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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부음, 궂긴 소식들

소설가 최인호를 보내며

by 낮달2018 202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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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1945∼2013. 9. 25.)

 

소설가 최인호 씨가 세상을 떠났다 한다. 조금 전 새벽잠에서 깨어 뒤척이다 들여다본 스마트폰 뉴스를 통해서였다. 아내에게 그의 부음을 일러 주었더니 어젯밤에 진작 들었다는 무심한 답이 돌아왔다. 벌써 그렇게 된 거야? 한 70 되었을걸, 하고 대답하다가 그가 1945년생, 해방둥이, 우리 작은누나와 동갑이란 사실을 기억해 냈다.

 

1970년대 초반 고등학교에서 문예 동아리 활동으로 공연히 바쁘고 심각할 때다. 그의 신춘문예 당선작 <견습 환자>(1967)와 꽤 반향을 일으켰던 ‘당선 소감’을 읽으면서 우리는 문학에 입문했다.

 

‘아이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조선일보>,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의 성장에 별 관심이 없다. 아이가 제대로 자라면 고마워할 뿐…….’

 

이라는 요지의 수상 소감을 우리는 두고두고 입에 올렸다.

 

막 문학에 눈뜨면서 해방 전 작가들의 작품을 섭렵하고 있다가 만난 그의 작품은 얼치기 문학 소년들의 넋을 빼놓았다. 이른바 ‘신선한 감수성’과 ‘경쾌한 문체’로 무장한 그의 소설은 마치 유쾌한 혁명 같았다. 최인호가 창조한, 점잔을 빼지 않고 의뭉스러운 속내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다분히 위악적인 인물들과 행동 패턴 앞에서 우리는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년 시절에 만난 ‘빛나는 감수성’ 최인호

 

당시 우리는 <무진기행>과 <내가 훔친 여름> 등 김승옥의 소설들도 함께 읽고 있었다. 막 10대 후반기로 접어드는 문학 소년들의 문학 수업에 1960년대와 1970년대 문학적 감수성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작가가 동거하고 있었던 셈이다.

▲ 그 시절, 백만 부를 팔았다는 대중소설 <별들의 고향>

그 시절, 백만 부를 팔았다는 <별들의 고향>이 준 충격과 감동은 지금도 설명하기 어렵다. 지금 읽으면 그저 그렇고 그런 대중소설이라고 여기고 말았을 테지만 당시 나는 그 소설이 교직해 내는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소설이 연재되는 일간지를 빼놓지 않고 읽었고, 단행본으로 출간된 소설도 여러 번 읽었던 것 같다.

 

▲ 영화 <별들의 고향> 포스터

나는 작가가 새로 연재하는 <내 마음의 풍차>를 읽기 위해서 자취생 주제에 일간지를 구독했고,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서슴지 않고 ‘연소자 관람 불가’의 개봉관으로 달려갔다. 기대와는 거리가 있는 영화를 보고 나서 ‘원작을 넘는 영화’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은 가외의 성과였다고 할까.

 

그는 이른바 ‘70년대 청년 문화’의 한 축이었다. 그 시절을 풍미했던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이장희 등의 통기타 가수들과 친교를 나누면서 그는 그런 대중 문화판에도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그가 쓴 송창식의 ‘고래사냥’의 노랫말 일부도 그런 활동이었으리라. 그는 <걷지 말고 뛰어라>라는 영화도 감독했는데, 나는 어느 재개봉관에서 본 그 영화의 어두운 화면을 아련하게 떠올릴 수 있다.

