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트(cart)>의 공감과 연대
서로 다른 계급, 계층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류 계급의 삶과 그 양식에 대해서는 알 만큼은 안다. 자신의 삶과는 무관할뿐더러 허상에 그치긴 하지만 그걸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 아는 것은 텔레비전 화면에서 날마다 그들의 삶을 시시콜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류계층이 허상이나마 상류 계급의 삶을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부자들의 이해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피상적이다. 가난한 이들에겐 부자들의 삶이 동경의 대상이지만 그 역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학교 짝꿍이었던 부잣집 아들로부터 ‘돈이 왜 없느냐’는 반문을 받고 말문을 잃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런 상황은 서양에서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흔히 인용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반문 “왜 과자를 달라 그러지, 맛없는 빵을 달라느냐”는 그 같은 계급 간 불통 사례의 본보기인 셈이다.
1. 공감과 연대
서로의 삶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계급 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현대사회의 진전에 따라 직업도 다양하게 분화되면서 직업을 가르는 칸막이가 높아졌다. 사람들은 주변의 삶에 무심하고,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타인의 삶을 잘 알지 못한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창구로는 그래도 책이나 영화가 쓸모 있다. 일종의 구경꾼으로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형식이긴 하지만, 최소한의 공감이 이루어진다면 그 칸막이는 다소 낮추어질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공감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관계의 출발점이지 도달점은 아니다.
영화 <카트>는 대형 마트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우리 시대의 가장 낮은 데서 일하는 숱한 ‘을’ 가운데 하나인 이들 노동자의 삶이 일반에 알려진 것은 계산원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의자가 주어지지 않았다. 늘 서서 일해야 하는 이들 계산원의 열악한 근무환경이 갑작스러운 여론의 조명을 받았지만, 아직도 그 문제는 의미 있는 개선에 이르지 못한 듯하다.
영화나 책이, 계급과 직업이 다른 집단의 삶에 대한 간접적 이해에 이바지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한 일간지 기자들이 경험한 노동을 다룬 책 <4천 원 인생>은 독자들에게 우리가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이들 노동의 실상을 깨우치게 해 주었고, 영화 <변호인>은 관객들에게 군부독재 시절에 자유와 인권이 어떤 방식으로 압살 되었던가를 가르쳐 주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세상과 사람들의 삶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무엇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비로소 그들의 삶의 고단함이 나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며 그들의 저항과 투쟁이 기실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선택지의 하나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영화 <카트>가 담담하게 펼쳐가는 서사는 특별히 극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그것이 환기하는 현실이 일반 대중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가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반찬값’ 아닌 ‘생활비’를 벌러 나온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옥죄어오는 자본과 부딪쳐가는 이 서러운 이야기는 반드시 ‘그들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일 수도 있다고 사람들은 시나브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파업은 사상이 불온한 좌경세력들의 전유물일 거라고 믿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꽤 많다. 그러나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자본에 파업으로 맞서는 일이 그런 삐딱한 이들만이 하는 게 아니라는 아주 평범한 진실을 <카트>는 가르쳐 준다. 이들 여성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마트 안 농성과 파업 같은 극한적 행동으로 이끄는 것은 불온한 사상이 아니라 소박한 인간적 소망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짓는 관객들의 공감은 연대의 다른 이름이다. <4천 원 인생>의 독자들은 대형 음식점 종업원들의 노동 강도를 엿보고 나서야 “식당에서 물 달라 하기도 미안했다”고 토로한다. <카트>의 관객들은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마트의 여성 노동자를 이전과는 다른, 연대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나아가 그들의 소박한 소망은 어떤 이름으로도 비난받아선 안 된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대는 거기까지다. 지금까지 <카트>를 관람한 80여 만의 관객들의 공감과 울림이 우리 사회의 노동과 삶의 이해에 얼마만 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굳이 기대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열망의 무게는 <변호인>을 본 1100만이 넘는 관객마다 다르다. <카트>를 보면서 눈시울을 적신 관객들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트>를 보고 눈물짓던 관객들이 영화관 알바는 ‘투명인간’으로 취급”하더라는 한 멀티플렉스 아르바이트생의 고백[관련 기사 ☞ 바로 가기]은 바로 우리 시대의 연대가 가진 한계의 일부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바빠 이웃의 삶에 눈여겨볼 만한 여유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2. 절반의 승리, 그 이후…
“회사가 잘 되면 저희도 잘될 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해고 되었습니다.”
<카트>는 2007년 이랜드그룹으로부터 정리해고를 당했던 홈에버 노동자들의 510일 장기파업을 뿌리로 한 영화다. ‘더(the)마트’ 노동자들은 회사의 부당 해고 위협에 맞서 노동조합을 설립하여 파업에 들어가 우여곡절 끝에 절반의 승리를 거둔다.
