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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찰서에서 터진 폭탄, 의열단 투쟁의 출발이었다

by 낮달2018 2020.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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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100주년을 기리며

▲ 박재혁(朴載赫, 1895~1921) 의사 ⓒ 독립기념관

올해는 박재혁(朴載赫, 1895~1921) 의사의 ‘부산경찰서 투탄(投彈) 의거’ 100주년을 맞는 해다. 1920년 스물다섯 조선 청년은 단신으로 폭력적 식민통치 권력 기구였던 경찰서에 들어가 서장을 향해 폭탄을 던졌고, 이듬해 감옥에서 단식 끝에 순국했다.

 

25살 청년 박재혁,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인간의 수명도 쉽게 이르기 어려운 시간인 ‘100년’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과 어우러져 오늘에 소환된다. 1세기 전, 한 식민지 청년의 투쟁과 희생을 기리면서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오욕의 식민지 역사와 함께 독립을 위해 젊음을 던진 청년의 분노와 그의 시대를 생각한다.

 

1920년이 더러 ‘민국(民國) 2년’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 전해(1919)에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경술년(1910)에 일제의 강제 병합으로 대한제국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고, 9년 뒤에 대한민국은 망명지 중국 상하이에서 ‘백성의 나라’를 선포했다.

 

1919년 11월에 만주에서 김원봉(1898~?) 등이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 비밀 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한 것은 일제의 무력에 맞서 싸우려면 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창단 직후 ‘공약 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 목표를 기본규약으로 삼은 의열단은 독립을 위하여 과감하고 적극적인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고 있었다. 일제의 고위 관리에 대한 암살과 중요관공서 폭파를 겨냥한 의열단의 ‘제1차 국내기관 총공격’은 1920년 3월에 밀양·진영 폭탄 반입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폭탄 반입이 일경에 탐지되면서 폭탄은 압수되고, 행동책임을 맡은 관련자 곽재기(1893~1952, 1963 독립장) 등 12명이 검거되면서 실패했다. 5월의 2차 반입 시도도 단원 6명이 붙잡혀 좌절된 이 계획은 3달 뒤인 9월, 부산경찰서에서 박재혁이 터뜨린 폭탄 의거로 되살아났다.

▲ 경무국이 발표한 밀양, 진영 폭탄 반입 사건의 전모를 실은 <매일신보> 1920년 7월 30일 자 기사 ⓒ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박재혁은 부산 범일동에서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열다섯 살 때 부친을 여의었고 홀로 된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가계를 꾸려야 했다. 그는 사립 육영학교(현재 부산진초등)를 수료(1911)하고 스무 살이 되던 1915년에 부산상업학교(부산상고를 거쳐 현재 개성고)를 졸업했다.

 

박재혁은 상업학교에서 최천택(1897~1962, 2003 애족장), 오택(재영, 1897~1948, 1990 애족장) 등과 사귀면서 민족의식을 길렀고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대한제국에서 펴낸 보통학교 국사 교과서인 <동국 역사>를 비밀리에 등사하여 배포하고 1913년에는 김병태(1899~1946, 1995 독립장), 최천택, 오택과 함께 비밀 결사 구세단(救世團)을 결성했다. 구세단이 단보(團報)를 펴내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에 배포하는 등의 활동으로 그는 일찌감치 일제의 요시찰 대상 인물이 되어 있었다.

 

상업학교를 졸업한 박재혁은 부유했던 오택과 최천택 등과 달리 홀어머니와 누이를 부양하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 전차 차장으로 일하기 시작하였으나 ‘요주의 인물’로 간주된 탓에 곧 해고된 그는 친지가 경영하는 경상북도 왜관 역전의 곡물 무역상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 부산상업학교 시절, 급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 맨 왼쪽의 조선옷을 입은 이가 박재혁이다. ⓒ 독립기념관

박재혁은 1917년 무렵부터 해외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 동남아 지역을 드나들었다. 자세한 활동 기록은 없으나 여러 나라를 드나드는 과정에서 당대의 국제 정세를 종합적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제2 오사카’ 부산에 경종을 울리다

 

1920년 4월, 상하이로 돌아온 박재혁은 김원봉에게 두 차례나 권유받은 끝에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모친과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해서 경제활동에 주력해 온 그는 한 차례 고사한 끝에 마침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부산으로 돌아와 최천택을 비롯한 벗들과 의논하여 가사를 정리했다.

 

김원봉이 송금한 100원으로 그해 8월, 다시 상하이로 간 그가 김원봉의 거사 지시를 받고 부산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트렁크 밑에는 수건으로 싼 폭탄 1개가 숨겨져 있었다. 상하이에서 나가사키로 온 그는 시모노세키에서 일경의 검문을 받아야 하는 부관연락선을 타는 대신 나가사키에서 대마도의 이즈하라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옴으로써 일경의 감시를 따돌렸다.

 

박재혁은 상하이를 떠나기 전, 김원봉과 협의하여 1902년 주철로 만든 러시아식 원통형 폭탄 1개, 군자금 3백 원, 여비 50원을 건네받았다. 김원봉은 그에게 ‘부산경찰서장을 죽여 독립운동의 기세를 높이라’고 하면서는 누구에게 어떠한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지 분명히 밝히라고 지시했다.

