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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녀에게’의 시인, 문병란 떠나다

by 낮달2018 202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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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병란(1935~2015.9.25.)

▲ 문병란 (1935~2015) 시인

지난 25일, 문병란(文炳蘭, 1935~2015)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군부 독재정권에 맞서 민중과 통일을 노래하는 참여시를 꾸준히 발표해 온 시인은 196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인은 조선대학교 교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5·18기념재단 이사,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공동의장 등을 지냈다.

 

문 시인은 1970년대 이후 ‘죽순밭에서’, ‘벼들의 속삭임’ 등을 발표하며 저항 의식을 바탕으로 한 민중문학을 선보였다. <죽순밭에서>(인학사·1971)<땅의 연가>(창작과비평·1981), <아직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풀빛·1984), <무등산>(청사·1986) 등 시집 여러 권을 냈고, 전남문학상(1979), 요산문학상(1985)과 박인환 시문학상(2009) 등을 수상했다.

 

선 굵은 민중시의 시인

 

고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민주화운동으로 해직된 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수배를 당하고 농업협동조합에서 간행된 시집 때문에 투옥되기도 했다. 그의 시에 민중과 통일을 노래하는, 선 굵은 민중시가 돋보이는 것도 그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 문병란 시인의 시집들. 그는 민중과 통일을 노래하는 민중시를 주로 썼다.

1979년, 네 번째 시집 <죽순밭에서>가 도서출판 한마당에서 중간(重刊)되자, 유신 말기 정부는 이 시집이 “외설스럽고 민족정신을 부정했으며 일본 국기를 모독했다.”라는 이유로 판매 금지 조처를 내린다. 시인은 이에 대해 그 부당함을 따지고 판금 조처를 철회하라는 25쪽의 항의서를 당국에 제출하면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평범하고 친숙한 시어, 민중의 생활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건강한 언어로 ‘쉬운 시 쓰기’를 추구했다. 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노래한 시 ‘직녀에게’(<땅의 연가>·1981)는 바로 그런 시다. 지금은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지만, 애당초 이 시는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이 부른 민중가요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민중가요 ‘직녀에게’로 만난 시인

 

독자 대부분이 그랬듯이 나도 그의 시보다는 먼저 노래 ‘직녀에게’의 노랫말로 그를 만났다. 1980년대 후반 교육 운동에 발을 들여놓으면서였다. 당시 근무하던 학교에서 동아리를 지도하면서 아이들에게 이 노래를 가르쳤다. ‘직녀에게’는 견우와 직녀의 이별에 빗대어 분단과 통일을 노래한 시다. [관련 글 : 칠석(七夕), 끝나야 할 슬픔이 어찌 그것뿐이랴]

 

시보다 노랫말은 훨씬 간략하다. 그것은 호소력 있는 가수의 목소리, 애절한 멜로디와 어우러지면서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당위성을 절박하게 드러내 주었다. 김원중의 노래로 문병란을 만나면서 우리는 80년대 초 김원중의 히트곡 ‘바위섬’이 비극적 항쟁을 치른 도시 광주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교원노조의 창립에 참여하고 해직되는 과정에서 나는 문병란의 다른 시 ‘식민지의 국어 시간’도 만날 수 있었다. 식민지 시절에 태어난 시인은 일본어를 국어로 배워야 했고, 해방된 뒤에야 우리 말과 글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말글을 채 가꾸고 다듬기도 전에 다시 일본어와 영어를 익혀야 하는 현실을 그는 식민지의 시간과 다르지 않다고 노래한 것이었다.

 

모국어 교사의 분노와 비애, ‘식민지의 국어 시간’

 

‘식민지의 국어 시간’에는 고교와 대학에서 모국어를 가르쳤던 시인의 비애와 분노가 진득하게 묻어났고 젊은 중등교사는 거기 격하게 공감했던 것 같다. 그 이후부터 나는 가끔 한글날에 아이들에게 이 시편을 천천히 읊어주곤 한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무려 36년 가까이 이어졌고, 우리는 모국어 대신 일본어를 ‘국어’라 불러야 했다. 그예 1942년부터는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면서 아예 우리 말글조차 빼앗겨 버렸다. 그런데도 그 시절에 모국어를 빼앗겨 버린 상황을 노래한 시나 소설을 나는 알지 못한다. 비록 뒤늦긴 해도 그걸 노래한 시인으로 나는 문병란 시인을 기억한다.

 

“외설스럽고 민족정신을 부정했다”라는 이유로 판금 조치를 당한 그의 시 ‘죽순밭에서’를 읽으며 시인 문병란의 분노, 그 넉넉한 민족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그가 노래한 분단의 아픔이 ‘만남’으로 극복되는 날을 그리며 시인의 명복을 빈다.

 

* 빈소는 조선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발인은 29일 오전 8시. 장례는 ‘민족시인 문병란 선생 민주시민장 장례위원회’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지며, 고인은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라고 한다.

 

 

2015. 9.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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