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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이웃 아줌마들을 위하여

by 낮달2018 2020.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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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에게

- 홈에버의 40대 여성 노동자

▲ 그는 자신이 파리 목숨보다 못하다고 느꼈다 했다 .

오늘 나는 수업에서 너희들에게 ‘인간’과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존엄성’을 이야기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신분과 학력, 경제력, 미추와 노소를 떠나 저마다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지니고 살아간다고 말이다.

 

박완서 ‘황혼’의 여주인공 ‘늙은 여자’

 

모든 사람이 저마다 지니고 살아가는 ‘자존감’은 달리 말하면 ‘자기 존재에 대한 자부심인 동시에 그 존엄성의 인식’이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 존재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지.

 

인간의 자존감을 훼손하고 능멸하는 것은 폭력이다. 폭력은 그 야만적 얼굴로 인간의 존엄을 허물어뜨리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상식을 넘는 체벌도 마찬가지다. 체벌은 아이들의 신체에 아픔으로 남는다기보다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굴욕감을 남긴다. 그리고 저도 몰래 거기 길들어지면서 폭력에 무뎌지기도 한다.

 

오늘 우리는 박완서의 소설 ‘황혼’을 배우면서 그 ‘자존감’에 상처 입은 한 여인을 만났다. 명치께 희미하게 만져지는 응어리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정작 그것보다는 가족들의 무관심에 가슴 아파한 ‘늙은 여자’의 이야기 말이다. 그녀는 똑같이 가슴앓이를 하다 떠난 시어머니를 생각하지. 그리고 그 여자의 명치를 쓸어 줄 때마다 그녀가 짓던 화사한 웃음도 기억하지.

 

그리고 자신이 시어머니께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명치께를 만져 주기를 갈망한다. “명치 속에 이게 뭔가 한 번만 만져 줘다오.” 어느 날, 그녀는 며느리의 손을 끌어다가 명치를 만져 보게 하려고 했지만, 며느리로부터 성적 욕망의 표현으로 오해받으며 짙은 모멸감을 느낀다.

 

그 여자는 혼자 살지 않지만, ‘불쌍한 건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니라 자기 뜻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임을 깨닫고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느낀다. 말하자면 그녀는 무관심한 가족으로부터 자신이 지녀온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자아에 대한 존중감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건 단순히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다.

 

홈에버의 40대 여성 노동자

▲ 해고에 맞서 파업농성 중인 이랜드일반노동조합 여성 노동자들. ⓒ한겨레

때로 몰이해와 무관심이 더 날카롭게 사람의 가슴에 짙은 상흔을 남기기도 한다. 나는 최근 경찰에 의해 해산된 할인점 홈에버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비정규직 사원들과 함께 파업에 들어간 40대의 주부 노동자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파리 목숨보다 못한 존재구나”

 

계산원, 6시간 동안 화장실에도 못 가도 계산대는 지켜야 할 때도 있다는, 스스로를 ‘찍순이’라 부르는 이 주부 노동자들의 벌거벗은 삶 앞에서 나는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들보다 더 편한 노동으로 더 많은 임금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막다른 삶, 존엄성의 위협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한겨레가 만든 동영상을 되풀이해 보며, 나는 너희들에게 이 슬픈 우리 시대의 삶을 전하고 싶었다. 너희들에게 아직 삶은 미지의 시공간일지 모른다. 그러나 멀지 않은 어느 순간부터 삶은 민얼굴로 너희들 앞에 그 무심한 얼개를 드러낼 것이다.

 

▲ 우리의 삶은 이웃들과 이어져 있다. 그걸 인식하는 게 '연대'다.

오래 화장실에 못 가 방광염을 앓거나, 종일 서 있어 하지정맥류의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아이들의 학원비와 교통비를 걱정하는 이 가난한 어머니들을 이해와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은 너희들이 미적분이나 현재 분사를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걸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이 가난하게, 그러나 열심히 당당히 살아가는 것은 너희들의 어머니, 이모의 삶과 다르지 않다. 나는 너희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 사회의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는 만큼이나 그들의 삶을 따뜻하게 바라볼 줄 아는 아름다운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한 사회,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 없이 이룰 수 있는 성취는 반쪽의 성취에 그칠 뿐이다. 삶이란 나의 윤택한 삶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아름다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너희들의 물기 어린 시선만으로도 이 이웃 아줌마들의 삶은 새롭게 그 존엄성을 회복할 거라는 데 나는 내기를 걸 수도 있다.

 

20일이 넘게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딱딱한 매장 바닥에서 생활하면서도 “우리 아이 학원비와 생활비를 벌게 해 주는 고마운 직장”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이 착한 이웃 아줌마들의 삶을 들여다보아라. 그들의 삶과 슬픔이 너희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너희는 얼마나 의젓하게 자라겠느냐.

 

 

2007. 7. 24. 낮달

 

 

*이들의 싸움은 다행히 해결되었다. 이 투쟁을 배경으로 7년 뒤에 만들어진 영화가 <카트>다. 꽤 잘 만들어진 영화였는데도 이 영화는 손익분기점의 절반인 82만의 관객 수를 기록하고 종영되었다. 이해와 공감을 위해서도 자본이 움직여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카트>, 공감 이후

서로 다른 계급, 계층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류 계급의 삶과 그 양식에 대해서는 알 만큼은 안다. 자신의 삶과는 무관할뿐더러 허상에 그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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