왕국을 찾아서

by 낮달2018 2019.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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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나들이 ③] 금성면 대리리 조문국 사적지

▲ 금성산 고분군을 대표하는 고분들이 모여 있는 대리리 일대에 조문국 사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날, 나들이는 벗과 만나고자 한 탑리(塔里)에서 끝났다. 탑리리는 의성군 금성(金城)면의 행정구역이지만 외지 사람들에게는 ‘금성’보다 훨씬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인근 ‘도리원(桃李院)’은 알아도 ‘봉양(면)’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지인들은 탑리는 알아도 금성은 잘 모른다.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이다. 각부의 석탑재가 거의 완전하며, 전탑(塼塔)의 수법을 모방하는 한편, 일부에서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보여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발달을 고찰하는데 귀중한 자료다.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국보 제30호) 다음으로 오래된 석탑이다. 국보 제77호.

▲ 5년간의 보수를 끝내고 복원된 탑리오층석탑. 경주 분황사 탑 다음으로 오래된 탑이다. 국보 제77호.

그간 탑리를 지날 때마다 비계로 가려진 탑을 바라보며 아쉬워하곤 했는데 탑은 2012년 전면 해체 보수 5년만인 지난해 12월에 다시 일반에 선보이고 있다. 휘영청(!) 굽은 소나무 몇 그루에 둘러싸인 돌탑은 널따란 부지 때문인지 9.6m에 이르는 높이에도 불구하고 아담하고 차분해 보인다.

 

<삼국사기>에 한 줄 기록으로 남은 ‘조문국’

 

탑 뒤로 조그만 여자중학교가 있다. 거기 근무하고 있는 후배 교사를 찾아 원두커피를 대접받고 나와 조문국(召文國) 사적지로 향했다. 귀촌한 벗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 사적지를 나는 늘 사진 몇 장에 담고 스쳐 지나기만 했다. 빈약한 문헌 기록에 의지한 지자체의 ‘역사관광 상품’ 개발이 썩 미덥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무심하게 사적지를 한 바퀴 돌고 고분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서 나는 2천여 년 전의 이 잃어버린 왕국이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갈피에 적지 않은 진실을 감추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비록 문헌 기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무시하고 업신여겨도 좋은 역사란 없다는 것도 알았다.

 

조문국은 삼한 시대 의성 지역을 지배한, 의성군 금성면을 중심으로 한 고대 성읍(城邑) 국가다. 조문국은 신라 9대 임금 벌휴왕 2년(185년)에 신라에 복속되었는데 이는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에 단 한 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벌휴이사금(泥師今) 2년, 1월에 왕이 친히 시조 사당에 제사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했으며 2월에 파진찬(波珍飡) 구도와 일길찬(一吉飡) 구수혜로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정벌했는데 군주(軍主)라는 이름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문국은 금성면 일대에 규모가 매우 큰 100여 기 등 모두 374기(2015.4. 의성 금성산 고분군 일원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의 고분군 등 최소한 몇 세기에 걸친 국가의 자취를 남겨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조문국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 고고학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조문국이 남긴 고분군은 금성면 탑리리를 중심으로 대리리·학미리 일대뿐 아니라 단촌면 후평리·관덕리·병방리·장림리와 점곡면 송내리 일대 400여 기 등 모두 900여 기에 이른다. 삼한 및 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분군은 과거 강성했던 정치세력이 이 일대에 존재했다는 사실의 강력한 방증이다.

 

특히 경상북도 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된 금성면 일대 고분군에는 경주 왕릉에 비교할 만한 대형 고분들이 즐비하다. 탑리리에는 봉분의 직경이 20m가 넘는 것이 16기나 되는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동서 41m, 남북 30m, 높이 8m에 이른다.

▲ 잘 조경되어 관리되고 있는 조문국 사적지는 잃어버린 왕국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만하다.
▲ 조문국 금동관

탑리리 고분에서는 공작새 날개 모양 3개의 세움 장식[입식(立飾)]을 한 금동관도 발굴되어 이곳이 조문국의 유력 지배층들의 분묘임이 확인되었다.

 

5세기께 축조된 이 고분은 신라의 전형적인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목곽적석총(木槨積石塚)·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의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어 탑리리 고분군을 만든 세력은 이미 신라화한 지방 토착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문국 사적지’는 잃어버린 왕국의 ‘입구’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고분 발굴 작업이 이뤄진 결과 학계에서는 조문국이 기원전 1세기쯤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가 조문국 정벌에 나선 것은 영남 일원에서 북쪽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교통로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곳을 정벌함으로써 소백산맥 방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 탑리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의성군은 ‘조문국의 영광’을 알리기 위해 금성면 초전리 옛 조문초등학교 자리에 ‘조문국 박물관’을 건립(2013년)하여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고 대리리 고분군 사적지에 고분전시관을 세워 대형 봉토분인 2호분 발굴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조문국 사적지가 조성된 대리리 일대는 10년 전만 해도 비석을 갖춘 경덕왕릉이 눈에 띄었을 뿐 잡초가 우거진 고분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대를 사적지로 정비하고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면서 사적지는 ‘잃어버린 고대 왕국’으로 들어가는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다.

