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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나신 곳 이웃에 웬 ‘영어 도서관’?

by 낮달2018 2021.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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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태어난 곳 근처 들어선다는 ‘영어 도서관’

▲ 세종 나신 곳 표지석

이 나라의 ‘우리 것 푸대접’의 역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도 서울의 내로라하는 특급호텔에서 한복 입은 손님이 쫓겨나고, 역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공부한다는 대학에서 모든 강의를 100% 영어로 한다는 소식을 확인하면서 사람들은 실소와 분노를 금치 못한다. 그게 우리 핏속에 남은 민족적 정체성의 자취일까.

 

세종대왕이 좌정하신 서울 한복판을 서울시가 ‘한글 문화관광 중심지’로 꾸민다면서 일대를 ‘한글마루지’로 선포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식당가를 ‘광화문 아띠’라 명명하려다가 세간의 반발의 산 게 석 달 전이다. [관련 글 : ‘아띠’? 광화문, 혹은 세종대왕 수난기]

 

그런데 이번에는 종로구가 또 한 건을 벌였다. 종로구에서는 세종대왕의 생가가 있었다고 알려진 통인동 137번지 일대로부터 1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단독주택을 어린이 영어 도서관으로 바꾸어 연다고 한다. 부근은 서울시가 세운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는 곳이다.

 

종로구청에 따르면 초등학생 이하를 대상으로 하는 이 도서관은 5월 어린이날에 맞춰 문을 열 예정이라고 한다.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229㎡)의 도서관에는 구 예산 5억여 원을 들여 영어 도서 1만여 권을 구비하고, 원어민 강사를 채용해 어린이와 학부모를 대상으로 영어 강좌도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관련 <한국일보> 기사]

 

이 도서관의 이름이 ‘세종마을 어린이 영어 도서관’이란다. 논란의 초점은 서울시 계획과도 엇박자가 될 수밖에 없는, ‘한글 마루지’에 웬 영어 도서관이냐는 것이다. 서울시는 통인동을 포함한 세종대로 일대를 한글 문화관광 중심지로 가꾸는 사업으로 이 지역의 간판과 표지판 등을 한글로 바꿔 달고, ‘한글 11,172마당’ 조성, 세종대왕 생가 재현 등을 벌이고 있는데 말이다.

 

이런 구청의 계획에 한글 관련 단체들(한글학회·한말글문화협회·한글문화원)은 구청장에게 공개 질의를 했다. 질의의 요지는 세종대왕 나신 곳 바로 옆에 어린이 영어 도서관을 만드는 게 상식에 맞는가, 다른 장소에 지으면 안 되느냐는 것이다. 구청의 답변은 두루뭉술하다.

 

(……)영어 도서관 운영을 계획한 사항은, 우리나라 전래동화, 설화 등을 번역한 영어책 등을 비치하여 한글과 영어학습을 통한 바른 영어로 우리 문화를 외국인들에게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도록 운영하여 한국 고유문화를 외국에 널리 알릴 초석이 되도록 할 계획이었으나,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뜻에 어긋난다는 귀 단체들의 염려사항 해소를 위하여 도서관 운영내용과 명칭 변경에 관한 주민설명회 개최 및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여 다시 추진할 계획임을 알려 드립니다. [한말글문화협회에서 인용]

 

글쎄, 앞부분을 줄이고도 이게 한 문장이니 거기 담긴 정보를 갈무리하기도 쉽지 않다. 크게 보아 “~할 계획이었으나, ~염려사항 해소를 위하여 도서관 운영내용과 명칭 변경에 관한 주민설명회 개최 및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여 다시 추진할 계획”이다. ‘도서관 운영내용과 명칭 변경’은 고려하겠으나 도서관을 개관한다는 사실의 변화는 없다.

 

구청의 계획에 대한 한글 단체 등의 반대는 얼핏 보면 ‘세종대왕 나신 곳에 영어 도서관’이라는 부조화에 담긴 민족, 민족어 정체성에 대한 문제 제기로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정의적인 측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같은 계획이 아무 거리낌 없이 이루어지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토양에 있지 않은가 싶다.

 

공개 질의서에서 한글 단체들이 밝혔듯 이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해온 영어 열풍 바람을 발 벗고 밀어주고 이 광풍에 앞장서려’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학의 영어 수업이 별 사회적 저항 없이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영어’와 관련된 제도나 주장이 거칠 것 없이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땅에서 ‘세계화’, 또는 ‘글로벌’과 결합된 ‘영어’는 마치 무소불위의 존재이면서 모든 것의 목적처럼 보인다. 부족한 예산도 그것 앞에 서면 늘어나고 ‘민족’과 ‘문화’도 그 앞에서 작아지고 숨을 죽인다. 경상북도 의회는 면 지역 초등학생 무상급식 예산 15억을 전액 삭감했는데 이는 초등 영어 관련 예산 340억에 비기면 가히 ‘새 발의 피’다.

