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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경상도 봉화에서 ‘이몽룡’의 집을 찾다

by 낮달2018 2020.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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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성이성이 이몽룡의 모델이었다

▲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의 실제 모델인 계서 성이성이 후학 양성에 힘쓰던 곳, 계서 종택

청암정과 석천정사를 돌아 아내와 나는 잠깐 망설이다 물야면 쪽으로 행선지를 잡았다. 시간은 넉넉했고, 춘양 쪽의 정자보다 물야면의 계서당을 찾는 게 수월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봉화는 자그마한 산촌이다. 그만그만한 마을이 느긋하게 어깨를 겹치고 있는 이 한촌에 뜻밖에 고택·정자가 많다.

 

봉화군에 들어서면 “<춘향전>의 실존 인물 이몽룡 생가”라는 이정표가 군데군데 걸려 있다. 이몽룡이라면 잘 알려진 고전소설의 주인공, 남원 부사의 아들인데 엉뚱하게 ‘봉화에 생가’ 운운하는 것은 뜬금없다. 그러나 눈 밝은 이들은 1999년, 호사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이몽룡은 실존 인물’이라는 보도를 기억한다.

 

‘이몽룡’ 모델은 봉화의 ‘성이성’이었다

▲ 판소리계 소설 대표작 <춘향전>

연세대의 설성경 교수가 ‘이몽룡의 러브스토리’라는 주제의 연구 논문을 통해 알린 것은 <춘향전>의 ‘이 도령’이 ‘성 도령’이었다는 것이다. 설 교수는 “춘향전의 형성과 계통”, “춘향전 비교 연구” 등 춘향전 연구의 권위자다.

 

그의 논문에 따르면 춘향전의 남자주인공 이몽룡의 본이름은 ‘성이성(成以性, 1595∼1664)’, 조선조 광해군 ·인조 때의 실존 인물이다.

 

성이성은 이몽룡처럼 남원 부사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 남원에 살면서 어떤 기녀를 사귀었다.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지역을 순행하다 남원을 찾는다. 물론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고 옥에 갇힌 ‘춘향’ 따위는 없다. 다만 옛 추억 속의 기녀는 이미 고인이 되었을 뿐.

 

설 교수가 논문을 통해 ‘이몽룡’이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은 증명하는 데 쓰인 결정적 자료는 성이성의 일기 등을 편집한 “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와 그의 4대손 성섭(成涉, 1718∼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 설 교수는 성이성의 기록 ‘호남암행록’(“계서선생일고” 중)을 주목했다.

 

십이월 초하루 아침 어스름 길에 길을 나서서 십 리가 채 안 되어 남원 땅이었다. 성현에서 유숙하고 눈을 부릅뜨고 (원천 부내로) 들어갔다. 오후에는 눈바람이 크게 일어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지만, 마침내 광한루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늙은 기녀인 여진(女眞)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과 서리들과 더불어 광한루에 나와 앉았다. 흰 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도다. 거푸 소년 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 설 교수는 ‘늙은 기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밤잠을 설쳐가며 소년 시절을 회상했다’는 부분을 주목했다. 직접 진술은 아니지만, 앞뒤 정황으로 보아 틀림없이 옛 연인을 그리워한 대목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는 이 ‘옛 연인’이 관기였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 여인은 나중에 성이성과의 연을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관기가 개인적 정분을 유지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사회였던 까닭이다.

 

‘암행어사 출도 장면’, ‘몽룡의 한시’도 같다

 

실존 인물 성이성이 이몽룡의 모델이었다는 사실은 “필원산어”의 한 대목에 의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필원산어”에서 지은이는 자신의 고조부 성이성이 남원 땅에서 행한 ‘암행어사 출도’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해 놓았는데 이는 “춘향전”에 그대로 유입되었다.

 

우리 고조부가 암행어사로 호남에 갔을 때 암행하여 한 곳에 이르니 호남 열두 읍의 수령들이 크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한낮에 암행어사가 걸인 모양으로 음식을 청하니 관리들이 말하기를 ‘객이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이 자리에 종일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히 돌아감만 못하리라’. 곧 한 장의 종이를 청하여 시를 써 주었다.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 금동이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반가효만성고(玉盤嘉肴萬姓膏) 소반 위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촉루락시민루락(燭淚落時民淚落)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진다.
(마지막 결구는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다)

 

쓰기를 마치고 내놓으니. 여러 관리가 돌려가며 보고는 의아해할 즈음 서리들이 암행어사를 외치며 달려 들어갔다. 여러 관리가 일시에 모두 흩어졌다. 당일에 파출시킨 자가 여섯이나 되었다.

 

더 볼 것 없이 이 대목은 춘향전에도 그대로 묘사된다. 특히 성이성이 지었다는 한시 구절은 “춘향전”의 그것과 똑같다. 결국 “춘향전”은 성이성의 행적에다 허구를 덧붙여 소설화한 작품인 셈이다. 근원 설화를 바탕으로 판소리 사설을 거쳐 ‘판소리계 소설’로 발전했다는 기존 학설과는 차이가 있다.

 

이처럼 설성경 교수는 <춘향전>의 발생 경로를 다르게 보았다. 그는 성이성 등 실존 인물의 ‘역사적 사실’에다 각종 고사·설화 등 ‘허구’를 덧붙여 최초의 텍스트가 성립되었고, 이후 민중들의 참여(첨삭)를 통해 오늘날의 <춘향전>으로 진화했다고 보는 것이다.

