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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울의 춘향전, <남원고사(南原古詞)>

by 낮달2018 2020.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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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19세기 서울의 춘향전, <남원고사(南原古詞)>

▲  이윤석, 최기숙 지음, <남원고사> 서해문집 , 2008

<춘향전>을 비롯한 이른바 판소리계 소설은 조선 후기 평민 의식의 성장이 빚어낸 서민문학의 결정판이다. 이들이 국민 문학(소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아이들은 배밀이로 방바닥을 길 때부터 울긋불긋한 그림책에서 춘향이와 어사또를, 심청이와 뺑덕어미를, 그리고 흥부와 ‘다리 부러진 제비’를 만나기 시작한다.

 

자라서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동화 형태로 예의 이야기를 읽게 되고 중고등학교에서는 일부이긴 하지만 그 원문을 배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 줄거리는 뚜르르 꿰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야기의 구체적인 전개, 그 세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한글 고전소설의 묘미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뻔한 줄거리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남-이별-시련-재회'의 서사구조나, 반동인물 변학도의 횡포, 암행어사 출두 따위의 반전만을 바라본다면 <춘향전>은 진부한 통속소설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춘향전이 고전으로 기려지는 것은 그것이 사랑의 보편성을 증빙하면서도 조선 후기 사회와 그 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의 삶과 그 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춘향전>에서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과 민초들의 삶은 3·4 또는 4·4조의 운율을 바탕으로 한 서술로 다양한 장면과 장면 가운데 날것으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진부하고 상투적인 줄거리의 건조함을 상쇄하면서 이야기에 건강한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나 현대소설의 문법과 서술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판소리 사설의 자취가 역력한 이 고전적 서술은 쉬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정작 고전을 고전답게 만들고 있는 이 구성 요소가 그것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하는 장애로 기능한다는 것은 만만찮은 역설이다.

 

우리 고소설들이 반쪽만 이해되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접근의 문제'에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우리 옛 소설을 새롭게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줄거리만이 아니라, 그 시시콜콜한 속살까지 드러낸 고전을 만날 수 없을까 하고 궁리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우리 옛말의 묘미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겨레의 연인 춘향과 몽룡을 만날 수는 없을까.

 

‘19세기 베스트셀러, 서울의 춘향전’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춘향전>의 이본(異本) <남원고사(南原古詞)>는 그 같은 기왕의 아쉬움에 답하는 신간이다. 이 책은 연세대 국문학과에서 일하고 있는 이윤석·최기숙 두 선후배 고전문학자의 ‘협동 연구’의 결과로 세상에 나왔다.

 

<춘향전>을 연구자의 손에서 독자들의 손으로 되돌려 주기 위해 두 연구자는 역할을 분담했다. 먼저 이윤석 교수는 원전의 고사(故事)와 한시·한자를 밝히고 주석을 붙였다. 한자는 물론 띄어쓰기조차 되어 있지 않은 원전의 첫 벽을 그는 그런 방식으로 낮추었다. 이어 최기숙 교수는 이를 현대 국어로 옮겨서 독자들이 훨씬 수월하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작품 이해에 필요한 문학적·문화사적 정보와 중요한 개념 및 지식을 정리하고 제시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무려 358종에 이르는 이본(異本)을 거느린 <춘향전>은 20세기 이전 조선 사회 최고의 베스트 셀러였다. <춘향전>과 세부 내용을 조금씩 달리하면서 기본 구도를 공유하고 있는 이본들은 목판본을 비롯하여 활자본과 필사본 등으로 전해진다. <남원고사>는 서울 누동(樓洞), 즉 오늘날 종로구 와룡동과 묘동에 걸친 지역의 세책점(貰冊店, 오늘날의 도서대여점)에서 유통되던 국문 필사본 소설이다.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중국에서 들여온 통속소설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소설 발달을 자극했다. 독자들의 요구에 힘입어 전문적으로 필사한 책을 돈을 받고 대여하는 세책점이 생겨났는데, <남원고사>는 20세기 초까지 존재했던 이 세책점의 주요한 유통 상품이었다.

