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안동포 타운을 다녀오다
지난 주말에 안동포타운을 다녀왔다. 청송 백석탄 근처의 물가를 찾았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안동포타운에 들르는 일은 예정에 없었던 일이다. 계획에 없던 여정이 추가된 것은 귀가 시간이 좀 이르다 싶은 데다가 거기 안동포 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었다.
이름도 생뚱맞은 ‘안동포타운’이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에 문을 연 것은 이 동네가 전통적인 안동포 생산지였기 때문이다. 안동포 전시관, 영상실, 안동포 짜기 시연장, 안동포 공예관 등이 들어선 곳은 옛 금소초등학교 자리다. 안동에서 길안으로 가는 34번 도로가 금소리와 안동포타운을 좌우로 가르고 있다.
주말 오후 세 시께의 안동포타운은 적막했다. 마당의 잔디밭은 물론이고 입구 쪽의 맨땅에도 듬성듬성 잡풀이 돋아 있었다. 안동포 전시관을 나오는 관람객 두엇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나는 발길을 돌렸을지도 모르겠다. 주변이 너무 고즈넉해서 나는 이 마을이 잠깐 문을 닫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잔디를 깐 마당 좌우로 콘크리트로 기와집 두 채가 위압적으로 버티고 있다. 왼쪽이 ‘안동포 짜기 시연장’이고 오른쪽이 ‘안동포 전시관’이다. 시연장으로 들어갔더니, 마치 군대 내무반처럼 마룻바닥으로 꾸며놓은 실내에 안노인 네 분이 ‘삼 째기’를 하고 있다.
‘삼 째기’는 벗겨낸 삼을 이빨로 쪼개서 섬유의 굵기를 일정하게 하는 과정이다. 삼실은 얼른 보면 마치 아이들이 ‘붐비나’로 부르는 응원 도구를 가느다랗게 찢어 놓은 것 같다. 노인들은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삼실을 연신 손톱을 이용하여 찢고 계신다.
안노인들은 모습이나 분위기가 참 많이 닮았다. 조금만 바라보고 있으면 거기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내와 나는 노인들 앞에 편하게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노인들은 아마 마을의 필요에 따라 여기서 직접 일을 하면서 관람객들을 상대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시집오셨을 때부터 이 일을 하셨겠네요.”
“그럼, 말도 마시우. 몸서리가 나도록 했지요. 밤낮으로…….”
“이제 할머니들 돌아가시면 이 일은 끊어지겠네요.”
“말해 무엇해. 누가 이 일 하려 하겠어? 부인네들 나가면 3만 원 4만 원을 버는데 종일 붙들고 있어봤자, 몇천 원이 고작인걸.”
나는 노인들의 ‘아이고, 몸서리야’를 이해한다. 어머니가 늘 그러셨으니까. 아이고, 몸서리야. 방아쟁이 일이라면 신물이 나는구나……. 그러고도 어머니는 일흔이 넘도록 그 일을 그만두지 못하셨다. 시연장 마룻바닥에 앉아서 그 몸서리나는 일을 하시는 노인네가 무엇이 다르랴.
사진기를 몸에 지닌 지 수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나는 상대방의 얼굴을 향해 렌즈를 들이대지 못한다. 노인들의 고단한 노동 앞에 내 한가한 짓거리가 부끄러워서다. 고작 노인의 발밑에 늘어진 삼실을 담는 거로 나는 사진기를 닫고 말았다.
‘안동포(安東布)’가 안동지방에서 나는 삼베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영포(嶺布, 영남지방의 포) 중 으뜸이라는 안동포는 조선 시대에는 궁중에 진상될 만큼 명성을 누렸는데 이는 전적으로 기후 등 독특한 자연조건 덕분이다. 낙동강 유역인 안동지역은 토양이 배수가 잘되는 사질토인 데다가 주변의 산이 강풍을 막아주기 때문에 대마 재배의 적지라는 것이다.
안동포는 올이 가늘고 고운 옷감으로서 붉은빛이나 누런 황톳빛이 난다. 조선 시대 이전에는 주로 서민용으로 쓰였는데 통풍이 잘되고 감촉이 까슬까슬하여 중의·적삼 등의 여름철 옷감, 양반가의 상복으로 두루 사용되었다.
현대 화학섬유의 등장과 함께 사양길로 접어들었던 이 삼베제품은 그러나 자연섬유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면서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급은 쉽지 않다. 대마 수확에서 색 내기까지 모두 13가지의 공정을 거쳐 완성되는 안동포는 1년에 한 농가에서 5~8필쯤 생산하며 안동 전체 생산량은 1년에 5천 필에서 7천 필에 불과한 까닭이다.
