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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개천마리… 그 사나이의 삶과 진실

by 낮달2018 2020.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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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박상규의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국내서 출판되는 문학 서적 가운데 으뜸은 ‘수필(隨筆)’이 아닐까 싶다. 이 ‘붓 따라 가는 글’은 때론 ‘수상(隨想)’이나 ‘에세이(essay)’란 고급스런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기실 그것은 ‘신변잡기’라는 분류로 뭉뚱그릴 수 있는 ‘잡문(雜文)’이기 십상이다.

 

에세이? 혹은 신변잡기?

 

본격적 교술 장르로서 삶에 대한 묵직한 성찰이 담긴 ‘수상’이나 ‘에세이’는 언감생심인데도 스무 살짜리 새파란 젊은이에서부터 예순이 넘은 여배우들까지 자신의 책에 어김없이 ‘에세이’를 붙인다. 시인, 작가, 학자들이 쓴 수상집이 넘치듯 연예인과 체육인 등 이른바 대중 스타들이 쓴 수필집도 차고 넘치는 요즘이다.

 

블로그에 주기적으로 이런저런 글을 끼적이다 보니 인사치레로 ‘책을 내지 않느냐’, ‘책을 낼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더러 받는다. 그럴 때마다 되받아 주는 내 답은 그렇다.

 

그저 심심파적으로 끼적댄 글, 무슨 대단한 이야기도 메시지도 없는 그저 그런 푸념 같은 글을 누가 읽어줄까, 너 같으면 그걸 책으로 펴낼 생각이 나겠느냐, 펴낸들 돈을 주고 사보겠냐?

 

아마 신영복 선생의 수상집 몇 권, 이윤기와 공선옥의 수필집을 끝으로 나는 더는 수필류의 책은 사지도 읽지도 않는 편이다. 물론 알고 있다. 그런 식의 재단이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던가, 소아병적인 아집일 수도 있다는 사실쯤은. 그러나 그런 결정을 하게 되면서 나는 좀 편해졌다. 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고민의 영역이 하나 확실히 줄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례를 깨고 박상규 기자의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를 산 건 그의 독특한 이력을 알고 나서 일기 시작한 흥미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의 어떤 별다른 삶이 모두 궁금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오마이뉴스> 아이디 ‘개천마리’가 ‘개 천 마리’라는 사실을 알면서 생긴 흥미에 나는 썩 구미가 당겼던 것 같다.

 

나는 책 사기를 두고 고민했지만, 정작 저자는 책을 내는 문제로 고민을 거듭했던 모양이다. 저자는 책을 내지 않는다는 생각의 근거로 내공이 덜 쌓인 상태에서 책 내는 건 쪽팔릴뿐더러 책을 내도 팔리지 않을 것 같고, 책의 주요한 내용이 되는 가족사는 소설로 쓸 작정임을 들었다.

 

그러나 저자는 책을 냈고, 생각을 바꾼 근거를 솔직하게 밝혔다. 푼돈이라도 벌 수 있겠다는 ‘통빡’을 굴리면서 ‘엄마’를 위한 선물이 될 수 있겠다는 게 그것이다. 글쎄, 내가 산 책은 초판 1쇄가 나오고 한 달 만에 나온 2쇄니 저자의 기대만큼인지는 모르지만, 일정하게 팔리고 있는 듯하니 다행이다.

▲ 박상규의 블로그 <곰배령 가는 길>. 지금은 여기 들를 수 없다.

책은 세 부분으로 짜였다. 처음은 자신의 가족사를 다룬 부분(‘오마이 패밀리 와우리 샤론스톤’)이고, 중간은 기자로서의 자신의 삶과 생각을 밝힌 부분(‘나는, 개천마리 기자’), 마지막은 곧 마주할 40대 삶에 대한 계획(‘이렇게 살다 디져불란다’)이다.

 

부모의 이혼으로 빚어진 그의 가족사가 여느 사람으로선 상상도 못 할 아주 특수한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또 모친을 비롯하여 다른 형제자매와 헤어져서 부친과 함께 쓸쓸히 살아야 했던 그의 유년 시절이 누구나 겪곤 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자신의 가족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눈길은 심상하기만 하다.

 

과거를 떠올리고 그 시절의 장면을 복기하는 그의 시선은 너무 담백해서 마치 남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그런 심상한 태도가 흔히 그러는 것처럼 ‘위악’의 기미를 띠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태도는 적당한 익살기마저 띠고 있을 정도인데, 여기에 그의 글이 가진 미덕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런 심상한 태도로 뇌는 문면에 담긴 정직과 진정성은 읽는 이의 마음에 애잔하게 다가온다. 그는 슬픈 이야기를 담담하게 읊조려 그 슬픔에 곡진함을 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족사가, 그것을 온몸으로 겪어온 그의 성장기가 오늘의 ‘그’를 길러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이 책을 부산을 다녀오는 기차에서 단숨에 읽었다. 읽다 말고 가끔 멀거니 창밖의 풍경을 건너다보기는 했다. 그러나 이내 나는 책 속에 낸 그의 길을 쉬엄쉬엄 걷고, 그의 인도를 따라 호젓한 쉼터에서 한숨을 돌리기도 했다.

 

‘적당’의 미덕, 그러나 ‘노회’하지 않은

▲ 작가 박상규. 책 표지 날개에 실린 사진이다.