▲ <남원고사> 필사본

앞서 말했듯 <남원고사>는 춘향과 몽룡의 사랑과 이별, 변학도에 의한 고난과 위기, 암행어사 출도라는 반전과 재회 등의 스토리 라인을 건조하게 따라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줄거리 전개에 대한 부담 없이 당대에 유행한 시조·잡가·민요·한시·가사·소설 등의 일부나 전문과 함께 차림새·실내 장식·놀이·유행어 같은 문화 정보가 풍성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이 책은 원전 <남원고사>의 의미와 표현을 그대로 살리려고 했지만, 독자들이 쉬 다가갈 수 있도록 필요한 곳에는 변화를 주었다. 모두 다섯 권의 각 권을 장으로 나누어 제목을 붙이거나, 문단을 구분하고, 현대인의 독서 호흡에 맞게 문장 길이 등을 조절한 것이 그것이다. “공부하는 ‘연구서’가 아니라 읽는 즐거움을 주는 ‘소설’이므로 ‘각주’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했다”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 책에서는 작품 이해에 필요한 정보와 중요한 개념과 지식을 정리하고 제시했다.

그러니 독자는 편하게 읽기를 ‘시작’하면 된다. 가끔 본문 중에 나타나는 옛 그림은 양념으로 맛보면서. 각 장에 붙은 제목과 해설은 소설의 전개를 뭉뚱그려 주면서 동시에 당대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문학·역사·문화 정보를 친절하게 들려주는 일종의 보너스라고 생각해도 좋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두 연인의 애정 행로뿐 아니라 그 시절의 조선 사회의 한 모습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사건의 전개 사이에 심심치 않게 이 도령의 복식 치레와 춘향의 집과 방치레를, 남원 왈짜들의 놀이판과 노래를 친절한 해설과 함께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춘향의 방에선 ‘60장으로 된 투전인 육목, 80장짜리 투전인 팔목, 쌍륙, 골패, 장기, 바둑’이 갖춰져 있고, 한쪽에선 옥중의 춘향이 매를 맞았다는 소문을 듣고 모인 ‘남원 48면의 왈짜’들이 벌이는 소란이 시끄럽다. 그들이 불러대는 12가사 중 <춘면곡>, <처사가>, <어부사>도 만날 수 있다.

 

권마다 한두 편씩 실린 조선 후기 문화사·문학사·박물학적 정보를 다루고 있는 본격 해설을 만나는 것도 각별한 지적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것은 “<남원고사>로 알아보는 ‘세책’의 특징”, “조선 시대에는 어떤 욕설이 있었을까”, “변 부사는 과연 악인인가”, “월매와 춘향 모녀의 애증 관계”, “서민들의 지혜가 담긴 <남원고사>의 속담” 등이다.

▲ 권별로 당대의 문화사·문학사 등의 정보가 담겨 있다.

<남원고사>에는 변 부사에 대한 서술자의 직접 언급은 없지만, 간접적으로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며 자기 절제가 부족한 점이 부각’되고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변 부사가 춘향에게 수청을 요구하는 것은 악인다운 처사라거나 예외적인 일이었다기보다는 당시의 관례’라고 소개하면서 그런데도 변 부사를 악인으로 여겼다는 것은 그런 관례가 부당하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걸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다.

 

<춘향전>의 이본이라고 하지만 <남원고사>는 우리가 기왕에 알고 있는 <춘향전>과 다른 내용도 제법 있다. 흔히들 우리는 여주인공을 성 참판의 서녀 성춘향으로 알고 있지만, <남원고사>에는 김춘향이고 그녀는 스스로를 ‘천한 창가(娼家)의 기생’이라고 한다. 물론 몽룡과 가약을 맺은 후에는 ‘종을 대신 바치고 몸을 빼내어 천한 것을 면했기에 기생 명부에는 없’지만 말이다.

