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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가사노동5

‘아내가 받쳐 든 한 식구의 안식’에 숟가락을 걸치다 [퇴직 이후, 생활의 복원] 나의 시간이 가고 아내의 시간이 왔다 2016년 2월, 32년간의 교단생활에서 물러났다. 정년이 남았지만, 이제 ‘떠날 때’가 됐다는 걸 깨닫고 주저 없이 학교를 떠났다. 물론 그건 남은 동료들이 바라보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4년, 생계를 위한 노동과 그것이 규정하는 일과에서 벗어나 나는 완벽한 ‘자유인’이 되었다. ‘완벽한 자유인’이 되었다, 고 생각했지만 내가 얻은 것은 자유라기보다는 ‘일상’과 ‘생활’이었다. 일터에서 돌아와 휴식하는 공간이었을 뿐인 집이 비로소 내 삶의 가장 주요한 공간이 되었다. 퇴직 후 내가 한 일은 내 일상과 생활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나는 늘 일해 가용(家用)을 벌어왔고 아내는 전업주부였다... 2020. 7. 7.
노년의 호르몬 변화는 ‘신의 한 수’다 이제 ‘자리끼’ 마련도 내 몫이다 밤에 자다가 여러 차례 물을 마신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죽 그래왔다. 잠자다가도 갈증 때문에 깨기 때문인데 흔히 이를 ‘조갈(燥渴)’이라 하여 당뇨의 증상으로 치지만 내 혈당은 정상이니 해당하지 않는다. 아마 자면서 저도 몰래 입을 살짝 벌리고 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다. 자다가 갈증 때문에 깨어나 물 마시러 일어나야 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선 머리맡에 언제라도 마실 수 있는 물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그래서 철든 이래 나는 언제 어디서나 머리맡에 물을 마련해 놓고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경상도에는 이 ‘물’을 가리키는 말이 따로 없는데 표준말로는 ‘자리끼’라 한다. 사전 풀이로 “밤에 자다가 깨었을 때 마시기 위해 잠자리의 머리맡에 준비하여 .. 2019. 10. 27.
삼식(三食)이의 ‘가사노동’ 연금생활자의 일상 퇴임한 지 얼추 1년 반이 지나며 연금생활자로의 일상은 얼마간 길이 났다. 퇴임 직후에만 해도 이런저런 생활의 변화를 몸과 마음이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부조화가 꽤 있었다. 그러나 이런 때에 제 몫을 하는 게 인간의 적응 능력인 것이다. 퇴직자 가운데서는 직장사회와 동료들과 교류가 끊어지면서 상실감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다고 하는데 실제로 나는 그게 괴롭지는 않다. 마지막 학교에서 근무하던 네 해 가까이 나는 스스로 고립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떠나는 연습을 거듭했었기 때문이다. 괴로웠다고 하기보다는 곤혹스러웠다는 게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10여 시간을 보냈던 학교를 떠나면서 이전에는 사적으로 쓰기 쉽지 않았던 낮이 고스란히 내 것이 되었다. 그런데 더는 .. 2019. 9. 25.
주말 노동 아내의 요청으로 멸치를 다듬다 지난 9월의 일이다. 아내는 집에 없었다. 군에 있던 아들 녀석이 예고 없이 특박을 나왔고, 딸애는 스파게티를 해 달라는 제 동생의 주문에 따라 주방에서 음식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들 녀석은 헤드셋을 끼고 컴퓨터 앞에 아예 좌정해 버렸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서 티브이를 켜 놓고 멀거니 화면에 눈을 주고 있는데 문득 아내의 부탁이 떠올랐다. “언제, 시간 나면, 냉동실에 있는 멸치, 똥 빼고 다듬어 놓아 줘요. 하지만 대가리를 버리면 안 돼요.” 즐겨 먹는 된장이나 국 따위에 통으로 든 멸치를 나는 혐오하는 편이다. 국물에 푸근히 몸을 담가서 우려낸 국물 맛에도 불구하고 물에 불은 놈들의 허여멀건 배때기를 바라보는 기분이 영 께름칙해서이다. 똥을 뺀 멸치를 분쇄기로 갈.. 2019. 8. 11.
가사노동, ‘여자가 받쳐 든 한 식구의 안식’ 이 땅의 숱한 ‘구자명 씨’를 위하여 어버이 모두 돌아가시고 10년째 다시 설날을 맞는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명절은, 또 부모님을 뵈러 큰집으로 떠날 일이 없는 설날은 여느 날과 그리 다르지 않다. 객지에 나가 있던 아이가 돌아오는 거로 새삼 명절이란 걸 확인하긴 하지만 쓸쓸하기야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딸애를 데리고 아내가 장모님을 뵈러 떠난 빈집에 아들 녀석과 둘이 우두커니 앉아 텔레비전 채널만 이리저리 돌리면서 섣달 그믐날, ‘작은 설’의 반나절을 보냈다. 처가에 가 장모님 음식 장만하는 걸 돕다가 오후에야 돌아온 아내는 이내 자리를 깔고 누워버렸다.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느껴진다더니 제대로 감기가 온 모양이었다. 영화 구경을 하자던 아이들의 청도 한사코 마다한 아내를 남겨두고 우리는 시내에 나갔.. 2019.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