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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음병’과 ‘칼 갈은 노장’

by 낮달2018 2021.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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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소리가 ‘ㄹ’인 용언(동사·형용사)에 명사형 활용

▲ 나무에 꾀는 병충해를 '시들음병'이라 쓰고 있는데 이는 '시듦병'이 맞다. ⓒ <SBS> 화면 갈무리

어간의 끝소리가 ‘ㄹ’인 용언(동사·형용사)에 명사형 어미 ‘-ㅁ’을 붙여 명사형을 만들 때 반드시 ‘ᅟᅠᆱ’의 형식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오래전에 다룬 내용이다. [바로 가기 ☞ <‘베품’이 아니라 ‘베풂’이다>]모음으로 끝나는 어간엔 명사형 어미 ‘-ㅁ’만 붙이면 되지만 ‘ㄹ’로 끝나는 용언에는 어간을 밝혀 적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무심히 ‘베품’을 쓰고 있다. 얼마 전 시청한 공중파 방송 뉴스에서도 같은 오류가 보였다. 미국선녀벌레에 의해 발병하는 ‘참나무시들음병’이 확산하고 있다는 보도였다. ‘시들다’의 명사형은 ‘시들음’이 아니라 ‘시듦’이다. 당연히 이는 ‘참나무시듦병’으로 써야 옳다.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에 ‘자정 넘으면 /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라는 구절이 나온다. ‘낯섦’을 ‘낯설음’으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이른바 ‘시적 허용’에 해당하는 표현이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세 음절짜리 비표준어를 선택한 것은 아마 그게 훨씬 더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고 믿어서였을 것이다.

 

“거칠은 들판으로 달려가자?”

 

어간의 끝소리가 ‘ㄹ’인 용언에 요구되는 또 다른 규칙은 ‘ㄴ’으로 시작되는 어미(-니, -는 등) 앞에서는 반드시 ‘ㄹ’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ㄹ탈락’을 불규칙이 아닌 규칙 활용으로 보는 것은 거기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날-’에 ‘-는’을 붙이면 ‘날으는’이 아니라 ‘나는’으로 써야 한다.

 

특히 어간의 끝소리가 ‘ㄹ’인 형용사에는 현재 관형사형 어미가 동사(‘-는’)와 달리 ‘-ㄴ’이 붙는다. 이때에도 자음이 겹치므로 앞의 ‘ㄹ’이 떨어진다. ‘거칠-’에 ‘ㄴ’이 붙으면 ‘거친’으로 쓴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여기에도 어미 ‘-은’을 붙이는 경향이 있어서 ‘거칠은’, 또는 ‘거치른’의 형식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만날 수 있는 맞춤법에 어긋난 표기들.

80년대 히트한 대중가요 중에 김수철의 ‘젊은 그대’가 있다. 이 노래는 ‘거칠은 들판으로 달려가자’로 시작하는데 사람들은 노래를 즐기느라 그게 잘못된 표기라는 걸 의식하지 못했으리라. 형용사의 현재 관형사형을 이렇게 표기하는 것은 언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인터넷을 잠깐 검색했더니 비슷한 표기가 적지 않다. ‘물든’은 ‘물들은’으로, ‘거친’은 ‘거칠은’으로 표기한 신문 기사가 줄을 잇는다. 대중가요 가운데에는 ‘시들은 꽃’이라는 제목의 노래도 있고, 국내에 개봉된 일본 영화 제목 중 ‘낯설은 섹스…’ 같은 것도 눈에 띈다. 바른말에 대한 의식 없이 마구잡이로 쓰는 말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어느새 이런 말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쓰인다. 그렇게 써도 말뜻은 충분히 전달되니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잘못이라고 지적이라도 할라치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게 “우리말은 역시 어려워.”다. 이 말속에 들어 있는 것은 우리말엔 왜 이리 복잡한 규칙이 있느냐는 불평이다.

 

영어 맞춤법은 쉽다?

 

그 불평의 이면에는 영어 같은 국제어, 이른바 ‘글로벌’ 언어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배우는 외국어로서의 영어가 아니라, 모국어로서의 영어는 다르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왜 우리말만큼이나 다양한 규칙과 예외가 없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문자 생활에서 이런 정도의 어려움은 어느 언어에나 있다. 수년 전 미국의 어느 부통령은 ‘tomato’를 ‘tomatoe’라고 써서 말밥에 오른 적이 있고, 영어사전들에는 ‘database’처럼 붙여 쓴 사전이 있는가 하면 ‘data base’처럼 띄어 쓴 사전도 있다. 또 미국의 주 이름 중 ‘Kansas’는 ‘캔자스’라고 읽지만, 그 앞에 ‘ar’이 붙은 ‘Arkansas’는 ‘아칸소’라고 읽는다. 어찌 영어 맞춤법이 더 쉬울쏘냐?

그런데 왜 우리는 한글 맞춤법만 어렵다고 할까? 한글 맞춤법은 한국인이 한국어로 문자 생활을 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임에도 한국인 대부분은 초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는 동안 이를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경험이 별로 없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한글 맞춤법의 내용을 구체화한, 그리하여 문자 생활에 표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좋은 사전도 드물다. 이러니 한글 맞춤법이 어렵다는 일반인들의 불평도 그리 근거 없지는 않아 보인다.”

     -임동훈(국립국어원 연구관), <한글 맞춤법 100제> 중에서

 

한글 맞춤법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깊이 들어가게 되는 우리말 어법과 문법을 달달 외운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같을 수 없다. 내가 한글이 어렵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웃들에게 늘 같은 말로 마무리하는 것은 그래서다.

 

“영어를 공부하는 데 들인 노력의 반의반쯤만 쓰면 우리말을 훤하게 꿰뚫을 수 있을 겁니다. 한번 공부해 보시지요.”

 

 

2014. 9.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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