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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마이너리티(minority)를 위하여

가사노동, ‘여자가 받쳐 든 한 식구의 안식’

by 낮달2018 2019.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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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숱한  ‘구자명 씨’를 위하여

▲ 설날 아침의 우리 집 식탁. 떡국 대신 비빔밥을 차리게 된 지는 꽤 오래되었다.
▲ 형벌을 받는 아틀라스(Atlas)

어버이 모두 돌아가시고 10년째 다시 설날을 맞는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명절은, 또 부모님을 뵈러 큰집으로 떠날 일이 없는 설날은 여느 날과 그리 다르지 않다. 객지에 나가 있던 아이가 돌아오는 거로 새삼 명절이란 걸 확인하긴 하지만 쓸쓸하기야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딸애를 데리고 아내가 장모님을 뵈러 떠난 빈집에 아들 녀석과 둘이 우두커니 앉아 텔레비전 채널만 이리저리 돌리면서 섣달 그믐날, ‘작은 설의 반나절을 보냈다

 

처가에 가 장모님 음식 장만하는 걸 돕다가 오후에야 돌아온 아내는 이내 자리를 깔고 누워버렸다.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느껴진다더니 제대로 감기가 온 모양이었다.

 

영화 구경을 하자던 아이들의 청도 한사코 마다한 아내를 남겨두고 우리는 시내에 나갔다 돌아왔다. 그새 집안은 말끔히 치워졌고 아내는 저녁 준비가 한창이었다. 잠시 쉬고 일어난 아내는 청소부터 하고 다시 식구들의 저녁 준비로 골몰했던 모양이었다.

 

 미안해서 눈치를 살폈는데 아내는 무심하기만 했다. 원래 가사 일에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은 아니다. 설날 아침에도 새벽에 일어나는가 싶더니 아침밥 준비가 한창이었다. 멋쩍은 새해 인사를 하고 은근히 말을 걸었다.

 

"당신도 명절날 가사노동 때문에 힘이 많이 들어?"

"전에는 식구들 먹인다고 즐겁게 일하고 했는데 이젠 귀찮고 성가시고 그래."

"예전에 큰집이 갈 때는 어땠어?"

"그때그땐 한창때인 데다가 형님들하고 같이 음식 장만하니까 차라리 크게 힘든 줄 몰랐었지."

 

가사노동, 명절 트라우마

 

대가족의 맏이로 태어나서 그런지 아내는 만만찮은 집안일도 기죽지 않고 척척 해내는 스타일이다. 우리 젊을 때 집에 손님이 오면 꼭 밥을 대접했고, 사흘돌이로 찾아오는 제자 아이들도 국수든 밥이든 꼭 챙겨 먹이곤 했던 사람이다. 부엌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비교적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결혼하고 이태쯤 부모님 밑에서 살다가 살림을 난 뒤, 명절마다 찾던 본가도 큰집도, 부모님 이어 형님마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자연 발걸음이 멀어졌다. 이제는 명절 끝에 인사차 들르거나 전화 안부를 묻는 게 고작이다. 쉰이 넘으면서 이제 아내도 시가로부터 온전히 독립한 셈이다.

 

며느리들에겐 명절가사노동트라우마로까지 불리게 될 만큼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가 된 시대다. 어찌 명절 가사노동뿐일까. 여자에게 주어진 주부, 엄마, 아내, 며느리 같은 온갖 지위가 고스란히 짐이 되어 돌아오는 게 여성들의 삶이 아닌가 말이다.

 

지난 겨울방학 보충수업 때 아이들과 마지막으로 공부한 게 고정희의 시 <우리 동네 구자명 씨>였다. ‘여성사연구 5’라는 부제처럼 시는 가사와 일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시대 여성의 현실을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시 전문 텍스트로 읽기]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를 오가는 직장여성 구자명 씨의 출근길 풍경을 통해 시인은 여성이 감내해야 하는 고단한 삶을 영화의 오버랩 기법으로 펼쳐 보인다. 시인은 구자명 씨의 일상이 개인의 그것이 아니라 여성 전체의 삶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 본질은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도.

 

아틀라스 대신 세상을 떠받치는 건 여자

▲ 2018년 10월 통계청이 내놓은 '무급 가사노동 가치 평가'에 따르면 연간 여성의 가사노동은 710만 원으로 평가절하되고 있다.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잠깐 했다. 단지 교과서에 나오는 시 한 편을 배우는 게 아니라, 이 시가 겨냥하고 있는 우리네 삶과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고. 시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는 현실 곳곳에서 여성들의 이러한 희생을 일상으로 만나고 있지 않은가.

