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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지친 마음 어루만져주듯... 반짝이던 황매산 ‘억새 물결’

by 낮달2018 2018.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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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군락지 아래까지 차로 오를 수 있는 합천 황매산을 찾다

▲ 황매산의 억새는 억세지도, 역동적이지도 않았지만 처연한 물결이 고즈넉하게 전하는 넉넉함과 안온함이 있었다.

‘억새’라 하면 우리 가족은 저마다 할 말이 많다. 그건 2013년 11월 초, 아무 준비도 없이 오른 영남 알프스 간월재의 ‘억새 하늘길’에서부터 비롯한다. 한 시간이면 닿는다 싶어, 동네 뒷산에 가는 모양새로 어정어정 오르다가 된통 욕을 본 곳이 간월재이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 ‘1박2일’도 반한 한국의 알프스? 가보면 누구든 반한다)

 

그러나 고생한 보람도 그윽하였다. 지금도 딸애는 간월재 허리를 치닫는 억새 하늘길의 감동을 되뇌곤 할 정도니까 말이다. 이듬해에도 우리는 다시 억새를 찾아 나섰다. 비교적 가까운 경주의 무장봉 억새군락지를 올랐는데 철이 조금 일렀다. 은빛 억새 물결을 만나지 못한 대신, 우리는 넉넉하게 챙겨간 음식을 즐길 수 있었다. (관련 기사 : 은빛 억새 물결? 아직은 철이 이르다)

 

지난 11월의 첫 금요일, 모처럼 집에 온 아들 녀석과 함께 우리 내외는 합천의 황매산(黃梅山)에 올랐다. 나는 황매산을 그 남쪽 기슭에 영암사지(靈岩寺址)를 품고 있는 산으로만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 폐사지에 가보리라고 재기만 하다가 정작 나는 그 절터가 아니라 황매산부터 먼저 찾은 것이다.

 

굳이 억새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깊어가는 가을을 느낄 수 있는 데라면 어디라도 좋다고 생각한 나는 그 후보지로 덕유산을 꼽았는데,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얼핏 만난 황매산 억새를 후보지에 끼운 것은 나중이었다. 가는 데 걸리는 시간도 비슷해서 나는 두 산 가운데 초행인 황매산을 골랐다.

 

간월재에 오르며 생고생을 한 것과 비기기는 어렵지만, 경주 무장봉 등정 길에서도 우리는 팍팍한 다리를 두들겨야 했었다. 대체로 억새 명소는 산 정상부의 능선에 있기 마련이다. 억새를 보고 즐기려면 몸이 고단해도 참고 견뎌야 한다는 얘기다.

▲ 황매산은 무엇보다도 억새군락지 바로 아래까지 차로 오를 수 있어 가족 단위 등산객이 많다.

그러니 정상 바로 아래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는 황매산의 이점에 나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경남 합천군과 산청군 경계에 있는 해발 1108m의 황매산이 어떻게 정상 아래까지 찻길을 갖추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한결 느긋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황매산은 가야산(1430m)과 함께 합천을 대표하는 명산이다. 영남지역 산악인들에게는 ‘영남의 소금강’으로 불린다. 황매는 청매(靑梅)와 마찬가지로 매실이 익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직 덜 익은 매실이 청매고, 충분히 익은 게 황매다. 이 산이 황매로 불리게 된 까닭은 정상에 올라서면 주변 풍광이 활짝 핀 매화잎 모양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983년에 군립공원이 되고, 2012년에 <시엔엔(CNN)> 선정의 ‘한국에서 가봐야 할 50선’에 뽑혔고, 2015년 산림청의 한국 야생화 군락지 100대 명소에도 선정된 황매산은 소백산, 지리산 바래봉에 이어 ‘철쭉 3대 명산’에 이름을 올렸다. 4월 말에서 5월 중순까지 열리는 ‘황매산철쭉제’ 기간에 이 산의 정상은 진분홍빛 철쭉으로 뒤덮인다고 한다.

 

철쭉군락지가 봄나들이 행락객을 불러들인다면 가을에 사람들을 꾀는 것은 해발 900m 고지를 뒤덮은 은빛 억새 물결이다. 철쭉군락지가 있는 북서쪽 능선 아래 해발 900m의 황매평원(平原)에 펼쳐지는 억새밭은 가을의 정취를 제대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일대 장관이다.