 

보수 세력들의 엄호를 받으며 ‘무한경쟁’을 칭송받던 카이스트의 영어 수업 등이 그나마 문제가 된 것은 재학생의 잇따른 자살 때문이다. 네 명의 젊은이의 목숨이 이 나라 최고의 영재들이 모인 학교의 ‘반교육’을 증언하는 이 반어적 구조는 서글프고 슬프다.

 

이 모든 것들은 아무도 왜, 동양사와 일본어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어야 하는지 답하지 못하는 사회, 우리말 수업에 비겨 그 반이나 반의반밖에 전달하지 못하는 혀 짧은 영어 수업의 비효율성과 그 학문적 비주체성을 제기하지 못하는 사회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한글 단체들의 성명서도 이런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세종대왕과 한글을 잘 내세우면 영어 도서관보다 몇십, 몇백 배로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며 ‘제발 종로구는 얼빠진 영어 열병에 휩쓸리지 말고 종로의 자랑거리를 살릴 길을 찾기 바란다’라는 성명서의 마지막 구절이 서늘하다.

성명서

세종대왕 나신 곳에 영어 도서관을 만들겠다니!
- 겨레의 자존심에 먹칠을 하고 한글마루지 사업을 망치는 종로구 -

우리는 세종대왕 나신 곳에 영어 도서관을 만들겠다는 서울시 종로구의 얼빠진 발상에 대해 매우 분개한다. 이는 마치 우리 말글 문화의 성지에 외국말 기념탑을 만드는 것과 다름없는 일로서 온 겨레가 가장 우러러 모셔야 할 세종대왕을 능멸하는 일이다.

2011년 4월 13일자 <한국일보>에 따르면, 종로구가 세종대왕이 나신 곳에서 100미터 남짓 떨어진 단독주택에 어린이 영어 도서관을 만든다고 한다. 이는 종로구가 제정신을 못 차리고 나라 망칠 영어 열풍에 아무 생각 없이 맞장구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이 없다고 해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일 수 있는지 담당 공무원과 이 사업에 관여한 사람들의 의식 구조가 의심스럽다.

모든 나라가 그 나라 국민이 가장 우러러보는 지도자가 태어난 곳을 찾아 성역으로 꾸미고 국민 교육장으로 만들어 다른 나라 사람에게까지 자랑하고 관광지로 만드는데 우리는 세종대왕 나신 곳을 알리는 조그만 표지석만 길가에 만들어 놓고 방치하고 있다. 제대로 된 나라, 제정신이 든 국민이라면 이래서는 안 된다.

서울시에서는 한글학회, 주시경 선생 살던 집, 한글이 태어난 곳인 경복궁,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 있는 광화문과 세종로 일대를 한글문화 관광중심지로 만들려는 한글마루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종로구가 하필 세종대왕 나신 곳에 영어 도서관을 만드는 것은 서울시의 한글마루지 사업을 비웃는 것이고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세계 역사에서 어떤 나라의 어떤 지도자보다도 가장 훌륭한 인물로서 종로구민은 말할 것도 없고 온겨레가 떳떳하게 자랑해야 할 우리 선조로서 우리의 자긍심이고 자존심이다.

이런 분을 지난날 제대로 받들고 그 정신과 업적을 더 빛내지 못한 것을 반성하고 부끄럽게 생각하자. 세종대왕과 한글을 잘 내세우면 영어 도서관보다 몇십, 몇백 배로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발 종로구는 얼빠진 영어 열병에 휩쓸리지 말고 종로의 자랑거리를 살릴 길을 찾기 바란다.

2011. 4. 14.

국어문화운동본부 회장 남영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 세종대왕생가터찾기준비위원회 위원장 이대로, 외솔회 회장 성낙수, 우리말바로쓰기모임 회장 김정섭,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김경희, 짚신문학회 회장 오동춘, 한글문화연대 대표 고경희, 한글이름펴기모임 회장 밝한샘, 한글문화연구회 이사장 박용수, 한국어정보학회 회장 진용옥, 한글철학연구소 소장 김영환, 한글재단 이사장 이상보, 한글학회 회장 김종택, 한글문화원 원장 송 현, 한글사랑운동본부 회장 차재경,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이대로, 한말글연구회 회장 정재도, 한말글이름을사랑하는사람들 으뜸빛 이봉원, 한류전략연구소 소장 신승일, 훈민정음연구소 소장 반재원.

 

2011.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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