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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개목사(開目寺)에서 ‘적요’에 눈 뜨다

by 낮달2018 2020.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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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안동 천등산 개목사의 ‘발견’

▲ 개목사(開目寺)는 봉정사 동북쪽 천등산 줄기에 깃들인 고찰이다 .

‘발견’은 ‘이제까지 찾아내지 못했거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처음 찾아냄’을 뜻한다. 그러나 그 낱말의 속내는 반드시 단순명쾌하지만은 않다. 역사는 아메리카 대륙이 1492년에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기술하지만, 그것은 2만5천 년 동안 거기서 살아온 원주민들을 투명 인간으로 간주하는 불공정한 정치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무명의 대중인 내가 천년도 전에 문을 연 고찰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것은 예가 아니라 일종의 능멸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늘 거기 있었던 오래된 산사가 어느 날, 마치 무슨 계시처럼 마음에 닿아온 것을 ‘발견’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을 어찌하랴.

 

산사가 마음에 다가왔다

 

개목사(開目寺)는 경북 안동 봉정사 동북쪽 천등산 줄기에 깃들인 고찰이다. 그러나 개목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극락전을 품은 봉정사의 명성과 위세에 눌려 버려진 듯 쓸쓸히 서 있다. 굳이 이 절을 겨냥해 천등산에 오르는 이는 없다. 대개 사람들은 봉정사를 거쳐 천등산을 오르다가 간신히 개목사의 존재를 깨닫고 곁눈질로 훑고 지나갈 뿐이다.

 

개목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절집에는 신라의 고승 의상과 얽힌 창건 설화가 두 가지나 전한다. 하나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의 제자인 능인(能仁) 대사가 여기에 큰 절을 세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문왕 때 의상이 출가하여 이 산에서 도를 깨치고 99칸의 절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설화는 대체로 봉정사의 그것과 겹치고 있어 큰 절의 명성에 기대려고 꾸민 게 아닌가 싶다.

▲석등 하나 없는 경내 마당에는 듬성듬성 잡풀이 돋아 있고 , 거기 고인 건 적요다 .

개목사는 고려 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가 10년 공부를 한 절집이다. 그는 개목사를 추억하며 시 한 편도 남겼다. 본래 흥국사(興國寺)였던 절 이름이 개목사로 바뀐 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조선조 초기에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부임해 보니 지세가 눈병 환자(혹은 소경)가 많아질 형상이어서 그 비보(裨補)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조 때에 편찬된 안동 읍지 ‘영가지(永嘉誌)’에 실린 이야기로 안동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많았는데 이 절을 중창하자 눈병(혹은 소경)이 없어졌으므로 절 이름을 개목사라 바꾸었다는 것이다. 절 이름을 ‘개목사’로 바꾼 연유를 설명하는 두 이야기는 상당 부분 겹친다.

 

창건 설화에 담긴 유불(儒佛)의 의미

 

그러나 두 설화의 속내는 좀 다른 것 같다. 맹사성의 그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목민관의 면모와 여말선초에 유행했던 ‘풍수 도참설’의 한 자락을 담고 있는 유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뒤의 설화는 다분히 불교적이다. 그것은 절의 중창으로 부처님의 은혜가 사부대중에 미쳤다는 이야기니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은혜든 목민관의 선정이든 그런 해묵은 이야기가 이 21세기의 중생을 감동하게 할 수는 없다. 천등산을 찾는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갔다는 봉정사를 들렀다 가는 게 고작이다. 정상 바로 아래 자리 잡은 개목사는 하산길에 잠시 들르는 경유지에 불과할 뿐이다.

 

지난 일요일, 개목사를 찾은 것은 절집 근처에서 구절초 구경을 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나는 승용차를 끌고 단숨에 개목사에 올랐다. 거기 찻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초행이었다. 좁고 가파른 길을 오르면서 나는 그게 절로 이어지긴 하는지를 의심해야 했다.