관객들은 일방적 정리해고에 맞서 노조를 만들어 투쟁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겪어야 하는 설움과 분노에 공감하고 눈물지으며 그들의 결연한 출정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영화의 대단원, 장렬하게 물대포에 맞서는 이들 노동자의 모습과 에필로그가 환기해 주는 현실은 막막하다. 에필로그는 노조 지도부가 복직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자막으로 전한다. 이들의 힘겨운 승리가 절반에 그친 이유다.
영화가 전하는 공감과 감동으로 흘리는 눈물 다음에 오는 것은 분노와 허탈감이다. 우리 사는 세상이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린 자본 앞에 벌거벗고 선 900만 대한민국 비정규직 노동자의 얼굴이 앞을 가리기 때문이다. 1800만 임금노동자의 절반인 900만 가운데 염정아(선희 역)와 문정희(혜미 역), 김영애(순례 역) 같은 여성들도 440만에 이른다.
이처럼 임금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 비율이 50%에 이르는데도 정부는 한가하게 ‘정규직에 대한 해고 요건 완화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기업 부담을 덜어주는 차원에서’다. 이는 대통령이 국정과제에서 ‘정리해고 요건을 강화하겠다’고 밝힌 것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이익의 균형’, ‘고용 유연화’ 따위의 넘치는 언사 가운데 ‘고용 안정’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따위가 들어설 여지는 전혀 없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위하여 ‘암 덩어리, 원수 같은 규제’들을 ‘한꺼번에 단두대에 올려 처리하겠다’는 정부의 서슬은 푸르기만 하다. 그뿐 아니다. 대법원은 헌법에 명시된 ‘노동권’이 아닌 자본의 ‘경영권’을 ‘존중하여’ 쌍용자동차 정리해고가 합법이라고 판결했다. 이 땅의 ‘잘난 법률’과 그 ‘운용자’들은 날마다 친자본, 친기업적 판결로 거기 즐거이 화답하는 것이다.
태영과 수경의 ‘미래’, 혹은 미진의 ‘현재’
파업 참여 노동자 가운데 천우희(미진 역)의 존재는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미진은 대학을 졸업한 후 취업난 속에 면접만 50번 넘게 떨어진 바 있는 마트의 계약직 직원이다. 다른 일을 찾다가 여의치 않자 파업에 동참하게 되는 그녀는 쿨하고 씩씩한 ‘88만원 세대’다.
그녀는 마치 2014년 현재, 청년실업 시대와 이른바 ‘삼포 세대’의 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처럼 보인다. 영화 밖의 그녀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면접을 보고, 얼마나 오랫동안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할까. 우리들 기성세대는 결혼과 출산은커녕 연애조차 포기해야 하는 목마른 청년 세대를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수학 여행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선희의 아들 디오(태영 역)와 급우 지우(수경 역)를 지켜보는 마음도 짠하긴 매일반이다. 편의점 점주의 횡포에 분노해 유리문을 부숴버리는 수경의 분노는 그 아이가 감당해야 하는 가난만큼 안쓰럽다. 이 아이들은 자라서 부모나 앞 세대와 달리 정규직이 될 수 있을까. 태영과 수경의 미래는 미진의 현재일까, 아닐까.
영화관에는 뜻밖에도 여자 중고생이 꽤 눈에 띄었다. 아이들이 굳이 <카트>를 보러오다니 기특하다고 생각했는데, 함께 간 딸애는 아이돌 디오를 보러 온 아이들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아이들은 저희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맡은 배역의 의미를 얼마만큼이나 이해하게 될까. 이 아이들도 자라서 비정규직을 피해갈 수는 있을까를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애써 도리질을 했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굳이 대구의 예술영화 전용관에 가지 않고 지역에서 <카트>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꽤 소문이 난 영화인데도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데는 많지 않은 모양이다. 상영관 찾기가 어려운 것은 상업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카트>가 주류에서 비켜나 있기 때문이다.
멀티플렉스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카트>에는 12월 초 현재 80여만 명의 관객이 들었다. 손익분기점이라는 160만의 꼭 절반이다. 제작사에 따르면 <카트>는 오는 8일부터 내년 1월 7일까지 한 달간 장기 상영에 들어간다고 한다. 서울 필동의 대한극장과 신문로의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다.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관객들에게 지속적인 관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장기상영과 함께 단체관람 인원이 100명 이상이면 대관을 통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영화가 환기하는 현실은 공감과 분노 정도로는 쉽사리 넘지 못하겠지만, 영화를 통해 나누는 공감의 확산이 우리 사회 변화의 실마리쯤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상업 영화 최초로 ‘비정규직 노동’ 문제를 다룬 영화 <카트>가 손익분기점을 너끈히 넘겼으면 좋겠다. 그게 변화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고, 이후 한갓진 판타지가 아닌,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4. 12. 6. 낮달
* 이 영화는 결국, 손익분기점의 절반인 82만의 관객 수를 기록하고 종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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