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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백하 김대락3

[순국] ‘남만의 맹호’ 김동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다 1937년 4월 13일-일송 김동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다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만주벌 호랑이’, ‘남만(南滿)의 맹호’ 일송(一松) 김동삼(1878~1937) 선생이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향년 59세. 일본의 만주침공(1931) 직후, 경북 영양 출신의 남자현과 항일 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일제에 체포된 일송은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을 거쳐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그는 비타협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진보적 중도 민족주.. 2024. 4. 13.
“나라 없는 몸… 무덤은 남겨 무엇하겠느냐” [항일의 땅과 사람, 안동①] 내앞 마을, 일송 김동삼과 월송 김형식 지명은 마을의 생성과 역사, 지리적 특성 따위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한 지역의 공동체적 삶을 어우르고 있는 정서적 지리적 표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정비된 1914년 이후 사람들의 마을 이름에서 삶의 향기와 정겨움은 사라져 버렸다. 이 식민 관리들은 고유어로 이루어진 마을이나 지명을 ‘반듯하게’ 한자로 바꾸었다. 애당초 한자 없이는 표기 자체가 어려운 문자를 쓰던 일제로서는 우리말 지명의 의미 따위를 고려할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주의 ‘한밭’이 반듯하게 ‘대전(大田)’이 된 것처럼 임하의 내앞마을은 ‘천전리(川前里)’가 됐다. 내앞마을은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우리 근대사의 곡절 많은 소용돌이.. 2019. 11. 19.
77년 만의 귀환 - 석주(石洲) 이상룡의 국적 회복 무국적 독립운동가들의 국적 회복 무국적 독립운동가들이 국적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 분들이니 이들의 국적 회복은 가족관계등록부를 창설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대상은 단재 신채호(1880~1936),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 선생 등 독립운동가 예순두 분. 임시정부 수립(1919) 90년 만이다. 이번에 가족관계등록부가 창설되는 독립지사는 이상룡, 이봉희, 김대락 선생 등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는데, 이봉희1868~1937)는 선생의 아우이고, 백하(白下) 김대락(1845∼1915)은 선생의 처남이다. 석주가 류인식·김동삼 등과 함께 안동에 협동학교(1907)를 세웠을 때, 백하는 문중 원로들과는 달리 이를 적극 후원하였다. 경.. 2019. 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