 

팻말 하나 없는, 차 두어 대를 댈 만한 좁은 공터에다 차를 대고 언덕을 넘자, 거기 개목사가 나타났다. 정상(574m) 아래 해발 400m 지점인데도 개목사 부지는 꽤 넓고 평평한 개활지다. 해마다 개목사 주변 갈대밭에서 조망하는 새해 해돋이 행사가 베풀어지는 것은 이런 지형 덕분이다.

 

주변 부지에다 큰 절에 있음 직한 전각들을 모두 앉힌다 해도 99칸을 올리는 것은 힘에 겨워 보인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원통전을 비롯한 몇 채의 요사가 개목사의 전부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울창한 솔숲을 등지고 시방 개목사는 흐릿한 햇살 아래 쓸쓸히, 그러나 고즈넉이 서 있었다.

▲ 개목사가 산속에 호젓하게 들어앉은 여염집처럼 느껴지는 것은 좌우를 틔워놓은, 나지막한 돌담 덕분이다 .
▲ 크고 작은 돌을 겹쳐 쌓은 두꺼운 돌담 위에는 마침 호박 한 덩이가 익어가고 있다 .

중창의 불사 따위가 승려의 능력이나 사찰의 위세로 이해되는 불교의 속화는 천 수백 년의 불교 사적들이 지녀온 역사와 그 조화를 깨뜨린다. 묵은 전각 옆에 날아갈 듯 들어선 생나무 냄새가 가시지 않은 불당이 드러내는 위화감을 떠올리면 개목사처럼 알려지지 않은 호젓한 절집의 미덕은 차고 남음이 있다.

 

호젓한 산사의 오후는 넉넉하다

 

개목사는 마치 산속에 호젓하게 들어앉은 여염집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심상하다. 그것은 주변 풍경에 살갑게 젖어 들고 있는 낮은 지붕의 건물들이 풍기고 있는 검박함 때문인 듯하다. 또 절집을 구획하면서 절집 좌우를 틔워놓은, 두텁지만 나지막한 돌담도 그런 느낌을 돕는다.

 

개목사는 좌우로 요사가 붙어 있는 누문(樓門)을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원통전과 그 오른쪽 뒤편의 산신각 등 전각이 두 채뿐이다. 원통전과 누문 양옆으로 돌담이 둘러쌌다. 이 돌담은 원통전 뒤란을 빙 두르며 나오다 누문의 좌우에서 끊긴다. 물론 사람들은 누문을 거치지 않고 이 요사 양옆으로 경내를 스스럼없이 드나들 수 있다.

 

크고 작은 돌을 겹쳐 쌓은 두꺼운 돌담 위에는 마침 호박 한 덩이가 익어가고 있다. 오른쪽 담 아래는 해바라기 몇 그루와 국화 몇 포기, 원통전 왼쪽은 장독대다. 절집에 장독대가 있는 게 대수로울 일이야 없지만, 절의 주전(主殿)인 원통전 옆에 당당히(?) 자리한 장꼬방(경상도 사투리)은 여염집의 느낌을 더한다.

▲ 억지로 꾸미지 않은 검박한 모습의 이 깊은 산사는 '적요'의 참뜻을 가르쳐준다 .
▲개목사 원통전(보물 제 242호)은 전각으로는 드물게 툇간 마루를 낸 특이한 구조의 법당이다 .

경내는 석등 하나 없이 시원한데 장독대와 원통전 사이에 웬 까닭인지 못 쓰게 된 펌프가 손잡이도 없이 서 있다. 마당에는 듬성듬성 잡풀이 돋아 있고, 거기 고인 건 적요(寂寥)다. 그러나 그것은 쓸쓸함보다는 오히려 넉넉하고 푸근하다. 이 절집에 충만한 것은 쓸쓸하긴 하지만 사람의 온기인 까닭이다.

▲ 개목사 원통전 툇마루

개목사 원통전(보물 제242호)은 특이한 구조의 법당이다. 1969년 원통전 해체 보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이 전각은 1457년(세조 3)에 건립되었다.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마루를 합해서 2칸이다)의 맞배집인데 전면에 전각으로는 드물게 툇간 마루를 냈다.

