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서지리 ‘서낭당’과 ‘선돌’을 찾아서
소싯적 일이다. 이웃 마을에서 산 너머 동네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신작로로 가면 금방이었지만 자동차도 드물고 어지간한 거리라도 걸어 다니던 시절이었다. 밋밋한 오르막 위 산등성이에 일부러 만든 듯한 묘한 돌무더기가 하나 있었다.
사람마다 거기다 돌멩이 하나씩을 던져 넣고 지나갔다. 그 마을 아이들은 그게 ‘아기 무덤’이라고도 했고, ‘귀신 무덤’이라고도 했던 것 같다. 거기다 돌 하나라도 던져넣고 가지 않으면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아이들은 우리를 은근히 을러대곤 했다.
지금은 아마 그 길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근대화의 물결이 들이닥치면서 시골에 남아 있었던 공동체의 흔적 따위는 거짓말처럼 지워졌으니까. 그 미스터리의 돌무더기가 ‘서낭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뒷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다.
마을의 수호신 ‘서낭’과 그를 모신 서낭당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정비석을 배웠고 그의 단편 ‘성황당(城隍堂)’도 읽게 되었다. ‘성황당’은 두메산골의 삶과 토속 신앙, 성적 분위기를 조화시켜 인간의 원시적 애정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소설에서 ‘성황님’은 ‘자연과 합일된 인간의 순박한 삶’을 지켜주는 토속신, 즉 자연신이다.
바쁜 독자들은 ‘성황당’에서 인간 본능의 원시적 욕정만을 읽고 가지만 정작 이 소설이 겨냥하는 것은 자연주의, 원시주의에 대한 작가의 경도다. 작가는 건강한 자연이 도시 문명보다 훨씬 선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여주인공 순이와 그녀가 숭배하는 자연신 성황님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서낭당보다 ‘성황당’이 더 알려졌지만, 이는 ‘서낭당’의 한자 표기일 뿐이다. 서낭은 마을의 수호신이고 서낭당은 서낭을 모셔놓은 신당이다. 서낭당은 대체로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추(圓錐) 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 형태로 존재한다. 내가 어릴 적에 만났던 그 돌무더기처럼.
서낭당 곁에는 보통 신목(神木)으로 신성시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신의 영역으로서 신앙의 장소인 서낭당을 지나는 사람들은 돌·나무·오색 천 등 무엇이든지 놓고 지나다녀야 했다. 그곳의 물건을 함부로 파거나 헐지 않는 금기가 지켜져야 함은 물론이다.
서낭당을 지날 때 돌무더기 위에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신(俗信)은 위의 금기가 시대의 진전에 따라 변형된 형태인지 모른다. 내 어릴 적의 기억은 ‘삼세번’이 ‘돌 한 개’로 바뀐 ‘간략화’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
서낭당의 형태는 여러 가지다. ① 서낭나무+누석단(累石壇, 돌무더기), ② 누석단, ③ 서낭나무, ④ 서낭나무+당집, ⑤ 선돌(입석(立石)) 형태 등이 그것이다. ① 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데, ② 는 ① 의 형태에서 서낭나무가 퇴화한 것으로 보거나, 누석단이 먼저 생긴 것으로 본다.
서낭당을 무슨 ‘신당(神堂)’으로 생각하는 것은 ④ 와 같은 형태의 서낭당 덕분이다. 주로 제사를 올리는 당집과 서낭나무가 결합한 형태는 중부 내륙 산간지역과 태백산맥 동쪽의 영동지역에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⑤ 는 높이 120∼200㎝ 안팎, 폭 90∼120㎝가량의 자연석을 세워놓고 ‘수구매기(水口막이)’·‘돌서낭’·‘선돌’ 등으로 부르는데, 이것은 중부, 남부 지역에서 간간이 발견되는 형태라고 한다.
고대 거석문화와 민간신앙의 만남, 서지리 성황당
서론이 좀 길어졌다. 안동은 흔히들 ‘양반의 고장’이고 자칭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문화’는 물론 ‘양반들이 남긴 것’일 터이다. 모르긴 해도 하회에 전승되는 ‘탈놀이’ 따위의 민중문화가 거기 포함되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안동 골짜기마다 들어찬 고택과 정자 등 양반 문화의 흔적에 비기면 민중들이 남긴 삶의 자취는 많지 않다. 그것들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소멸하여야 할 봉건사회의 잔존물로 폄훼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서인가, 이 지역에서 이들 삶의 흔적 찾기는 쉽지 않다.