 

일반적으로 춘향의 정절과 사랑은 ‘신분 상승’이라는 보상을 통해 완성된다. 그러나 양반의 서녀로 혈통의 흠집을 줄인 다른 이본과 달리 <남원고사>에서 춘향은 ‘기생의 딸, 기생’의 신분으로 등장한다. 천민이지만 양반의 혈통을 지닌 성춘향에서 천한 기생 ‘김춘향’으로의 변화는 조선 후기 사회의 계층 인식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는지 모른다.

 

양반의 서녀에서 ‘정렬 부인’으로의 신분 상승보다 볼 것 없는 벌거숭이 천민에서 정렬 부인, 정실부인으로의 신분 변화가 훨씬 더 극적이고 더 충격적인 일이다. 그것은 신분제의 붕괴가 시작되긴 했지만, 여전히 공고한 계급 사회였던 18, 9세기의 조선 민중들의 꿈과 환상의 대리 만족과 이어져 있는 것이다.

 

한편 다른 이본에서는 이 도령이 바로 어명을 받아 전라 어사가 되지만, <남원고사>에서 이몽룡은 임금이 원하는 직책을 묻는 등의 과정을 거쳐 어사가 된다. 현실 문법에는 어긋나지만, 춘향을 구하기 위한 권력을 부여하는 과정의 ‘문학적 허용’은 다른 이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남원고사>가 서울의 세책점에서 인기를 누리던 소설이라는 점은 이 작품이 배경은 남원이지만, 상당 부분 서울이라는 문화적 배경을 드러낸 데서도 나타난다. 남원의 왈짜들이 서울의 유명 주점과 약방 지리를 꿰고 있는 등 <남원고사>는 당대 서울의 문화를 상당수 반영하고 있다.

 

저자들은 <남원고사>가 ‘당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집대성하려 한 작품’이며, 이는 작가가 ‘소설의 대중성, 통속성, 정보성을 잘 이해하고 조율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세기를 넘어 <남원고사>가 오늘의 독자들에게도 예와 같은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는 이유는 충분하다는 뜻이겠다.

 

소설을 읽는 일은 한 시대의 삶과 세상을 이해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남원고사>를 읽으면서 우리는 한두 세기 이전에 이 땅을 살고 갔던 선인들의 삶과 자취를 더듬을 수 있으며 그들의 진솔한 생활감정과 해학과 풍자가 오늘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오래 연구자의 손에 머물러 있던 이 지난 세기의 베스트 셀러를 그 예스러운 맛을 잃지 않은 채 오늘의 독자에게 선사하고 있는 글쓴이들의 노력을 치하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모두 거기에 있다. <춘향전>뿐 아니라 다른 소설들도 비슷한 형식으로 묵은 세월의 때를 벗고 독자들 앞에 생생하게 선뵐 날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2008. 8. 5. 낮달

 


단순히 전공에 따른 흥미만은 아니었다. 가장 널려 알려져 있긴 하지만 정작 세부 내용을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문 게 우리 고전소설이다. 저자 중 한 분도 면식이 있는 분이다. 연세대 이윤석 교수는 전교조 창립 당시의 교수 조합원이었다. 선생께서도 근무하던 대구 소재의 사립 대학에서 해임되었을 때 나도 해직 중이었다. 제자들을 데리고 실상사에 갔을 때, 자녀와 함께 거기 오신 선생을 우연히 뵙기도 했었다.

 

아주 속이 꽉 찬 정보가 가득 차 있어서 읽는 내내 쾌재를 불렀다. 비교적 시간과 공을 들여 쓴 서평인데 그건 내 생각일 뿐, 내용이 '별로'였던 모양이다. 하루쯤 <오마이뉴스> 메인 면에 걸려 있는 기회도 얻지 못했다. 출판사에 위 사진 파일을 요청해 받으면서 선생께 대신 안부도 여쭈었는데…, 좀 민망하긴 하다.

 

그러나 한나절쯤 집중해서 쓴 글이어서 그 과정에 자신에게 공부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글쎄, 이왕 나온 책이니 많이 팔리는 게 선생께는 물론, 출판사에도 좋은 일이 되겠다.

 

 

2008. 8.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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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19세기 서울의 춘향전 <남원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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