 

“‘여자가 받쳐 든 한 식구의 안식을 생각해 보자. 아틀라스(Atlas)라고 알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titan) 말이다.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와 형제지. 아틀라스는 제우스와 티탄과 싸움에서 티탄 편에 섰다가 나중에 제우스로부터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형벌을 받게 되었지.

 

그런데 나나 여러분의 가정의 안식을 떠받치고 있는 건 힘센 우리 남자, 아버지거나 우리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 같은 여자라는 거지. 아틀라스 같은 거인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이라고. 그 희생 위에서 힘센 남자들이 거들먹거리고 있다고 보면 되지…….

 

그런데 문제는 이런 여성의 희생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야. 고통은 꼼짝없이 감내해야 하면서도 정작 이들의 희생은 잘 보이지 않는 팬지꽃으로 형상화돼. 그리고 그것은 식탁을 꾸미는 꽃병 속의 안개꽃처럼 보조적인 위치를 벗어날 수 없기도 해.

 

여러분이나 나나 마찬가지야. 어머니나 아내의 희생 위에서 일가의 안식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걸 기리기는커녕 기억하지도 못해. 엄마와 아내의 희생은 가구처럼 당연한 풍경의 일부일 뿐이지, 이들 덕분에 우리 가정의 평화가 안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일은 거의 없어.

 

집에 가면, 때로 어머니가 받쳐 든 일가의 안식을 잠시 내려놓으시라고, 내가 잠시 그것을 받쳐 들겠다고 어머닐 위로할 수는 없을까. 너희들도 머잖아 이룰 가정을 생각해 봐라. 너희의 아내가 살아갈 삶도 구자명 씨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말이야. 시 한 편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여성의 희생 위에서 잔뜩 폼만 잡고 있는 우리 사회와 그 현실을 돌아보는 게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아이들에겐 그럴듯하게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수업을 끝내면서 자신도 여자의 희생을 이론으로만 기억할 뿐, 그걸 가슴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내는 구자명 씨처럼 일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 집은 외벌이니 아내의 일은 가사 노동이니까 라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어제저녁부터 아내가 일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 것은 아마 고정희의 시 덕분이라고 해도 좋겠다. 나는 자리에 들면서 미열이 있는 아내의 이마를 만져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진심으로. 예전 같으면 손발이 오그라들 얘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그저 우리 집이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건 전적으로 당신의 수고 덕분이야. 고마워. 올 한 해를 이렇게 무사히 보내게 되어서. 그리고 새해도 부탁해.”

 

아내는 빙긋 웃더니,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당신도 수고하셨수. 혼자서 벌어 식구들 먹여 살린다고 정말 애썼수.

 

오늘 아침에 우리는 아이들의 세배를 받고 아내가 정성껏 차린 식탁에서 행복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러나 아직 아내의 명절 가사노동은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 외가를 다녀오고 나면 아이가 떠나는 날까지 아내는 준비한 음식을 하나씩 식탁에 올릴 것이다. 온전히 아들을 위한 노동이니 그나마 그것은 아내에게 기쁨이 될 수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다.

 

 

2013. 2. 10. 낮달

 

고정희(1948~1991) 시인의 시 우리 동네 구자명 씨는 시집 지리산의 봄(1987)에 실린 작품이니 이 시를 쓴 때는 적어도 1987년 이전이다. 30년도 전에 시인은 여성에게 주어진 가사노동의 질곡과 멍에를, 그 누적이 이 땅의 여성사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최근 설날이나 한가위 같은 명절 때 빚어진 갈등이 이른바 명절증후군이라는 이름의 사회문제로까지 이어진 건 일종의 문화충돌이다. 여성의 높아진 인권 의식 등 성평등에 대한 요구와 지향이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명절 가사노동으로 대표되는 차별적 명절 문화를 낳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전통과 부딪친 것이다.

 

차례를 지내며 조상을 만나고 가족의 유대를 확인하는 명절이 오히려 내연하고 있던 성차별의 문제와 불평등한 가부장적 권력 관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명절 후 이혼율의 급증 등으로 이어지면서 상당한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다.

 

올 설날을 앞두고 그간 관습으로 쓰여 온, 성차별적 혹은 성별 비대칭적인 가족 내 호칭 문제가 제기되면서 정부 주도로 호칭 개선 방안이 모색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더는 이러한 성차별적 문화가 일정한 사회적 합의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언의 경고처럼 보인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이 차별적 문화의 주체인 남성 중심 사회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다. 그러나 여성들의 항변에 그게 무어가 문제냐며 도처에서 목도되는, 볼이 잔뜩 부은 남성들의 모습에서 별다른 개선의 조짐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수천 년을 쟁여온 완고한 관습이 쉽사리 무너지긴 않겠지만, 변화는 뜻밖에 혁명적으로 찾아올 수 있다는 걸 믿어볼 일이다. 

 

2019.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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