 

이른바 ‘억새 명산’은 경기도 포천 명성산(鳴聲山·922m), 강원도 정선 민둥산(1118m), 간월재(약 900m)에서 신불산(1159m)을 거쳐 영축산(1081m)으로 이어지는 영남알프스, 전남 장흥의 천관산(723m) 등이 손꼽힌다. 여기에 지역에 따라 충남 보령 오서산(烏棲山·791m), 창녕 화왕산(火旺山·756m) 등이 추가되기도 한다.

 

화왕산은 한때 영남에서 명성이 높았으나 2009년 억새 태우기 행사 도중 인명이 희생되는 불상사가 있고 나서 명성이 다소 바랬다. 경남에서는 이밖에도 함양 황석산(黃石山·1190m)에서 거망산(擧網山·1184m)에 이르는 산줄기를 보태기도 하는데 명성은 멀리 있으니 스스로 찾아, 발길 닿는 곳이 바로 ‘명산’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는 두 시간 남짓 만에 해발 900m 황매산 오토캠핑장 위 은행나무 주차장에 닿았다. 황매산에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은 것은 노부모를 동반해도 차량진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더니 가족으로 보이는 등산객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평일이라 등산객은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점심을 먹기에는 일렀으나 산에 올라 시장해진다면 곤란한 일, 일단 먹고 오르기로 했다. 주차장 위 매점을 겸한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먹었는데, 참기름을 넉넉히 두른 비빔밥의 맛은 훌륭했다. 정상 부근에서 시중가와 같은 가격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이 산의 미덕이다.

▲ 황매산은 해발 1108m의 만만치 않은 산이지만, 정상의 능선은 완만하고 넉넉했다.
▲ 처음 산의 인상은 밋밋하고 평이해 보였다. 그러나 이 인상은 억새군락지로 들어서면 착각임을 깨닫는다.
▲ 포장된 길은 억새군락지로 들어서면 사라진다. 키 높이로 자란 억새 사이로 난 길은 흙길이다.

깊어가는 가을을 마무리하는 장관

 

억새는 한반도 전역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 꽃이 아름답지도, 향기가 남다르지도 않다. 가을에 줄기 끝에 달리는 빽빽한 작은 이삭이 억새 물결을 만들어내는 주역이다. 한두 포기만 보면 밋밋하고 볼품없지만, 그 군락이 바람에 날리며 연출하는 ‘억새 물결’은 깊어가는 가을을 조금은 쓸쓸하게, 그러나 압도적으로 마무리하는 장관인 것이다

 

정오를 지나면서 해가 기울어서인지 억새군락지로 들어서면서부터 햇빛을 받은 억새 이삭이 반짝반짝 하얗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것은 더러는 눈밭처럼 보이기도 했고 더러는 하얗게 빛나는 메밀밭 같기도 했다.

 

완만한 물매로 이어진 산기슭에 점점이 박힌 관목과 등산객들을 감싸고 바야흐로 억새는 성큼 깊어가는 가을을 쓸쓸하고 무심한 몸짓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는 걷다 말고 탄성을 지르며 한참 동안 걸음을 멈추곤 했다. 군락지 안으로 들어선 사람들도 비슷했다. 그들은 조곤조곤 소리를 낮추어 이야기를 나누며, 얌전하게 사진을 찍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억새 수풀 속으로 사라져갔다.

▲ 억새군락은 햇빛과 바람의 방향에 따라 각각 다른 빛으로 반짝였다.
▲ 억새군락 속에서 사람들은 소리를 낮추어 이야기를 나누며 사진을 찍고 천천히 억새 수풀 속으로 사라져갔다.
▲ 억세지도 역동적이지도 않은 황매산의 억새는 푸근하고 넉넉하게 사람들을 맞아주었다.
▲ 억새군락지를 한눈에 조감할 수 있는 곳에서 느끼는 감정은 고즈넉한 평화다. 앞과 양옆으로 철쭉군락지가 보인다.

