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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백범 김구4

[순국(殉國)] 1930년 오늘 - 청산리의 김좌진, 흉탄에 스러지다 1930년 1월 24일, 김좌진 장군 흉탄에 스러지다 1930년 새해를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은 활기차게 맞았다. 지난해 7월 김좌진의 신민부가 김종진, 이을규, 이강훈 등의 아나키스트와 연대하여 결성한 재만한족총연합회(한족총련)가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월 하순 어느 날, 그는 중동선(中東線) 산시역 근처에 있던 한족총련 소속의 도정공장으로 나갔다. 중동선 일대의 한인들이 생산한 수만 석의 미곡을 도정하여 위탁 판매하는 과정에서 중국 상인들에게 농단 당하지 않게 설치한 정미소였다. 이 공장에서 김좌진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소속의 한인 박상실의 총에 맞는다. 1930년 1월 24일 오후 4시였다. 향년 41세. 1920년 항일무장투쟁사에 빛나는 청산.. 2024. 1. 24.
[임정답사]허리 숙여 절하는 광복군… ‘그 가뭇없는 꿈의 안부’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⑬] 충칭(重慶)③ 광복군의 국내 진공 계획 ‘독수리 작전’과 임정의 귀국 충칭에 복원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전시물은 대부분 사진 자료다. 1940년대 사진이라 해상도가 매우 낮아 사람의 얼굴이나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진도 적잖다. 이는 80여 년 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게 쉽지 않았던 탓이다. 망명한 민족 지도자들이 임시정부를 세운 지 21년 만에 ‘광복군’이라는 이름의 직속 군대를 창설한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긴 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 조직한 군대라는 점 외에도 광복군의 열악한 존재 조건은 일일이 셀 수 없었다. 임정은 창군(創軍)은 했지만, 실질적 무장력이 될 병사도 없었고, 그 군대를 운영·유지할 돈도 없었다. ‘병사’를 모으는 광복군의 활.. 2021. 3. 14.
[임정답사]‘홀로서기’ 끝 광복군, 일본의 항복으로 길을 잃다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⑫] 충칭(重慶)②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일본의 패망, 그리고… 답사의 마지막 날은 충칭의 롄화츠(연화지 蓮花池) 청사와 복원된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을 찾는 일정이었다. 롄화츠 청사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1919년 임정을 수립한 뒤 20년 넘게 이어온 항일 투쟁을 수렴하면서 광복을 맞을 때까지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간 행정과 군사의 사령탑이었다. ‘민족 대표와 독립운동 중심기구’로서의 위상 회복한 충칭 임정 상하이를 떠난 이래 8년여 동안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와 류저우, 치장을 거쳐온 임정은 전쟁으로부터 비교적 안정된 지역인 충칭에 정착하면서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임정은 충칭에 오기 전인 1940년 5월 민족주의 세력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함.. 2021. 3. 6.
백범, 삼천만 동포에게 통일정부 수립을 눈물로 고했지만 [역사 공부 ‘오늘’] 1948년 2월 10일 - 김구, 단정 반대·통일 정부 수립 호소 성명 발표 1948년 2월 10일, 등에는 백범 김구(1879~1949)가 동포들에게 ‘통일 정부’ 수립을 호소하는 성명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 실렸다. 같은 해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6개 항의 의견서를 보낸 데 이어 2월 10일부터 12일까지 사흘에 걸쳐 지면에 실린 이 성명은 70 고령의 노 독립운동가의 시국에 대한 절규였다. 김구의 단정 반대·통일 정부 수립 호소 그의 피 울음은 단순 명쾌했다. 1893년 열여덟에 동학에 입문, 1896년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처단하고, 1919년 마흔넷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의 .. 2020.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