 

거사를 단행하기 전까지 그는 최천택·김영주(1896~1930, 1996 대통령 표창)과 함께 동래 온천, 해운대, 범어사 원효암 등지에서 모의를 이어갔다. 일경은 그의 입국 목적을 의심하면서 주변 인물을 탐문하고 있었다.

 

박재혁의 거사 목표가 부산경찰서로 선정된 것은 제1차 국내기관 총공격의 실패를 만회하는 성과로 상황을 뒤바꿔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에서 조선으로 가는 관문인데다가 전형적인 식민도시로 개발되어 ‘제2의 오사카(大阪)’로 불린 부산의 상징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박재혁은 거사 준비 과정에서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가 고서적에 관심이 많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무역업의 경험을 살려 중국 고서 상인으로 위장하였다. 중국 고서 사이에 손수건으로 싼 폭탄을 숨긴 박재혁은 1920년 9월 14일 오후 2시 30분쯤 공무를 보러 온 것처럼 가장하고 부산경찰서 사무실에 들어갔다.

 

박재혁이 하시모토 서장의 오른쪽으로 접근하자, 하시모토가 그에게 몸을 돌리려는 순간, 그는 자신이 의열단원임을 밝히고 폭탄을 꺼내 던졌다. 폭탄은 서장과 직원의 자리 중간쯤의 책상 위에서 터졌는데 굉음과 함께 1층 유리창이 전파되고, 사무실 집기가 부서졌다. 하시모토는 경상을 입었고, 박재혁도 파편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 현장에서 체포됐다.

 

오른쪽 무릎뼈를 다친 박재혁은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고, 현장을 배회하며 거사를 지켜보고 있던 최천택은 폭발음 뒤 박재혁이 나오지 않자 거사 실패로 판단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곧 김영주, 오택과 함께 공범으로 일경에 체포되었다.

▲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다룬 <부산일보> 호외 ⓒ 독립기념관

지역 통치의 본산인 경찰서에서 서장을 겨냥한 의열단의 폭탄 투척 사건은 부산 최초의 대사건이어서 일제는 보도를 통제했으나, <부산일보> 호외와 입소문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식민지 조선의 두 번째 도시인 부산에서 발생한 이 사건에 일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의 <오사카매일신문> 등이 “부산경찰서 투탄 사건은 천만의외라 이야말로 동경 한가운데에 투탄한 것과 같다”라고 할 정도였다.

 

‘확신범’, 사형 집행 전에 단식으로 목숨을 거두다

 

조사 과정에서 박재혁은 내내 단독 거사임을 주장했으나, 일경은 사건의 배후가 김원봉이라고 지목하고 공범에 대한 혹독한 조사를 이어갔다. 그러나 최천택 등이 공범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자 일경은 기소유예 처분으로 이들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살인미수죄’가 적용된 박재혁의 공판 과정은 <매일신보>가 약 1년에 걸쳐 상세하게 보도했다. 재판에서는 박재혁이 다친 다리 때문에 일어서 있지 못할 땐 ‘드러눕히거나 의자에 걸터앉게 하여’ 신문을 계속했다. <매일신보> 보도에 따르면 이 재판에 대한 조선인들의 관심은 대단해서 방청석은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법정에 들어오지 못한 수백 명의 청중은 법정 밖에도 넘칠 정도였다.

 

1920년 11월 6일, 부산지방법원은 박재혁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으나, 검사의 공소(항소)로 이어진 제2심(대구복심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3심인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것은 1921년 3월 31일이었다. 거사가 ‘미수’에 거쳤는데도 2·3심에선 사형이 선고된 것은 ‘치밀한 계획 아래 살해 의사를 가지고 폭탄을 던진 확신범’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사형이 확정되자, 박재혁은 ‘좀 더 살아서 좀 더 일을 하고 싶어서’ 공소를 제기했는데, 사형이 확정되었다며, “어차피 없어질 목숨일진대 어찌 적의 손에 욕보기를 기다리겠느냐! 내 목숨을 내 손으로 끊겠다”고 했다고 한다.

 

대구감옥에서 복역할 때 최천택이 자주 면회하였는데, 박재혁은 그에게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라고 말했다. 1921년 5월 5일 면회 때는 무릎의 상처가 아물었는데, 박재혁은 “왜놈 손에 사형당하기 싫어 단식 중”이라고 하면서 사식으로 가져간 달걀 꾸러미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엿새 후인 5월 11일(음력 4월 4일) 오전 11시 20분, 박재혁은 사형 집행 전 12일간의 단식 끝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거두었다. 향년 26세. 그러나 당시 신문은 그가 지병인 폐병으로 옥사했다고 보도했다. 최천택이 노모와 같이 대구감옥에 가서 그의 시신을 인수하여 기차 편으로 부산 고관역에 운구해 왔다.