병풍바위 쪽의 산등성이에 이르자, 주변의 억새군락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억새는 사람 키 높이로 자랐지만 산 위에서 바라보는 군락지는 마치 완만하게 펼쳐진 양탄자 같았다. 넉넉한 물매로 펼쳐지는 푹신한 양감의 억새 물결은 바람의 방향, 햇빛의 세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빛깔을 띠면서 흘러내려 갔다.

 

천황재로 뻗어내린 천황계곡의 풍광도 아름다웠고, 억새밭 여기저기 무리 지어 걷고 있는 사람들의 조그만 모습도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황매산은 1950년대 빨치산과 토벌대의 쫓고 쫓기는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다. 지리산이나 황매산 철쭉에 빨치산의 원혼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래서다.

 

고즈넉한 평화를 전해주다

 

산에서 내려가야 하는데, 눈 앞에 펼쳐진 억새군락지가 보여주는 처연한 광경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손끝에 닿을 듯 느껴지는 부드러운 양감, 편안한 수평의 공간이 이어지면서 주는 넉넉함과 안온함이 발길을 붙잡는 것이었다.

 

황매산 억새는 무장봉 억새만큼 억세지도, 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능선을 타오르던 간월재의 억새처럼 호쾌하지도 역동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처연한 물결이 고즈넉하게 전하는 평화롭고 안온한 느낌, 마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듯한 풍경은 온몸에 살갑게 감겨왔다.

▲ 넉넉하게 펼쳐지는 푹신한 양감의 억새 물결은 바람의 방향, 햇빛의 세기에 따라 다른 빛깔을 띠며 흘러내려 갔다.
▲ 하얗게 빛을 내는 억새 이삭은 더러는 눈밭처럼 보이기도 했고 더러는 하얗게 빛나는 메밀밭 같기도 했다.

오후 세 시가 겨워 우리는 하산했다. 억새군락지만이 아니라, 황매산 정상을 한 바퀴 돌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내년 봄 철쭉제 때, 한 번 더 황매산을 찾아볼까,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잠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땅을 할퀴고 간 전쟁을 생각했다.

 

오토캠핑장 주차장에서 사적 제131호 영암사지까지 가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으나 9세기 중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영암사는 신라말 밀교(密敎) 형식을 보여주는 사찰이다. 절터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든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삼층석탑(보물 제480호)·귀부(보물 제489호)와 당시의 건물 받침돌·각종 기와 조각이 남아 있다.

 

영암사지는 금당이 있는 상단 축대의 중앙 돌출부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 금당지 연석에 얼굴 모양이 조각되었고 후면을 제외한 3면에 동물상을 돋을새김한 점, 서남쪽 건물터의 기단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에서 일반 사찰 건물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조형의 특이함과 입지 조건, 서남쪽 건물의 구획 안에서 많은 재가 나오는 점 등이 신라 말에 성행한 밀교의 수법으로 세워진 절로 보는 근거다.

▲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영암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480호.
▲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보물 제353호. 금당 앞의 석축 위에 있으며, 바로 앞에는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이 서 있다.

폐사지, 절터가 주는 느낌은 언제나 그렇듯 좀 각별하다. 외롭게 남은 주추, 깨어진 석등, 낡고 퇴락한 돌탑 등의 쇠잔한 모습이 연출하는 고즈넉한 정적 속에서 그 번성했던 시절의 풍경을 하나하나 재구성해 보는 것은 쓸쓸하면서도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 황량한 풍경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시간이라는 관념의 형상화’다.

 

해가 설핏 기울고 있었고, 나는 사진을 찍으며, 절터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폐사지에 남은 유적인데 보물이 세 점이나 있다는 것은 이 절집이 예사롭지 않은 도량이라는 걸 입증하고도 남는다.

 

아내의 성화에 서둘러 절터를 떠나는데 내 입속에선 ‘철쭉제’가 뱅뱅 돌고 있었다.

 

“내년 봄에 철쭉제 때 다시 올까?”

“그럽시다, 까짓것. 당신이 가자면 나야 늘 찬성이지 뭘.”

 

 

2018. 11. 18. 낮달

 

 

지친 마음 어루만져주듯... 반짝이던 황매산 '억새 물결'

억새군락지 아래까지 차로 오를 수 있는 합천 황매산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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