▲ 조문국 경덕왕릉으로 추정하는 고분. 발견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사적지 한가운데에 ‘조문국 경덕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있다. 봉분의 둘레가 74m, 높이가 8m이며 정면에는 가로 42㎝, 세로 22㎝, 높이 1.6m의 비석이 서 있다. 영조 원년(1725년) 의성 현령 이우신이 경덕왕릉을 증축하고 하마비 등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왕릉 제사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고, 그 후 경덕왕릉 보존회가 구성되어 다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덕왕릉이 발견된 배경과 관련한 전설이 조선 숙종 때 문인, 미수 허목의 문집에 실려 있다. 이 능지는 약 500년 전에 오극겸의 외밭[瓜田]이었다. 외를 지키던 어느 날 꿈에 금관을 쓰고 조복을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서 “내가 신라 시대 조문국의 경덕왕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 위에 있으니 속히 철거하라.”고 이르고는 그의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놀란 외밭 주인이 일어나 보니 꿈속에 노인이 써준 글이 그대로 자기 등에 씌어 있었다. 그는 현령에게 알리고 지방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을 만들고 매년 춘계 향사를 올렸고 이후 제례 행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고분전시관에 재현된 대리리 2호분 순장묘. 순장자의 머리 방향이 피장자와 반대다.

경덕왕릉 앞에 세워진 돔형의 고분전시관은 대리리 2호분의 내부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2호분의 유구와 출토 유물, 순장 문화 등을 전시해 당시의 매장 풍습을 살펴볼 수 있는 이 순장묘 전시관에는 금동관을 쓴 인골과 함께 한 사람의 인골이 더 있으니 바로 순장자다.

 

조문국의 ‘순장묘’, 고분전시관

 

순장(殉葬)은 한 집단의 지배층 계급에 속하는 인물이 죽었을 때 그를 따라 강제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죽은 사람을 함께 묻는 장법(葬法)이다. 가부장제가 확립된 고대 신분 사회에 존재했던 이 잔혹한 제도의 폐해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502년(지증왕 3) 봄 3월에 명령을 내려 순장을 금하였다. 그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을 죽여서 순장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이를 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순장 습속은 신라 초기부터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순장은 묘곽 안에 1구 이상의 인골이 확인되는 경우인데 의성 지역의 순장은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전반까지 대형 고분의 묘곽인 변형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와 덧널무덤(목곽묘)에서 확인된다. 대리리 2호분에서도 순장이 확인되고 있으니 조문국이 신라에 복속된 뒤에도 순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 조문국 사적지의 여름(2013년 8월). 잔디밭 유지가 쉽지 않은데도 조문국 사적지는 잘 관리되고 있었다.
▲ 조문국 사적지의 겨울(2016년 2월). 사적지의 사계가 제각기 다르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의성 지역의 순장 사례는 배치 형태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유형이다. A형은 머리 방향을 반대로 하여 주 피장자와 위아래로 겹치거나 평행하게 매장된 유형, B형은 피장자의 좌우에 같은 방향으로 평행으로 매장된 유형, C형은 부관에 다량의 유물과 함께 매장된 유형이다.

 

비인간·반문명적인 순장의 자취를 확인하는 기분은 좀 끔찍하지만, 그것은 이 지역에 강성했던 성읍 국가의 존재를 반증하는 것이다. 사학자들은 조문국이 신라에 복속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토착세력에 의한 지배체제가 계속됐을 것이라고 본다.

 

금성산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다른 지역의 토기와 구분되는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어 이를 ‘의성 양식 토기’라 부른다.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이를 ‘조문국은 결코 정벌 되지도, 멸망 당하지도 않고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운 증거로 이해한다.

 

‘모계 중심 여왕국? 신라 황금 문화 발원지?’

 

또 조문국의 기원을 ‘기원전 7세기’로 보거나 ‘모계 중심의 여왕국’ 의성을 중심으로 안동·예천·상주 일대에 금 생산지가 많았다는 점을 근거로 ‘신라 황금 문화의 발원지’로 바라보기도 한다. 글쎄…, 지역사에 대한 애정과 사실(史實)에 근거하지 않은 역사적 상상력은 어떻게 만나는 게 바람직할까.

 

어느새 해가 설핏 기울면서 사적지 주변의 공기가 차분해졌다. 느릿느릿 탐방로를 걸어 나오면서 거듭 이 사적지의 조경과 관리가 매우 성공적이라는 걸 확인한다. 얕은 언덕으로 오르는 완만한 곡선 길과 울타리, 가끔 밋밋한 고분의 행렬에 악센트를 찍는 소나무…….

▲ 사적지 중앙광장의 작약꽃밭. 내년 봄에도 여기엔 작약이 조문국의 영광처럼 흐드러질 것이다.
▲ 사적지 주차장 옆에 세운 문익점 선생의 ‘면작 기념비’. 여기서 그의 손자 승로가 목화를 재배했다.

내년 봄이 되면 다시 고분군 중앙광장에 조성된 1600여 평 작약밭에 작약이 흐드러지게 필 것이다. 그것은 천년의 침묵을 이어온 고분군의 적요를 일시에 무너뜨림으로써 저 번성하던 고대 왕국의 영화를 환기하게 될 것이다. 작약 피어나는 새봄을 기약하며 우리는 사적지를 떠났다.

 

2017. 11. 12. 낮달

 

[가을 나들이 ①] 경북 군위군 고로면 아미산(峨嵋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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