 

강화 정수사 법당도 툇마루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에 덧붙인 것으로 건물을 지을 때부터 툇마루를 둔 개목사 원통전과는 다르다. 인근 봉정사 대웅전과 영산암 응진전도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있는데 이는 천등산에 깃들인 절집의 공통점인 셈이다.

 

원통전의 규모는 그리 작지 않다. 그런데도 그 앞에 서면 건물이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지붕의 높이 탓인 듯하다. 건물을 지그시 내리누르는 느낌을 주는 맞배지붕 탓도 있으리라. 그런 아담한 규모의 전각에 낸 툇마루는 산행에 지친 등산객들이 쉬어가기 맞춤하다. 그러지 않아도 편안한 절집의 분위기는 한결 푸근해지는 것이다.

 

원통전은 중생구제의 대자대비한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관음전 혹은 대비전, 보타전 등으로도 불리는데 개목사에는 목불(木佛)로 조성한 세 분의 관세음보살 좌상을 모시고 있다.

 

경내에서 가장 눈길이 오래 가는 건물은 누문이다. 개목사 누문은 ‘천등산 개목사’라 쓰인 현판만 아니라면 왼편에 비스듬히 세워놓은 플라스틱 굴뚝 등으로 말미암아 마치 여느 민가의 출입문 같다. 이 단층 누각은 바깥에서 보면 꽤 높다란 누각처럼 보이지만 경내에서 바라보면 아주 조촐한 건물이다.

 

이 단청 없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은 좌우에 요사가 붙어 있다. 대들보에 1819년(순조 18)에 해당하는 연호가 적혀 있어 그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한다. 왼쪽 세 칸에는 마루가, 오른쪽 세 칸에는 방을 붙였다.

▲개목사 문간채 . 이 건물은 이 산사가 은은하게 풍기는 소박한 기품과 고적한 분위기의 종결판이다 .
▲ 개목사에 구절초를 만나러 왔다가 구절초 대신 이 절집의 '적요'를 만났다 .

마당에서 안존하게 서 있는 이 건물은 이 산사가 은은하게 풍기는 소박한 기품과 고적한 분위기의 종결판이다. 누문 앞 은행나무를 이고 선 기와지붕의 담백한 빛깔, 황토벽의 안온한 질감, 댓돌에 놓인 고무신이 환기하는 고적감 앞에서 나그네는 저도 몰래 쓸쓸해질 수밖에 없다.

 

개목사의 ‘적요’에 ‘눈 뜨다’

 

뒤늦게 세운 게 분명한 새 건물인 요사가 좌우의 돌담 밖에 있는 것도 이 절집에서 어우러지는 적요를 돕는다. 가끔 등산객들이 잠깐 들여다보고 가는 것 외엔 일부러 이 산사를 찾는 이는 많지 않다. 요사에서 두런대는 말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마당의 기척에도 무연하기만 했다.

 

오른쪽 요사 앞의 통로로 절을 나선다. 길은 왼편 산등성이를 따라 에스(S) 자로 길게 휘돌다 솔숲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길 오른편에 널따랗게 펼쳐진 갈대밭 너머로 겹겹이 이어지는 산줄기가 아련했다.

 

구절초를 찾으러 왔지만 정작 나는 개목사 부근에서 구절초를 찾지 못했다. 대신 호젓한 개목사의 마당에서 그것 대신 개목사의 적요를 만났다. 스스럼없는 절집 마당에 내려 쌓이는 적요, 그 무심한 가르침에 ‘눈을 떴다’.

 

가을이 가기 전에 다시 개목사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숲길을 가능하면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언덕을 넘으며 흘낏 돌아다 본 산사, 개목사 절집 마당에 고여 있던 적요가 말 없는 말로 배웅의 인사를 건네오는 것 같았다.

 

 

2011. 10. 25. 낮달

 

 

 

이 절이 지어진 뒤 그곳에 눈병이 없어졌다

[여행] 안동 천등산 개목사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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