와룡면 서지리에 성황당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풍산읍 마애리 선사 유적전시관에서 청동기 유적으로 소개된 전시물을 통해서였다. 전시된 사진 속에서 세 개의 돌이 겹쳐진 삼첩석과 두 개의 돌을 얹은 이첩석이 선명했다. 이 돌 구조물 두 개 옆에 쌓아올린 돌무더기가 바로 서낭당이었다.
길을 나선 것은 지지난 일요일 오후였다. 내비게이션을 두드리자 이내 ‘서지리 성황당’이 떴다. 내비는 안동시를 벗어나자마자 와룡으로 가던 큰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난 작은 샛길로 들라고 한다. 중앙선 기찻길이 지나는 굴다리를 벗어나자 교행이 어려운 좁은 시멘트 길이 펼쳐진다.
서울 면적의 두 배가 훨씬 넘는 안동이어서 그런가. 골골샅샅에 오지, 벽지도 많은 편이다. 거의 여유가 없는 좁은 시멘트 포장길을 달리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비킬 데도 없는데 마주 오는 차를 맞닥뜨릴까 봐서다. 비교적 도로 사정이 널찍한 경북 남부 쪽에 비기면 ‘새마을운동’은 이 동네에서만 쉬었는가 싶기도 하다.
그러구러 좁은 길을 조심조심 가는데, 저만큼에서 경운기 한 대가 나왔다. 급하게 길옆 공터에 차를 대고 창문을 열었더니 친절한 노인들은 경운기를 세운다. 성황당이 어디냐니까 바로 위라고, 돌아가면 금방이라 대답하면서 찔레꽃이 무성한 길가 야산을 가리켰다.
차를 버리고 개망초와 찔레꽃이 줄지어 핀 좁은 길을 돌아가는데 세상에, 어디선가 소쩍새가 울고 있었다. 굳이 도시랄 것도 없는 소도시에 살면서도 정작 지척에 이처럼 살아 있는 자연이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부끄럽고 당혹스러워진다. 소형 녹음기를 챙겨오는 건데…, 하고 후회하면서 산모퉁이를 돌았다.
오른쪽으로 시내와 막 모내기를 끝낸 논이 펼쳐지는 저편에 조그만 마을 서지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편으로 난 산길을 오르자마자 서지리 성황당이 나타났다. 옛날 같으면 이 야산은 마을 초입의 동산 격이었겠다.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서낭당이 마을 어귀에 자리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지금은 마을의 수호신 따위야 어찌 돼도 좋은 세상이 되긴 했지만.
서지리 성황당은 크게 세 가지 돌 구조물로 구성된다. 세 개의 커다란 돌을 쌓은 삼첩석, 두 개의 돌을 얹은 이첩석, 그리고 잡석을 쌓아 놓은 돌무더기, 누석단(累石壇)이 그것이다. 문화재청의 ‘문화유산 지식’에는 바닥의 자연석 위에 모자 모양의 돌을 얹은 모관석(帽冠石)이 있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어쩐 일인지 그건 보이지 않는다.
서지리 성황당은 선사시대의 문화와 후대의 민간신앙이 결합한 유적으로 보는 듯하다. 삼첩석과 이첩석은 청동기시대에 이루어진 거석문화 유적의 일부인데 후대에 마을의 허한 곳을 인위적으로 보완해주는 비보적(裨補的) 성격이 추가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누석단은 서낭당의 일반적 형태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섬기는 동신(洞神)이 좌정하고 있는 동사(洞祠)의 역할을 했다. 최근까지도 이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안녕과 무병장수, 풍작을 기원하면서 매년 정월 보름 자시에 유교 방식의 당산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21세기 삶의 양식은 시골 마을에서조차 그런 공동체 행사가 굳이 필요하지 않게 했다. 전래의 민간신앙은 새마을운동과 농촌 근대화 바람에 밀려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성황당의 존재만을 이해할 뿐, 거기서 이루어진 선인들의 삶과 그 기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삽첩석과 이첩석은 ‘거석문화’라 하기에는 민망한, 그리 크지 않은 돌이다. 이 두 돌 구조물 옆에 쌓은 돌무더기가 바로 내 어릴 적에 만난 그 산등성이의 돌이다. 사람들은 돌 하나씩 주워서 이 돌무더기에 얹으며 일신과 가문의 무사 안녕을 빌었으리라.
