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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은둔의 마을, 지례 예술촌

by 낮달2018 2020.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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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임동면 지례예술촌, 지촌 김방걸의 후손들이 지켜온 마을

▲ 지례 예술촌. '누리집(http://www.chirye.com/)'의 사진이다 .

안동은 인구 16만을 조금 넘는 전형적인 농촌 도시다. 발치를 흐르는 낙동강과 산 사이에 끼인 시가지는 좁은 데다가 거의 굴곡 심한 언덕배기에 조성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반듯한 네거리는 손꼽을 정도고 거리 대부분은 제멋대로 얼기설기 가지를 치고 있어서 과연 이곳이 ‘도시 계획’이 존재했던 도시였던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이 도시의 넓이(1,520㎢)가 서울(602.52㎢)의 두 배를 족히 넘는다는 사실이 별로 믿기지 않는다. 안동 땅이 넓은 건 산에 오르거나 전혀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골짝에도 사람의 온기가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학가산이나 천등산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보면 보이는 건 모두 산이고, 마을은 어쩌다 실낱같이 눈에 띌 뿐이다. 안동의 산은 높지 않지만 깊고, 그 자락은 푸근하고 넉넉한 까닭이다. 댐이 두 개나 들어서는 바람에 물에 잠긴 마을도 많지만, 여전히 안동호나 임하호의 배를 타고 찾아가야 하는 동네도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임동면 수곡리의 무실 마을을 거쳐 들어가게 되는 지례 예술촌도 그런 산자락 깊이 들어앉은 동네 중 하나다. 무실에서 고작 12Km 거리인데도 ‘하마나’ 마음을 졸여가면서 간신히 만나게 되는 동네가 지례마을이다. 말끔한 포장길로 산골짜기를 하염없이 오르다가, 어느 순간에는 다시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하길 되풀이해야 지례(芝澧)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지례마을은 조선 숙종 때 대사성을 지낸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1695) 일가의 자손이 340여 년간 지켜온 전형적 사림(士林) 마을이었다. 지촌은 의성 김씨 내앞파의 대조(大祖) 청계 김진의 현손이며 학봉 김성일의 백씨인 약봉 김극일의 증손자. 38세에 문과 급제하여 40세 무렵 지례에 집을 짓고 호를 지촌이라 하였으니 바로 그가 지례의 입향조이다.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오고 버스가 다닌 건 1975년이라 한다. 그러나 정부가 임하댐을 짓기로 하면서 이 마을은 물에 잠기게 된다. 그러나, 1985년 지촌 문중 소유의 종택과 제청, 서당 등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받으면서 수몰을 면하고 마을 뒷산 중턱으로 옮겨 오니, 이게 현재의 지례 예술촌이다.

 

종손인 예술촌장 김원길은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은 시인이다. 그는 이 마을을 최초의 예술 창작마을(http://www.chirye.com/)로 만들었다. 도회나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이주하는 대신 그는 물에 잠긴 고향을 내려다보며 이 은둔의 마을을 예술인 창작의 산실로 가꾸어 가고 있다.

 

지례마을을 처음 찾은 건 십수 년 전이다. 늦가을, 무슨 연수가 있어서였다. 비포장길과 늦은 밤에 모닥불을 피우며 소주를 마셨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 있다. 휴대폰이 터지지 않아서 들어오는 순간부터 외부와 아주 자연스레 격리되는 이 절해고도 같은 마을을 다시 찾은 것은 지난 16일, 1박 2일의 연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밤에 비가 내렸고, 지산서당의 널찍한 대청마루에서 우리는 연수를 치렀다. 아침에야 바쁜 김원길 촌장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80년대 초반, 이미 세상을 떠난 내 친구를 통해서였다. 42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예순여섯인데도 그는 아주 건강해 보였다.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여러 가지 설명을 들었는데 숙취 탓인가, 남은 기억은 애매하기만 하다. 날씨는 잔뜩 흐렸고, 임하호의 물안개는 끼지 않았다. 덤벙덤벙 찍었던 사진 몇 장 올린다. 무심히 보고 어느 깊은 산골 마을의 여름날 아침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 지촌 종택 ( 경북 문화재자료 제 44 호 )

의성 김씨 김방걸의 종가. 헌종 4년(1663)에 지었고 지금 있는 자리보다 아래쪽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1985년 옮긴 것이다. 본채와 곳간, 문간채, 방앗간 등과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 별묘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이 있는 문간채를 들어서면 마당을 지나 앞쪽에 본채가 있다. 본채는 앞면 5칸·옆면 5칸 규모로 ㅁ자 평면을 갖추고 있다. 건물 배치에서 조선 시대 전형의 종가 양식을 보이는 집이다.

▲ 종택의 문간채
▲ 종택의 사랑채인 무언재(無言齋)
▲ 종택 대문간 . 서 있는 이가 김원길 촌장이다 .
▲ 종택 안채의 마당
▲별묘 ( 別廟 ). ' 하남 ( 河南 )' 이란 현판은 대원군이 쓴 것이라 한다 .
▲ 종택 무언재 앞에 석류나무가 서 있고 , 고무함지엔 연꽃이 피어 있었다 .
▲ 종택 앞 석류꽃이 곱다 . 오른쪽 건물은 별묘 .
▲ 지산서당

지촌 김방걸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지산서당은 정조 24년(1800)에 지었으나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그 뒤 1926년에 복원하였으며, 1988년 임하댐 건설로 지금 있는 자리에 옮겨 세웠다.

 

서당의 주련에는 지촌이 58세 되던 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지례에 돌아와 지낼 당시에 지은 유명한 시 ‘무언(無言)’이 씌어 있다.

▲ 지산서당에서 바라본 풍경 . 중문 너머가 종택이다 .
▲종택에서 바라본 서당으로 드는 중문
▲ 지산서당의 화장실 .벽에는 촌장이 만든 게 아니라 경상북도에서 만든 것이라는 내용이 씌어 있다 .
▲ 지촌제청(경북 문화재자료 제46호)

지촌 김방걸 선생의 제사를 모시는 제청으로 숙종 38년(1712)에 세웠다. 지산서당의 규모가 협소하여 강학이 어려워 제청을 후손들의 강학지소로 이용하여 일명 정곡강당(井谷講堂)이라 부르기도 한다.

▲안개 낀 임하호 .; 원래의 지례마을은 이 물속에 잠겨 있다 .

 

 

2007. 7.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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