반드시 수요가 늘어서는 아니지만, 직조 과정 자체가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안동포의 가격은 절대 만만하지 않다. 보통 6~7새의 1필 가격이 90만 원 전후이고, 조선 시대의 진상품과 같은 최고급 보름새(15새)는 1천만 원(실제 유통가로 보기보다는 기능보유자들이 1년에 한두 필을 생산하다 보니 그 희소성에 비추어 그 정도 가격이라는 뜻이다.)으로 값을 매긴다고 한다.
안동포는 삼 껍질 중에서도 속껍질만 가지고 짜는 ‘생냉’으로 다른 지방에서 생산되는, 겉껍질이 붙은 상태에서 화학 처리하여 익혀서 짠 보통 삼베(‘익냉이’)와는 다르다. 수요는 증가하고 있으나 문제는 현재 안동지역에 안동포를 짜는 사람이 9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 대부분이 80대에 가까워, 안동포 생산은 머지않아 단절될 수밖에 없는 위기다.
그동안 '안동포 짜기'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가 되었다. 안동시에서는 기계사를 이용해 소품을 만드는 등 생산원가를 줄여 수요를 창출하는 방안 등을 연구하고 있고, 안동포타운을 세워 안동포를 문화재로 정착시켜 가고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어쩐지 힘에 부쳐 보인다. 안동포타운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적막감과 그 정적 분위기는 어쩌면 오늘날 안동포가 처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동포 전시관을 둘러보고 영상실에서 안동포 직조 과정 동영상을 관람하고 나왔다. 안동포가 만들어지는 과정 곳곳에 안동 여인들의 고단한 삶이 서려 있다. 시집와서 입때껏, ‘몸서리나게’ 일한 까닭에 그들은 “‘이승’에서 실컷 못 입어 ‘저승’까지 입고 간다”는 안동포를 입고 저세상으로 가게 될 것이다.
모피를 만드는 이들이나, 다이아몬드 세공 기술자가 모피와 다이아몬드를 가질 수 없는 것과는 달리 안동 금소리의 안노인들은 ‘가는 길’에 안동포를 입고 떠난다고 한다. 평생을 몸서리나게 한 그 노동의 결과를 누리는 마지막 호사인 셈이다. 스스로 짓는 게 아니었다면, 안동포 수의 중 가장 낮은 가격이 400만 원(6새)에 이르니 그 옷과 저승길을 함께 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안동포타운을 빠져나와 금소리의 좁은 골목길을 한 바퀴 돌았다. 시멘트 기와를 얹은 흙담 위에 핀 능소화가 강렬했다. 퇴락한 기와집 벽돌담 안에, 호박 덩굴이 뒤덮인 돌담 안, 감나무 옆에 우뚝 서 있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1호 안동포 짜기 기능보유자’ 팻말이 쓸쓸했다.
10년이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특별한 대책이 없는 이상, 안동 금소리에서 안동포를 짜는 일은 이제 10년 안에서만 볼 수 있겠다. 노인들 말씀처럼 ‘하루 몇천 원 벌이’로 무형문화재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10년 후에 다시 안동포타운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까를 생각해 보며 우리는 좀 쓸쓸한 기분이 되어 안동포타운과 금소리를 떠났다.
안동포(安東布)
▶ 새
새는 올의 가늘고 굵음을 뜻하며 1새는 80가닥의 올을 말한다. 같은 폭에 들어가는 올의 개수를 뜻하므로 면적이 같은 곳에 한 새(80올)를 더 넣으려면 그만큼 올이 곱고 가늘어야 한다.
따라서 7새인 안동포의 경우 폭 36cm 안에 560올(7새×80올)이 들어가 있다고 보면 된다.
▶ 필
폭이 35~38cm, 길이가 40자(22m)인 안동포를 1필이라고 한다. 보통 1자라고 하면 30.3cm이지만 삼베를 잴 때 쓰는 자는 55cm를 기준으로 사용한다. 다른 지방의 삼베는 폭이 35~36cm, 길이가 20자(10m)를 1필이라고 하지만, 안동포와 남해포의 경우에는 40자를 1필로 친다.
▶ 안동포의 우수성
· 땀을 빨리 흡수하고 빨리 건조한다.
· 통풍이 잘되어 시원하다.
· 마찰에 대한 내구성이 커서 질기고 수명이 길다.
· 빛깔이 곱고 윤기가 있어 외관이 우아하다.
· 열 전도성이 커서 시원한 느낌이 좋다.
· 물에 대한 강도가 커서 세탁 시 손상이 적다.
· 고밀도로 형태 변화가 거의 없다.
· 바닥이 까칠까칠하고 힘이 있다.
· 천년을 두어도 변질하지 않고 좀이 슬지 않는다. /안동포마을
2009. 8.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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