아이 업은 여인의 형상, 서지리 ‘선돌’
하찮은 돌무더기와 바위에도 자신의 소원을 의탁할 수 있었던 옛사람들은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서지리 마을 바로 앞 들판 논둑에 서지리 선돌이 서 있다. 역시 성황당 쪽의 삼첩석, 이첩석과 함께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안동 지역의 선돌은 대부분 마을 입구의 평지나 낮은 언덕에 세워져 있는 게 특징이다. 선사시대 거석문화 유적인 선돌은 신앙 또는 예배의 대상물로서의 성격이 본질을 이룬다. 선돌이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은 물론 그 자체의 외형적 특질 때문이다. 선돌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외경감을 불러일으키거나 남성 성기를 떠올리게 해 성기숭배와 같은 원시 신앙과 결부되기도 한다.
높이 1.9m, 밑면 너비 0.9m, 윗면 너비 0.4m, 두께 0.45m의 서지리 선돌은 아이 업은 여인의 형상이다. 이는 ‘수구매기(水口막이)’·‘돌서낭’·‘선돌’ 로 불렀다는 서낭당의 다른 형태로 볼 수 있는 근거다.
그 독특한 모양새 탓에 여기 얽힌 전설도 여럿이다. 이 마을은 원래 기와집이 꽉 들어선 부자 동네였다고 한다. 그래서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지들도 마을로 모여들었다.
대부분 집에선 거지들에게 동냥을 주었으나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며느리가 하나 있었다. 그 여자는 몰려드는 거지들을 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다 한번은 탁발 온 스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많은 시주를 받은 스님은 망설이다가 “저기 서 있는 선돌을 돌려놓으시오. 그러면 손님도 줄고 거지도 모이지 않을 테니……” 하고 말하고 가버렸다.
결국, 마을을 향해 아이를 업고 들어오는 모양을 하고 있던 선돌을 반대로 돌려졌다. 그 후 이 부자마을은 사람들이 한 집 두 집 떠나고 폐동(廢洞)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뒤에 마을 사람들이 선돌을 본디 자리로 되돌려 옛날처럼 부자마을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으나 그것은 지금껏 실현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 업은 여인은 이 마을에 부를 가져다주는 주술적 힘의 상징이고, 아이는 그 구체적 부의 상징이었던가. 그걸 돌려세움으로써 사람들은 스스로 가난한 폐촌을 자초한 셈이다. 원래 선돌의 방향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 업은 여인이 바라보는 방향은 마을 정면은 아니다. 여인은 마을 오른편 산기슭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아이 업은 여인의 형상을 한 선돌은 자연스레 마을 입구에서 만난 아낙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이는 아이 대신 밀짚모자를 쓴 머리에 짐을 이고 마을을 나서고 있었다. 들에다 참을 나가는 길이었을까. 아낙의 모습이 선돌의 형상과 묘하게 겹쳐졌다.
길을 막은 채 세워 둔 차 때문에 부리나케 사진을 박고 다시 마을을 나섰다. 좁은 도로를 조심스레 달리며 큰길에 이를 때까지 행여 다른 차나 경운기를 만날까 나는 다시 조마조마한 마음을 쓸어내려야 했다.
마을이 예전의 영화를 찾지 못한 까닭에 여전히 마을로 드는 길이 이 모양일까. 아니면 길이 여전히 좁고 후져서 마을이 더 커지거나 넉넉해지지 못한 걸까. 마을을 떠나면서 서낭당이 있는 동산을 잠깐 돌아보았다.
서낭당을 지나는 산길을 버리고 산을 휘돌아 난 새길 덕분에 서지리 서낭당은 잊힌 유적이 되었다. 당연히 마을을 들고 나는 사람들이 하나씩 보태는 돌멩이로 살아 있던 서낭당과 마을의 수호신도 잊히었다. 어쩌다 이 서낭당을 찾아온 나 같은 얼치기 나그네에게 오랜 속살을 무연히 내보이는 서낭당 주변에 한낮의 소쩍새 소리가 쓸쓸하고 고적했다.
2010. 6.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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