 

정거장에는 그 친척과 친구 여럿이 나왔으나 경찰은 군중을 해산했다. 장례도 가족으로 남자 2명, 여자 3명만 참가시키고 입관 때에도 인부 2명만 쓰도록 제한해 타인의 참가를 차단하여 삼대독자 박재혁은 이튿날, 노모와 여동생을 두고 좌천동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혔다.

▲ 박재혁 의사 동상. 1998년 부산 어린이 대공원 안에 세워졌다.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1946년 2월 28일 의열단 의백(義伯) 김원봉이 부산에 와서 제를 올렸으며, 1948년 10월, 유지들의 손으로 좌천동의 정공단(鄭公壇, 임진왜란 때 순사한 부산 첨사 충장공 정발 장군을 기리는 제단) 한편에 비석을 세웠다. 이 비는 1981년 5월 박재혁의 모교인 부산진초등학교로 옮겨졌다. 그의 유해가 국립현충원에 이장 안장된 것은 1969년 4월이다.

 

이후 가열차게 이어진 ‘의열투쟁’의 전개

▲ 1920년대의 의열투쟁은 1920년부터 1926년까지 이어졌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投彈) 의거’는 삼일운동 이후 국내 독립운동에서 이루어낸 의열단 투쟁의 첫 성과였다. 박재혁이 대구로 이감된 후, 같은 해 12월 27일에 의열단원 최수봉(1894~1921, 1963 독립장)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최수봉은 사형을 선고받고, 박재혁이 순국한 두 달 뒤, 대구감옥에서 처형되어 순국했다. [관련 글 : 의열단원 최수봉,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이후, 국내외에서 의열단의 투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921년 9월에는 김익상(1895~1941, 1962 대통령장)이 총독부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고, 1922년 3월에는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김익상과 오성륜 등이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처단하려는 거사가 결행되었다.

 

1923년 1월에 김상옥(1889~1923, 1962 대통령장)의 종로경찰서 투탄[관련 글 : 의열단의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에 이어 3월에는 김시현(1883~1966) 등의 제2차 국내기관 총공격 기도(일명 황옥 사건)가 진행되었다. 1924년 1월에는 김지섭(1884~1928, 1962 대통령장)의 일본 황궁 입구 이중교 투탄[관련 글 : 의열단원 김지섭, 일본 궁성에 폭탄을 던지다], 1926년 12월에는 나석주(1892~1926, 1962 대통령장)의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 투탄[관련 글 : 의열단원 나석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하다]이 전개되었다. [의열단 투쟁 일람 참조]

정부는 1962년 박재혁 의사에게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부산시는 1998년 5월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 대공원 안에 박재혁 의사 동상을, 부산 중구는 지난해 12월, 옛 부산경찰서(부산 중구 동광동) 터 옆 계단에 박재혁 의거를 기리는 표지판을 세웠다.

 

부산시 동구는 2012년, 박 의사의 항일 호국정신을 기리고 기념하고자 동구 범일동 KT 앞 사거리 조방로(범일동 828-10~범일동 834-54) 일원 630m 구간을 ‘독립운동가 박재혁 거리’로 조성했다. 또 올 1월에는 동구 범일동 가구거리 공영주차장 앞에 박 의사의 생가터 표지판을 설치했다.

 

100주년, 그의 얼을 시민의 마음으로 모셔 와야

 

사단법인 박재혁 의사 기념사업회에서 올 9월 14일에 박재혁 의사 동상 앞에서 열려다가 코로나19로 연기한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100주년 기념식을 오는 28일 오전 10시, 부산상공회의소 2층 국제회의장에서 연다고 한다.

 

백 돌을 맞았지만, 박재혁의 이름과 희생은 여전히 모두에게 낯설기만 하다. 그것은 박 의사의 동상이 어린이 대공원 안 성지곡 수원지에서 1.3km나 떨어진 외진 곳에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삼일운동 이듬해, 의열단이 벌인 이 투쟁의 현장에 표지판이 설치된 것은 의거 99년 만인 지난해였다.

 

기념사업회에서 의거 100주년인 올 9월까지 마치려던 박 의사 동상 이전은 부산시와 협의가 진행되지 못해 순국 100돌인 내년 5월까지로 미루었다. 또 생가 복원, 기념관 건립, 훈격 상향, 초중등 교과서에 공적 수록, 독립기념관 내 어록비 건립 등을 추진하고 있으나 얼마나 순조롭게 진행될지는 알 수 없다.

 

동상과 빗돌, 표지석으로 순국선열을 기리는 일은 한계가 분명하다. 마음으로 그의 얼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한, 그것은 한낱 돌덩이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거 100돌을 맞으면서 대한민국 2대 도시 부산이 박재혁 의사와 그의 삶과 투쟁을 시민의 마음으로 모셔오는 일에 힘써야 함은 마땅하고도 마땅한 일이다.

 

 

2020. 10. 27. 낮달

 

 

덧붙이는 글 |

박재혁 의사 관련 기록은 자료마다 서로 다르다. 특히 폭탄 투척으로 부산경찰서장과 순사 2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 기사는 <항도부산> 제37호(2019. 2.)에 실린 박철규(명지대) 교수의 ‘의열단원 박재혁의 생애와 부산경찰서 투탄(投彈)’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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