 

전문학자의 연구이니 가타부타할 일은 아니다. 또 그런 발생 경로가 밝혀졌다고 해서 고전 <춘향전>의 가치나 위상이 달라질 것도 없다. 그러나 남원에서 이루어진 양반과 기녀의 사랑이 고소설로 발전하는데 먼 영남의 한 산골 출신의 학자가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봉화군으로서는 우리 고전소설의 대표작인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 지역 출신이라는 이 주장이 탐탁했을 터이다. 봉화군에 즐비한 정자와 전통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계서당(溪西堂)을 추천 관광지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군내에 여럿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 계서 종택의 사랑채인 계서당. 오른쪽 모서리의 판자를 덧댄 곳이 간이 뒷간이다.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의 계서 종택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 계서 성이성의 고택이다. 계서의 본관은 창녕. 남원 부사를 지낸 성안의 아들로 인조 5년(1627년)에 문과 급제하여 진주 부사 등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3차례나 어사로 등용되었다. 근검과 청빈으로 이름 높았던 계서는 뒷날 청백리로 추대되었다.

 

중요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된 계서 종택은 계서가 후학 양성에 힘쓰던 곳으로, 1613년(광해군 5)에 세운 조선 시대의 전형적 사대부 가옥이다.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 집인데, 계서당은 그 사랑채다. 경사진 산기슭에 세운 이 건물은 지형 때문에 실제보다 훨씬 우뚝 솟아 보인다.

 

지엄한 양반댁 사랑채에 ‘뒷간’이 달렸다!

▲ 계서당의 간이 뒷간

계서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앞면 3칸과 좌측면 2칸에 ‘ㄴ’자형 마루를 설치하고 기둥 바깥으로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를 두었다. 앞면은 누 다락같이 꾸몄으며, 누 아래의 기둥 사이에는 잡석과 흙을 쌓았다. 잡석 위로는 암수 기와를 써서 마치 웃는 사람의 모양을 꾸며놓았다.

 

계서당은 여느 사랑채와 그리 다르지 않지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마루 오른쪽 모서리에 달아낸 간이 뒷간이다. 수세식 화장실을 집안에 배치한 양옥도 아닌데 멀쩡한 마루 귀퉁이에 웬 뒷간? 종택을 지키고 있는 종손은 파안대소하며 설명한다.

 

“아, 옛날 어른들은 어쩌면 그래 쉰만 넘으면 그리 힘을 못 썼는가 봐요. 이 집이 높으잖아요? 이 어른들이, 노인도 아닌 어른들이 다리 힘이 시원찮아서 뜰을 내려오다 넘어지고 낙상을 하곤 했대요.

그래서 저기다 뒷간을 만들었다는구먼요. 뒷간 대신 거기 서서 볼일 보시라고…….물론 전에는 밑에다 오줌독을 받쳤지요. 허허허…….”

 

‘필요는 발명을 낳는다.’ 글쎄, 언제부터 간이 뒷간을 만들어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다 하는 양반님네 사랑채도 필요에 따라 ‘파격’을 서슴지 않았다는 점은 유쾌하다. 아예 돌아서서 아래 뜰을 향해 소피를 보는 게 훨씬 더 호쾌한 장면이 되겠지만.

 

계서당 옆의 산비탈은 사당, 그 옆에는 계서가 노닐었다는 ‘계서송(溪西松)’, 또는 ‘몽룡 소나무’가 있다. 땅과 평행을 이루려는 것처럼 왼쪽으로 휘청 굽은 소나무는 지게형의 쇠 부목이 받치고 있다. ‘계서송’이야 있음 직한 이름이지만, ‘몽룡 소나무’야 근자에 붙인 이름이겠다.

 

안채엔 수십 년간의 도회지 생활을 청산하고 종택을 지키러 온 종손 내외가 사는 공간이다. 안채 부엌은 상기도 군불을 때는 가마솥이 튼실한데 한쪽에는 가스레인지가 달렸다. 오래된 고가를 지키는 사람들의 불편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부엌의 모습이다.

▲ 계서당 아래 축대. 잡석을 쌓은 위에 암수 기와로 '웃는 사람'을 꾸며놓았다.
▲ 사당 옆의 '계서송'. 성이성이 노닐던 곳이라 한다.
▲ 계서 종택 안채의 부엌. 군불 때는 가마솥 옆에 가스레인지가 놓였다.

수더분한 종부가 건네주는 감주와 옥수수 차를 한 잔 얻어먹었다. 종손은 집 앞의 논일을 하다 달려왔는데 방에 들어가더니 이것저것 필요한 안내 책자와 팸플릿 따위를 내주고, 방명록에 이름을 쓰기를 권한다. 400년 전의 옛 조상이지만, 그런 조상을 아무나 두는 건 아니다. 양주 분은 조상에 대한 자부심으로 당당해 보였는데, 그런 모습은 보기에 썩 좋다.

 

우리는 종택을 지키는 일의 어려움에 동의하고 빈말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치사를 전했다. 건강해 보였지만, 이 양주분이 세상을 뜨면 이 오래된 집을 지킬 사람은 누구일까. 이 땅 골짜기마다 펼쳐진 고색창연한 고가를 지킬 이들은 늙어가고 사라져 간다. 그것은 이 21세기가 부득이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이다.

 

정중히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계서 종택을 떠났다. 돌아보니 마을은 조그맣게 보이고, 거기 덩그렇게 선 종택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무릇 지나간 것들은 언제나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다. 영주 이산에 있다는 계서의 묘소와 계서 초당은 언제쯤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서둘러 차의 가속기를 지그시 밟았다.

 

 

2010. 3.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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