 

내 성장기에 최인호와 그의 문학은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1970년대를 달군 작가들이 좀 많았던가 말이다. 황석영과 윤흥길, 조선작을 만나면서 나는 최인호를 졸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고교를 졸업한 이태 후에 입대한 나는 거기서 조세희의 <난·쏘·공>을 읽으면서 무르익은 1970년 문학에 깊숙이 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인호는 왜 내 관심에서 멀어졌을까. 입대 이후 문학적 접촉이 제한되었던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작가가 이후 작품 활동에서 ‘대중’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던 게 결정적이지 않았나 싶다. 나는 80년대에 나온 그의 대중적 장편을 거의 읽지 않았다. 대중의 호응도 괜찮았고 영화화된 작품도 여럿이었지만 그게 다였다. 나는 그의 남다른 재능이 그런 식으로 소비되는 게 안타까웠지만, 그것도 그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 월간 샘터에 오래 연재된 <가족>의 단행본

1980년대 이후 내가 만났던 최인호는 <샘터>에 연재되고 있었던 <가족> 정도였다. 어쩌면 시시껄렁한 신변잡기에 그칠 수도 있는 이야기에 피를 돌게 하고 살이 붙게 하는 건 역시 ‘이야기꾼’으로서 최인호의 솜씨이자 삶의 바라보는 그의 그윽한 눈길의 힘이었다.

 

나는 거기서 그의 연상의 아내와, ‘다혜’라는 이름의 딸, 수십 년 단골로 다녔다는 ‘수도이발관’ 따위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가 신병으로 연재를 중단하기까지 <가족>은 무려 25년 동안 연재되었다고 한다. 그의 그런 호흡이 2000년대 이후의 몇 권의 대하 장편으로 이어지는 저력이 되었을까.

 

<별들의 고향>에서 <깊고 푸른 밤>까지

 

최인호를 다시 만난 것은 이상문학상을 받은 ‘깊고 푸른 밤’을 통해서였다. 오래 기려지던 70년대의 감수성이 80년대의 만만찮은 성찰과 만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대중’으로부터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그는 여전히 대중 쪽에 훨씬 가까이 있었던 까닭이다.

 

2000년대에 아이들에게 문학 수업을 하면서 나는 다시 그의 초기 작품인 ‘타인의 방’을 새로 읽게 되었다. 60년대의 김승옥을 곁들여 아이들에게 최인호의 단편을 가르치면서 나는 시간을 뛰어넘어 70년대의 고교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 영화 <깊고 푸른 밤>의 한 장면. 1984년도 배창호 감독이 만든 영화다.
▲ 영화 <걷지 말고 뛰어라>에는 박은수와 하재영 등이 출연했다.

90년대 말과 2000년대에 걸쳐 그는 몇 편의 역사소설과 종교를 주제로 한 소설로 꽤 주목을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던 것 같다. 육신에 병이 찾아온 것도 비슷한 시기였던 듯하다. 여전히 나는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굳이 그를 피해서가 아니라 더는 소설 읽기가 번잡스러워서였다.

 

▲ 종교적 구도를 다룬 최인호의 소설

오늘 그의 부음을 듣고 나는 서가를 살펴보았다. 꽤 오랫동안 우리 집 서가에 꽂혀 있던 ‘예문관’에서 펴낸 세로쓰기 본 <별들의 고향>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불현듯 그의 저작이 내 서가에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내 서가에 있는 그의 책은 ‘이상문학상’을 받은 <깊고 푸른 밤>을 표제로 한 수상 작품집이 고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배창호 감독이 만든 영화 <깊고 푸른 밤>도 보았다. 안성기가 주연한 그 영화에 넘치는 푸른빛 색조가 생생하게 기억된다. 적지 않은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과 관계없이 그는 선배 작가 김승옥처럼 영화 쪽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한 것은 ‘대중’에 대한 그의 관심의 표현이었을까.

 

말년의 그는 재기발랄했던 젊은 시절과는 많이 달랐으리라. <별들의 고향>을 비롯한 소설들에 빈번히 썼던, ‘나는 히히힛 하고 웃었다.’라는 구절을 그는 더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부음 앞에서 그가 뒤늦게 쓴 역사와 종교소설들의 목록을 떠올려 보았다.

 

처음으로 나는 종교적 구도를 다루었다는 그의 소설 <길 없는 길>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게 문학소년 시절을 사로잡았던 소설가를 떠나보내면서 내가 스스로 베푸는 제의(祭儀)가 될 수 있을지. 소설가 최인호, 그의 영면을 빈다.

 

 

2013. 9.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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