그는 1976년생, 우리 나이로 서른일곱이다. 그의 문체는 적당히 사실적이고 적당히 감각적이다. 무미건조하지는 않으면서도 지나치게 꺾고 사리는 능란한 감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그보다 대여섯 살쯤 많은, 요즘 잘 나가는 젊은 작가의 여행기를 읽다가 던져 버린 적이 있다. 나는 작가의 넘치는 기교에 질려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작가가 자신의 재능을 그런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적당’의 미덕을 지키긴 하지만 나는 그가 노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노회하기엔 그가 살아온 야생의 거친 삶이 정직해 보이기 때문이다. 감출 만한 것을 감추지 않는 한, 그 삶은 날것 그대로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가 자신의 가족사의 한 갈피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 진정성은 절로 빛나는 것이다.

 

이 책의 세 부분은 한 인간의 삶을 유기적으로 엮어준 인과처럼 보인다. 자신의 남다른 가족사가 저자를 키웠고, 그런 성장 과정이 기자 박상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삶을 통해 갈무리한 자기 삶의 청사진이 바로 마지막 부분이 아니겠는가.

 

책의 끝에서 밝힌 40대 이후의 계획을 읽으면서 나는 몸을 곧추세웠다. 이건 흔하디흔한 ‘삶의 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꿈’은 꿈일 뿐이지만 그가 시답잖은 얘기처럼 밝히고 있는 것들은 ‘꿈’이 아니라 곧 ‘이루어질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40대 이후의 삶과 계획을 그처럼 명쾌하게 밝힐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내일의 삶도 예측하지 못하고 현재의 삶을 멍에처럼 지고 살아가면서도 지켜야 할 게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 아내, 아이들, 사회적 지위, 집과 승용차……, 지켜야 할 것들은 되레 멍에가 되기 쉽다.

 

그러나 그는 가볍다. 아내도 아이도 없고, 지켜야 할 재산과 지위도 하찮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쉽게 자신의 삶을 털고 일어서지는 않는다. 박상규는 자신의 계획을 ‘꿈’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하나씩 시차를 두고 그가 이루어나갈 현실적 계획표로 읽었다.

 

마흔이 되면 그는 일을 그만두고 2~3년 동안의 해외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돌아오면 여행기를 묶어 세 권쯤의 책을 내고 ‘일용할 양식’을 벌겠단다. 그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는 그는 낙관주의자다. 그의 삶이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면화한 것은 전적으로 그가 가진 힘이다.

 

책에 실어낸 그의 삶과 진실의 힘!

 

그는 지리산이나 남해 어디쯤, 또는 강원도 깊은 산골로 귀촌하여 인생 후반전을 살겠다고 한다. 해외여행에서도 그렇지만 이 후반전의 삶에도 ‘결혼’(아내)은 여전히 선택지 중의 하나다.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안 해도 괜찮다. 결혼이 행복을 위한 필수라고 여기는 사람들로서는 쉽지 않은 결단이다.

 

그가 지으려는 집 구상은 생략한다. 그는 어쨌든 구들을 놓아 장작불을 지피는 집을 짓고 거기서 민박을 하겠다고 한다. 이름도 정해 두었다. ‘진달래 민박’. 그리고 거기서 마을신문도 창간하고, 작은 도서관에서 아이들 글쓰기 학교를 열고 싶다는 포부 끝에 그는 책의 마지막 쪽에서 글의 아퀴를 짓는다.

 

“그래, 어차피 이게 다 행복해지려고 하는 짓 아닌가. 지금, 바로 이곳에서, 행복해지기를 두려워 말고 그냥 이렇게 살다 디져불자!”

 

여느 사람이 고만고만하게 펼쳐 놓은 청사진이라면 글쎄, 그게 잘 될까, 하고 웃고 말겠지만 나는 저자의 이 마지막 말이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다. 정색을 하기보단 농지거리가 섞여 있는데도 어쩐지 그의 말에서는 굳건한 심지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게 312쪽짜리 ‘잡문’ 책에 그가 실은 ‘삶과 그 진실의 힘’이다.

 

언제쯤일까. 그가 세계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여행기 몇 권을 내게 될 때는. 만약 그때도 내가 온전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처지라면 기꺼이 나는 그의 책을 사서 읽겠다고 약속한다. 진달래 민박도 마찬가지다. 그가 운영하는 민박집이 내가 제힘으로 능히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거기 가서 하룻밤을 묵을 것이다. 혹 그가 담근 술 한 잔을 얻어 마실 수 있다면 더는 바랄 데가 없겠다.

 

 

2012. 8. 22. 낮달

 


박상규 기자는 진작에 <오마이뉴스>에서 나왔다. 그는 세계 일주 대신 탐사보도 전문 매체 진실 탐사 그룹 ‘셜록’(https://www.neosherlock.com/)을 꾸리고 있다. 자칭 ‘재심 전문’이라는 박준영 변호사와 함께 재심 사건을 추적한 책 <지연된 정의>(후마니티스, 2016)를 냈고, 2018년 직원들을 상대로 엽기적인 갑질과 폭행을 일삼은 사실이 드러나 큰 파문을 일으켰던,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비리를 파헤쳐 폭로했다.

 

매체를 꾸리는 일이 만만찮은 모양이다. 나는 지난해 5월에 김천구미역에서 KTX를 타면서 기차에서 내리는 그를 만나 잠깐 인사를 나누었었다. 그가 쓴 동화 <똥만이>(웃는돌고래, 2014)의 서평을 쓰고,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면서 맺은 연이다. 그의 진실 탐사 그룹의 건투를 빈다.

 

2020.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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