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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된 봄’과 진달래 화전

by 낮달2018 2020.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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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미루어지는 ‘남북의 봄’과 진달래화전

▲ 전통 세시 풍속의 하나인 화전은 일반 부침개와 달리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기름에 지진 떡’이다.

어제 사진기를 챙겨서 집을 나서려는데, 아내가 산에 가냐고 물었다. 가거든 진달래 꽃잎 한 줌만 따오라, 화전(花煎)을 부칠까 싶다고 주문했다. 나는 진달래 불길이 타오르는 산등성이를 돌아 나오며 진달래 꽃잎을 꼭 ‘한 줌’만 따서 돌아왔다.

 

진달래 화전을 먹으며 하는 평양소주 생각

 

아내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지, 이내 찹쌀가루로 기름에 지져서 화전을 부쳐냈다. 전(煎) 자가 붙었지만, 화전은 일반 부침개와는 달리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기름에 지진 떡’이다. 다른 말로 ‘꽃지지미’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처음인가 했더니 아내가 이번에 꽃술을 떼어냈다고 해, 꽃술조차 떼어내지 않고 화전을 부친 기억이 떠올랐다.

▲ 이맘때면 온 산은 진달래 꽃의 불길로 불타오른다. 외진 곳에 다소곳이 핀 진달래꽃.

화전은 지금은 아는 사람이 드물지만, 고려 시대부터 전승된 세시풍속이다. 삼월 삼짇날, 즉 중삼절(重三節) 들놀이를 할 때 진달래꽃을 따서 찹쌀가루에 섞어서 지진 꽃전을 절식으로 먹었단다. 조선 시대 궁중에서는 삼짇날 중전을 모시고 비원에 나가 옥류천 가에서 진달래꽃으로 화전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진달래 외에도 봄에는 배꽃을 쓰는 이화전(梨花煎), 여름에는 장미화전(薔薇花煎), 가을에는 황국화와 감국잎으로 국화전(菊花煎)을 부쳐 먹었다. 꽃이 없을 때는 미나리잎·쑥잎·석이버섯·대추 등으로 꽃 모양을 만들어 붙여 화전을 만들어 먹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어른들이 화전놀이를 가느라 부산을 떨던 기억이 있는데, 정작 화전을 먹어본 기억은 없다. 처음으로 화전을 먹어 본 게 2009년, 쉰이 훌쩍 넘어서였다. 교외에 목조 주택을 지어 사는 선배 교사 댁에 들렀다가 부인들이 만든 진달래 화전을 얻어먹은 것이다.

 

화전뿐이 아니다. 마침 남북 간 교류가 요즘 같지 않을 때라, 선배가 사 둔 평양소주 몇 병을 곁들인 봄놀이가 질펀했다. 알코올 함유량이 23%인 평양소주는 희석식 화학주가 아닌 증류주, 안동 명주(名酒) ‘안동소주’ 맛, 역시 인공첨가물이 들어 있지 않은 곡주다웠다. [관련 글 : 진달래 화전과 평양소주]

 

진달래 화전은 ‘두견화전’(杜鵑花煎)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난만한 봄날에 부녀자들이 산중으로 들어가 벌이는 화전놀이의 주 품목이다. 요샛말로 하면 일종의 야유회 격인 화전놀이는 <삼국유사>에도 비슷한 기록이 보이니 그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셈이다.

 

부녀자들의 바깥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유교적 금제(禁制)가 심해진 조선 시대에 들면서 화전놀이는 여성들에게 연중 몇 차례에 그치는, 공식적으로 허용된 나들이로 인정받았다. 화전놀이의 과정을 다루며, 여인들의 풍류를 읊은 노래가 ‘화전가(花煎歌)’다. 대개 화전놀이를 마치고 돌아와 그날의 감흥을 오래도록 남겨두고자 짓는 이 노래에는 경승지의 풍물뿐 아니라, 여성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탄식 등이 담겼다.

 

영주 지역의 내방 가사 <덴동 어미 화전가>

 

경상도 순흥지역을 배경으로 창작된 가사 작품 <덴동 어미 화전가>는 그런 20세기 초엽 화전놀이 현장에서 구연(口演)된 한 여성의 일생이다. 화전놀이가 펼쳐지는 가운데 한 청상과부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자 덴동 어미가 나서서 그녀를 위로하며 자신의 기구한 한평생을 털어놓는다. 네 번 혼인했으나 네 번 모두 남편을 잃은 여인, 덴동 어미의 거듭되는 상부(喪夫), 아무리 애써도 끝나지 않는 가난과 불행으로 점철되는 삶이 화전가의 4·4조 가락에 실리는 것이다.

 

그래서 화전놀이를 배경으로 한 ‘덴동 어미 화전가’는 한 여인의 기구한 인생유전을 중심으로 거기 모인 여성들의 ‘해방과 공감의 연대’의 노래다.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젊거나 늙거나, 남편이 있거나 없거나, 글을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이 이들 여성이 서로 공감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비슷한 전근대적 억압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관련 글 : 공감과 연대, ‘비봉산 화전놀이’로의 초대]

 

바쁘게 서둘러서였나, 아내는 찹쌀가루에 소금 간을 하지 않았다. 찹쌀로 부친 화전은 좀 싱거웠지만, 차지고 구수했다. 구미에 당기지 않는지 딸애는 구경만 하더니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동네 교회 앞에 서 있는 살구나무에도 꽃이 피기 시작했다. 봄이 난만히 무르익고 있는 것이다.

 

화전을 우물우물 씹으며 나는 11년 전에 마셨던 평양소주 맛을 떠올렸지만, 그건 잘 짚이지 않았다. 내가 직접 북한 상품 수입 업체에다 주문해 평양소주 한 상자를 사들인 건 그 얼마 후였다. 학교에서 택배로 받은 소주를 나는 동료들과 나누었고 10여 병은 두고두고 손님이 올 때마다 내놓았다.

 

유예된 봄은 언제 풀릴까

 

지난해 3월에 평양소주 이야기를 블로그에 새로 올리면서 나는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 간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조만간 막힌 데가 트이면 평양소주부터 사겠다는 생각을 밝혔었다. 금강산이나 백두산 구경도 갈 수 있겠다는 희망의 불씨도 되살렸었다.

 

그러나 잘 나가던 남북·북미 관계가 소강상태에 들면서 평양소주나 금강산 관광이 문제가 언감생심이 되었다. 지금은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발등의 불이 되었다. 사태가 진정되고, 남북 간 화해가 새롭게 길을 열게 되어 평양소주를 다시 마실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되 봄 같지 않은 봄이다. 날마다 코로나19의 추이와 사망자 수를 전해주는 뉴스를 들으며, 이 ‘유예된 봄’이 언제쯤 유예를 풀고 난만한 봄빛을 즐기게 될 것인지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다.

 

2020. 3.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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